2천3백명의 박수가 쏟아지던 지난 5월 프랑스 칸 뤼미에르 대극장. 영화 <베테랑 2> 팀을 향한 갈채와 환대를 천천히 눈에 담던 류승완 감독이 마이크를 건네 받았다. “여러분은 이 상영관에 오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셨나요? 저는 이곳에 오는 데까지 50년이 걸렸습니다.” 칸에서 머무는 내내 그의 말을 곱씹었다. 꿈 하나를 붙잡은 채 비바람과 햇살을 고루 맞던 한 인간의 집념을, 희미한 빛에 환호하고 옅은 그림자에도 침잠해야 했던 무수한 밤과 다시 털고 일어나는 아침 같은 순간들을 말이다. 아무리 더듬어봐도 헤아려지지 않는 시간이었다. 제77회 칸영화제에서 <베테랑 2>의 류승완 감독, 배우 황정민, 정해인을 만났다. 세 사람과 함께한 칸에서의 찰나.
지금으로부터 여덟 시간 뒤 칸영화제에서의 공식 첫 상영을 앞두고 있습니다. 초청 사실이 공식 발표되기 전 류승완 감독님이 배우분들에게 먼저 전화를 했다고요.
류승완 언론에 공식 기사가 나가기 전날 밤이었어요. 대표님에게 허락 안 받고 배우들한테 연락을 한 거죠. (칸영화제에) 가게 됐다고 하니까 황(정민) 선배는 “음식도 안 맞고, 멀어서 안 가” 그러고, 정해인 배우는 너무나 차분한 목소리로 “잘됐네요” 하더라고요.
정해인 상황 설명을 하자면(웃음) 촬영 중이라 대기 공간에 스태프들과 여럿이 같이 있어서 큰 소리로 리액션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만약 혼자 차 안에 있었으면 조금 다른 반응을 했을 텐데….
감독님, 실망하셨나요?
류승완 지금까지 본 황 선배는 중요한 결정이 나거나, 크게 좋은 일이 생기면 되려 차분하게 대응을 해요. <베테랑> 1 때는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개봉 전 특별 시사회를 했어요. 그 자리에 3천 명이 온 거예요. 대기실에 가서 지금 밖에 난리 났다고 하니까 그때도 저한테 “왜 그래. 가만히 있어” 하던 분이 에요.
황정민 개봉 전이잖아요. 왜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 좋은 일에 유난스럽게 좋아하면 귀신이 그걸 듣고 시기, 질투를 해서 더 잘될 일을 방해한대요. 그래서 조용히, 조심하려는 편이에요. 말도 가려서 하고.
류승완 감독님은 두 번째, 황정민 배우님은 네 번째 초청이지요. 하지만 2천3백 석이 채워지는 칸영화제의 중심, 뤼미에르 대극장에서의 상영은 보다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황정민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큰 영화제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죠.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기분 좋게 <베테랑 2>의 첫 단추를 끼우고 있는 거잖아요. 이 영화가 잘됐으면 하는 바람과 염원이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있지만, 그 결과는 개봉을 해봐야 아는 거니까요. 칸영화제가 먼저 알아봐줘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류승완 아주 어릴 때부터 영화 만들기를 바란 사람으로서 영광스럽다는 표현 이외에는 다른 말을 못 찾겠어요. 오랜 시간 품어온 꿈이니까. 물리적으로 인천국제 공항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열 몇 시간이 걸렸을 뿐이지만, 저 개인적으로는 52년이 걸린 셈이에요.
처음으로 칸영화제에 온 정해인 배우는 어떤가요?
정해인 꿈꾸는 것 같아요. 긴장도 많이 되고요. 아까는 입이 바싹바싹 마르더라고요. 어제까지는 체감이 잘 안 돼서 ‘축제구나’ 싶었는데, 오늘 밤에 레드카펫에도 서야 고 무엇보다 2천3백 명이 모여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니까….
류승완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어떤 상황이냐 하면 <전국노래자랑> 지역 예선 통과하고 갑자기 연말 결선 무대에 서는 느낌인거에요.
9년 만의 속편이라는 점도 놀랍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있었나요?
