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나는 영화의 힘을 믿으며, 연기 안에 머무르고 있다.” 도전과 난관을 마주하면서도 배우 이소무라 하야토(磯村勇斗)가 붙들고 있는 믿음.
오늘 촬영은 어땠나?
즐거웠다.(웃음) 한국에서 화보를 찍는 건 처음이라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는데,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 그래서 편안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
도쿄와 서울, 베를린을 배경으로 하는 넷플릭스 시리즈 <소울메이트> 촬영을 위해 약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렀다고 들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어땠나?
서울을 아주 좋아하게 됐다. 첫 방문인데 벌써 집을 구하고 싶을 정도로.(웃음) 거리를 걸으면 도쿄가 떠오르고, 호텔 앞에는 맛있는 음식점이 줄지어 있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데, 다양한 브랜드의 쇼룸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지루하지 않더라. 앞으로 한국을 더 많이 탐험하고 싶다.
한국에서 이소무라 하야토를 볼 일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 <소울메이트>에서 옥택연 배우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그와 함께 연기하는 과정은 어땠나?
이번 촬영으로 택연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그는 현장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때로는 짐승돌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파이팅 넘치게 소리를 지르는데, 그 덕분에 촬영장에 활기가 돌았다.(웃음) 슛이 들어가면 순식간에 집중하고, 연기에도 뜨거운 열정을 보여주었다. 우리 둘 사이에는 감정적인 장면이 많아서 어떻게 연기해야 좋을지 의견을 교환하고 논의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그 때문인지 택연과 정말 ‘소울메이트’가 된 기분이 들기도 한다.(웃음)
10월 11일 일본 개봉 예정인 영화 <젊고 낯선 자들>의 주인공 ‘아야토’ 역을 맡았다. 어떤 점에 이끌려 이 작품과 함께하고 싶었나?
아야토는 극의 주인공임에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작품 중반부터 그 모습이 사라진다. 처음 각본을 읽었을 때, 그 이야기 구조 자체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젊고 낯선 자들>은 일본 사회의 여러 주름진 부분을 짚는다. 소외되고 고통받고 있지만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전달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 적이었다.
최근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초고령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5세 이상 노인의 죽음을 지원하는 가상의 일본 사회를 그린 <플랜 75>, ‘바른 욕망이란 무엇이가’라 는 화두를 제시하는 <정욕> 등 다양한 사회적 질문을 던지는 화제작에 출연했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대본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명성 높은 감독이나 떠오르는 젊은 감독이 연출을 맡아도 그 이름 자체가 작품에 참여하는 이유가 되진 않는다. 대본이 얼마나 마음을 움직이는지, 처음 읽었을 때 어떤 인상을 주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최근에는 사회적 주제를 다루는 여러 작품에 참여했는데, 아무래도 내가 발붙이고 있는 이 세상을 어떻게 표현하고 또 드러내야 할까 고민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부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유연하게 다양한 배역을 선택하고 싶다.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도 있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달>이 떠오른다. 이 작품은 실제로 일본에서 일어나 큰 사회문제가 된, 장애인 시설의 살인 사건을 다룬다. 영화를 만들며 감독과 조사를 많이 했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보니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뉴스에서 다루지 않은 정보도 알게 되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워낙 큰 문제고, 숨겨진 부분도 많아서. 나 같은 인간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허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서 말한 배역들을 연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본성을 탐구하는 과정이 필요했을 듯하다. 작품과 인물을 깊이 이해하고 소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대본을 읽으며 내가 맡은 배역이 어떤 성향의 인물인지 글로 습득 한 후, 입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을 한다. 필요하다면 그의 삶을 온몸으로 느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젊고 낯선 자들>의 아야토는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간병하며 동생도 돌봐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그가 지닌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표현하기 위해 촬영 한 달 전부터 식사와 수면을 제한했다. 내가 나의 몸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인물의 삶을 체험하면,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한 인터뷰에서 ‘사람을 연기하는 것은 그 사람으로 살아내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과 맥락이 이어지는 듯하다. 배우로서 다양한 삶을 대신 살아보며 ‘이소무라 하야토’라는 사람은 무엇을 얻고 있나?
내가 그저 나라는 사람으로만 살았다면 이소무라 하야토가 바라보는 세상밖에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의사 역을 맡으면 의사의 세계를, 경찰 역을 맡으면 경찰의 삶을 알게 된다. 전혀 알지 못하던 세계와 온몸으로 감응하는 셈이다. 그렇게 다양한 생을 살아보면 마음뿐만 아니라 사고방식 등 여러 면에서 나 자신이 풍요로워진다. 셰프를 연기하면 칼질이 늘고 생선 요리도 할 수 있게 되고.(웃음)
그렇게 작품을 통해 무수한 인물을 거치면 스스로에 대해 새롭게 깨닫거나 더 깊이 알게 되기도 하나?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이해하기도 다루기도 어려운 존재 아닌가.
음… 나는 지금까지 나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과 흥미가 크게 없었다. 내게는 연기해야 할 배역이 있으니, 실제 삶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젊고 낯선 자들>을 촬영하며 변화를 겪었다. 아 야토라는 역할을 맡으며 간접적으로 죽음과 상실을 접했고, 세상에 남겨진 이들의 생각을 알게 됐다. 그러고 나니 나를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졌다. 누군 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도 깨달았다. 그래서 함께한 스태프, 배우들과 더 자주 만나고 있다. 나조차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이런 일은 거의 없었는데, 타인의 따스함을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웃음)
<젊고 낯선 자들> 현장의 어떤 점이 당신에게 따뜻함을 주었나?
글쎄, 아마 화학 작용인 것 같다.(웃음) 작품 속 인물을 통해 새롭게 배운 것뿐만 아니라, 작품을 함께 만든 스태프 한 명 한 명의 친절, 그리고 좋은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현장에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는데, 이런 일은 극히 드물다. 그들의 따스한 온기가 서로에게 전해졌고, 결국 하나가 되어 내게 다가온 것이 아닐까 싶다.(웃음)
이전에 ‘자신에게 도전이 되는 역할을 연기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도전은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며 배움을 안겨주지만, 동시에 여러 어려움을 수반하지 않나. 그 럼에도 다양한 시도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연기를 좋아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 열정이 나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고. 작품을 하나의 조직이라고 생각하면 나는 배우라는 부서에서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다. 내가 평소에 느끼는 것을 말로 전달할 수도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전했을 때 그 힘이 더 강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만나면 기꺼이 도전하고, 어려움을 마주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된다. 그저 배우로서 그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어진다. 그게 내 사명이라고도 생각하고.
마지막 질문이다. <젊고 낯선 자들>의 ‘아야토’, <달>의 ‘사토’, <정욕>의 ‘사사키’ 등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혹은 그저 우리일 수도 있는, 평범하게 불행한 이들을 영화 안에서 만나왔다. 인간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고 또 드러내면서 이소무라 하야토가 지닌 믿음은 무엇이었나?
작품이 누군가에게 닿으리라는 믿음을 붙잡고 연기했다. 그것이 없다면… (한동안 침묵) 가령 관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영화를 만들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니까. 영화를 통해 어떤 혁명을 이뤄내겠다고 생각하는 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스크린 위 에 어떤 이야기를 재현하고 그 메시지를 전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자그마한 변화가 생길 거라 생각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결국 나는 영화의 힘을 믿으며, 연기 안에 머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