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곳에 닿기 위해, 매 순간 진심을 담아.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김자인이 마음의 근력으로 그려가는 아름다운 과정에 대하여.
2021년부터 올림픽에서 경기가 진행되는 스포츠클라이밍의 세 종목 중 하나인 ‘리드’는 약 15m의 인공 암벽을 오른 높이에 따라 순위를 정한다. 6분의 시간 안에, 단 한 번의 도전이 펼쳐진다.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 김자인은 이 종목에서만 무려 30개의 월드컵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출산 후에도 다시 암벽에 오르고, 20년째 현역으로 활약하며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되어온 사람. 그는 올해 만 35세 나이에 ‘올림픽 첫 출전’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품었지만, 13위까지 본선 티켓이 주어지는 올림픽예선시리즈(OQS)에서 14위를 기록하며 파리 올림픽 여정을 마무리했다. 지금 김자인 선수는 결과의 아쉬움보다 과정의 아름다움을, 앞으로 오를 암벽들이 선사할 기쁨을 생각한다. 그 마음에 스포츠클라이밍을 향한 사랑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스튜디오를 벗어나 김자인 선수의 암장에서 인터뷰를 하니 새롭습니다.(웃음) 평일 낮인데 사람이 많네요. 10년 전 “클라이밍 붐이 일 거라 생각한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실현된 것 같아요.
맞아요. 혹시 시간이 괜찮으면 인터뷰 끝나고 체험 한번 해보세요.(웃음) 저도 운동하다 가려고요. 지난 7월에 프랑스 샤모니와 브리앙송에서 각각 열린 월드컵에 참가한 뒤 일주일 정도 훈련을 쉬었는데, 다시 조금씩 시작했어요.
이번 월드컵은 어떤 마음으로 참가했나요?
샤모니 월드컵이 제게는 의미 있는 대회예요. 2004년에 만 15세 나이로 월드컵 데뷔 무대를 치른 곳이거든요. 그래서 샤모니 월드컵은 기회가 되면 매번 출전했고, 올해도 파리 올림픽과 관계없이 꼭 나가고 싶었어요. 때마침 브리앙송 월드컵이 이틀 후에 개최돼 두 대회 다 출전했죠.
의미 있는 대회인 만큼 감회도 새로웠겠어요.
제가 제일 사랑하는 남편과 딸 규아가 저를 응원하러 샤모니에 와줘서 더더욱 뜻깊었어요. 규아가 해외에서 열린 대회를 가까이에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이제 네 살이라 현장 분위기가 어떤지 알거든요. 예선에서 제가 두 코스 다 완등해 1위로 결선에 올라갔는데, 수많은 관중이 엄마에게 응원과 환호를 보내는 걸 되게 좋아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기뻤죠.
가족이 김자인 선수의 동력인 듯해요. 규아에게 출산과 육아 때문에 은퇴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다시 암벽을 오르기 시작했다고 밝히기도 했죠. 혹시 규아도 클라이밍에 관심이 있나요?(웃음)
가끔 암장에 데려오면 홀드에 한두 번 매달렸다가 내려오긴 해요. 클라이밍보다 저랑 숨바꼭질하는 걸 더 즐거워하더라고요.(웃음) 겁이 많은 아이인데, 저도 어릴 때 그런 편이었거든요. 제 욕심으로는 나중에 규아가 클라이밍을 취미로 삼아서 같이 등반한다면 좋을 것 같아요. ‘내 아이가 클라이밍 대회에 나가서 잘해내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어요. 만약 규아가 클라이밍 선수가 되고 싶어 하면 그러라고 할 것 같아요. 하지만 규아가 선택할 일이니 어떻게 될진 모르죠.
자녀에게도 클라이밍을 권할 수 있는 건 선수로서 고난보다 큰 기쁨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렇죠. 여전히 제 인생에서 클라이밍이 제일 재미있어요.(웃음)
그 재미를 만끽하며 클라이밍 선수로서 커리어를 쌓아왔어요. 그러다 최근 파리 올림픽이라는 큰 도전을 했고요.
제게는 올림픽이 꿈같은 대회였어요. 원래 몇 등을 하겠다 하는 식으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는 편인데, 처음으로 확고하게 생긴 목표가 파리 올림픽 참가였어요. 그 무대에 선수로 서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했어요. 그만큼 파리행 티켓을 따는 데 집중했죠. 마치 이번 올림픽이 제 커리어의 전부인 것처럼요.
마음을 다해 준비했지만, 간발의 차이로 파리행 티켓을 따지 못했어요. 아쉬움이 남는 경기일 것 같아요.