황정민 1편 개봉할 때부터 2편 작업을 빨리 하자고 이야기했는데 계속 뭐가 맞지 않았어요. 만날 때마다 “왜 안 해?” 하고 물으면 딴 거 작업한다고 하고. 저는 저대로 다른 작품 하고. 그런 상황의 연속이었어요. “<베테랑 2> 안 한대?” 하고 물으면 “<밀수> 한다” 고 그러고.(일동 웃음)
류승완 채무 관계도 아닌데.(웃음) 1편 촬영 막바지부터 속편 이야기를 했어요. 현장에서 스태프와 배우들이 이 영화와 인물들을 너무 좋아했어요. 우리끼리는 속편을 만드는 게 기정사실이었어요. 빠르게 스토리를 몇 개 써서 황 선배와 상의하기도 했는데 성에 차지 않는 거죠. 전작이 큰 성공을 거뒀으니 저 로서는 성공의 공식이 보일 거 아니에요. 한데 그 공식을 그대로 따르기가 싫은 거예요. 우리 스스로도 1편이 자랑스러우니까 더 좋은 걸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움직임을 무겁게 만든 것 같아요. 무엇이 최선일까 고민하다 보니 9년이 흐른 건데…(웃음) 재미있는 건 2편 촬영 첫날, 황 선배가 1편 때 입었던 옷을 입고 국과수를 걸어 나오는 장면을 찍는데 마치 지난주에 찍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워낙 관리를 잘하셔서 큰 차이가 없기도 했고요. 함께 작업하는 팀도 며칠 만에 다시 모인 것처럼 호흡이 잘 맞았어요. 달라진 게 있다면 밤 11시가 지나면 대사 읽는 속도가 급격히 느려진다는 거? 야식 먹고 나면 졸고.
9년 사이의 큰 변화는 체력 손실 외에(웃음) 정해인 배우의 합류죠. 정해인 배우가 어떤 변수를 가져온 것 같나요?
황정민 새로운 인물이 들어온다는 건 저희에게는 행복한 일이에요. 그 인물로 인해 리액션이 바뀌는 거니까 기대하게 되죠. 한데 새로운 인물인 당사자는 이미 만들어진 성벽 같은 울타리 속으로 들어와야 하니 부담스럽겠죠. 그래서 누가 하게 될지 궁금했어요. 정해인 배우가 한다고 했을 때 너무 좋았고요. 본래 가지고 있는 외모에서 나오는 에너지보다 관객이 모르는 부분을 잘 보여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본인도 이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함께했고요.
정해인 제가 연기한 인물 자체가 공고한 팀 안에 녹아들어 그들을 관찰하고 친해지려 노력하는 인물이거든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배역처럼 현장에도 임한 것 같아요. 막내고, 막내 형사니까. (황정민) 선배님 말씀대로 제가 지금까지 보지 못한 얼굴이 많이 나와요.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면서 저조차 제 모습이 낯설 때가 있었거든요. 살면서 그런 표정을 지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연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요. 놀라웠어요. ‘저런 표정이 나온다고?’ 하며.
사회상을 다루는 작품인 만큼 9년 사이의 사회 변화, 동시대성에 대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변화와 현상에 주목하고 유심히 보고자 했나요?
류승완 9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술에 의한 변화가 있지만 저는 1편을 찍을 때나, 2편을 찍은 지금이나 세상이 더 좋아지거나 나빠지지 않은 것 같거든요. 희망은 어느 순간, 어디에나 존재 하고 동시에 당장이라도 세상이 멸망할 것만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도 일어난단 말이에요. 늘 그런 상황이 반복된 것 같아요. 달라진 건 제 관점의 변화일 거예요. <베테랑 2>의 가장 큰 변화는 어떤 사건이 아니라 주인공 ‘서도철’이에요. 주인공이 하나의 아이콘이 돼 변화하는 사건을 겪어내는 이야기가 있다면, 사건보다는 인물의 변화로 인해 극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서사가 있는데, 우리 영화는 후자에 가까워요. 시간이 흐르며 변화하는 서도철의 모습을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변화가 성숙한 변화인지, 그 반대인지는 모르죠. 1편을 응원하는 관객은 익히 아는 모습을 한 서도철의 귀환을 원할 텐데 연출하는 사람으로서는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를 어떻게 맞춰가야 하는지가 큰 숙제였어요. 이 부분에서는 황 선배가 부담을 많이 느꼈을 거 예요. 결과적으로 그 변화를 지지해주셨고, 너무나 잘 구현해냈죠. <베테랑>은 감독의 영화라기 보다 배우의 영화이기 때문에 배우의 지지와 구현이 없었다면 영화가 이렇게 완성되지 못했을 거예요.
황정민 1편 때 서도철의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고, 2편에서는 고등학교 2학년이에요. 제 아이가 딱 그렇거든요. 그 시간 동안 저 역시 아빠로서, 직업인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변화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 변화의 설정들이 서도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어요.
이런 설정은 감독님의 빅 픽처였던 거죠?
류승완 그렇죠. 저는 어떻게든 이 사람을 잡아야 하니까.(웃음)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면요?
류승완 저는 두 개의 목표가 있었어요. 첫째는 ‘시나리오로 인해 불가피하게 바뀌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1편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을 현장에 다시 모이게 한다’였어요. 그렇게 70% 이상 전작의 메인 팀이 참여했어요. 그리고 둘째는 ‘보다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였고요.
좋은 영화라는 말은 상대적이잖아요. 개인의 시기나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고요. 요즘 세 분에게 좋은 영화는 어떤 영화인가요?
황정민 (긴 정적) 어렵다. 진짜. 지금까지 좋은 영화가 무엇인가, 좋은 배우는 무엇인가에만 수십 년을 고민하며 연기해왔어요. 한데 정작 나 황정민은 좋은 사람인가에 대해서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어요. 늘 내 일에 대해서만 고민했지. 그래서 요즘 그 점 때문에 힘들어요. 공부하는 중이에요. 질문에 대한 답이 되나?(웃음) 좋은 영화… 좋은 영화라는 것이 뭘까요? 관객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올 때 ‘영화 너무 좋다. 돈이 아깝지 않다. 친구야, 좋은 영화 보여줘서 고마워’ 하는 영화가 좋은 영화일 텐데… 우리가 그런 영화를 만들고 있나? 하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겠죠.
류승완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좋은 영화가 다른 이에게는 최악의 영화일 수 있죠. 혹은 굉장히 좋아했던 영화인데 시간이 흘러 다시 봤을 때 ‘내가 이걸 좋아했단 말이야?’ 하게 되는 영화도 있고요. 싫어했던 영화가 뒤늦게 공감되는 경우도 있죠. 호기롭게 ‘이게 좋은 영화입니다!’ 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 시기가 있었는데, 갈수록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 말은 했지만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건 있는 것 같아요. 우리가 기술 시사를 해보면 알거든요. 같이 만든 사람들은 아는 공기가 있어요. 현장 분위기가 아무리 좋았어도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음…?’ 하는 경우가 있고, 아무리 지옥 같은 현장을 겪어도 ‘우리가 이거 하나 남겼다’ 하고 느끼면 그다음부터는 흥행 스코어와 무관해지거든요. 만든 사람은 알아요. 이게 얻어걸린 건지 아닌지를. 영화 <스쿨 오브 락>에서 좋아하는 대사가 있어요. 재능이 없다고 괴로워하는 학생에게 잭 블랙이 이런 말을 해요. “재능이 없는 게 죄는 아니지 않니.” 좋은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은 없지만, 나쁜 영화에 대해서는 답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하지 않은 영화는 나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흥행에 성공한다 해도 얻어걸린 성공에 취하는 건 나쁜 태도라고 생각해요. 황 선배님이 “사기 치지 말자, 속이지 말자”라는 말을 자주 하세요. 결국 영화를 대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봐요. 최소한 나쁜 영화는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죠.
정해인 감독님 말씀을 듣다 보니 황정민 선배님과 촬영한 장면 생각이 많이 나요. 보통 상반신만 촬영할 때 상대 배우는 쉬기도 하거든요. 근데 선배님은 늘 카메라 뒤에서 시선을 잡아주고, 직접 보고 할 수 있게끔 매번 같이 연기해주셨어요. 그러면 리액션이 달라지죠. 그건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거든요. 어떤 일에 임하는 태도라는 말을 들으니 그때가 생각나네요. 저도 시간이 지나서 이 일을 더 오래 계속한다면 후배들과 작업할 때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왜, 무엇이 계속 영화 안에서 살게 했다고 생각하나요?
류승완 저는 다른 걸 할 줄 몰라요. 어떻게 그렇게 돼버렸어요. 너무 많이 와버렸죠. 저에게도 황 선배님이 말한 비슷한 딜레마가 있는 게, 어떤 때는 ‘내가 일중독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다른 것에는 관심이 가지 않고, 사람들과 연락도 잘 안 해요. 취미 생활도 없이 제한적으로 살아요. 그래서 휴대폰 배터리 한 번 충전하면 하루 하고도 반나절은 넘게 써요. 근데 이런 생활이 답답하지 않아요. 그 상태가 제일 좋아요. 어떤 분은 “영화를 이렇게 빨리 찍어? 힘들지 않아?” 하는데 저는 영화 말고는 집에서 뉴스 보는 게 전부라.
황정민 집에서 뉴스만 보고 있는 것보단 영화 찍는 게 낫지. 저도 마찬가지예요. 배우들은 내가 하고 싶어서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캐스팅을 당하는 입장이니까 어느 순간에 끊기는 때가 있겠죠. 그날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중이에요. 끊기더라도 잘 끊길 수 있게. 하루아침에 끊길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말자고 계속 생각하는 중이에요. 왜 그렇게 슬픈 눈으로 저를 봐요?
(며칠 전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고 지금 칸영화제에 오신 분이….)
황정민 아니에요. 늘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정해인 재미있고, 하고 싶어서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어 감사하고요. 하고 싶다고 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불러주실 때, 찾아주실 때 감사히 해야죠.
류승완 그렇죠. 물 들어올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