경기를 마치고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당혹스러움이었어요. 이후에도 눈물은 나지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슬픔을 꽉꽉 억누른 건 아니에요. 아마 슬퍼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어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이렇게까지 애썼는데, 제가 슬퍼한다면 그간 기울인 노력에 미안해질 것 같더라고요. 지금도… 당연히 속상하죠. 파리에 간 선수들을 TV로 보면서 ‘내가 저기에 있다면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나간 경기를 후회하진 않아요. 시간을 되돌려도 똑같은 방법으로 등반했을 테고, 무엇보다 올림픽을 위해 매 순간 최선을 다했으니까요. 그 과정을 함께한 뒤 올림픽으로 향한 동료 선수들에게 응원을 보내고 싶었어요. 그게 고민 끝에 올림픽 해설 제안을 받아들인 계기이기도 해요.
해설하는 김자인 선수의 목소리에서 진심 어린 응원이 느껴졌어요. 파리 올림픽엔 함께하지 못했지만, 다음 기회가 없진 않죠. 2028 LA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또 한 번 도전하겠다고 다짐한 건 아니에요. 파리 올림픽 예선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직후에 부모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하고 싶어질 때 다시 하면 되지~.”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어투로 하신 그 말씀이 ‘네가 원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어요. 원래 올해를 끝으로 은퇴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은퇴라는 말로 이다음 도전을 제한하고 싶지 않아요. 그저 클라이밍을 계속 즐기다가 대회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선은 국가대표로서 앞둔 경기에 열심히 임하려고 해요.
때로는 그 어떤 결과보다 과정이 더욱 값지게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꾸준히 암벽을 오르는 김자인 선수를 보며 다른 선수들, 더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이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간 지나온 과정 하나하나가 뿌듯하고 자랑스러워요. 올림픽 여정을 마친 후 인스타그램에 제 심경을 담은 글을 올렸는데, 댓글이 아주 많이 달렸어요. 하나하나 읽다 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줬구나’ 싶어 참 감사하더라고요. 제 도전이 헛되지 않았고, 제가 잘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덕분에 큰 힘을 얻었죠.
이제 운동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어요. 그렇기에 클라이밍을 할 때 어려움을 느끼기도 할 것 같은데 어떤가요?
물론 체력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죠. 하지만 종목 전반의 변화가 더 어렵게 느껴져요. 스포츠클라이밍 선수들이 은퇴하는 건 보통 등반 능력 자체가 부족하기보다 변화를 따라가는 게 어렵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클라이밍 코스에도 트렌드가 있거든요. 제가 클라이밍을 시작했을 땐 지구력이 필요한 정적인 코스가 대부분이었는데, 최근에는 한층 역동적으로 바뀌었어요. 더 크게 움직이고, 점프도 많이 하면서 최대 근력을 써야 하죠. 익숙하게 해온 스타일과 다르고, 작은 키를 비롯한 신체 조건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코스도 아니어서 적응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선호하지 않는 코스를 마주하면 어떤 생각을 해요?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난 브리앙송 월드컵 결승이 떠올라요. 리드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코스였어요. 홀드를 잡은 채 몸을 그네처럼 크게 굴러 돌출부에 발을 디디자마자 점프해야 하는 구간이 있더라고요. 제가 제일 취약한 동작이죠. 코스를 확인한 뒤 격리 구역에서 대기하는데, 거기서 떨어지는 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거예요. 경기를 앞두고 있을 때도, 실제로 등반할 때도 안 되겠다 싶었어요. 울고 싶은 마음으로 그 구간에서 1분 가까이 멈춰 있다가 시도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몸을 던졌는데, 된 거예요. 비록 입상은 못 하고 5위를 기록했지만, 그 동작을 해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고 용기가 생겼어요.
안 될 것 같아도 일단 시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군요.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 문득 생각나요. “내가 타고난 건 운동신경이 아니라 힘들어도 계속 참고 하는 능력 같다.”
지금 생각해도 맞는 말 같아요. 운동신경이 태생적으로 좋은 편은 아니거든요. 특히 순발력은 아무리 훈련해도 빠르게 향상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최근에 이런 말을 들었거든요. 무언가를 악착같이 할 수 있는 것도 일종의 운동신경이래요. 그렇게 생각하면 제게도 운동신경이 없는 건 아니구나 싶어요.
내면의 근력을 갖춘 셈이네요. 클라이밍 여제, 베테랑이라는 수식이 붙은 것도 그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20년간 운동선수의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클라이밍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어떤 운동을 하든 마찬가지라고 봐요. 기량이 뛰어난데도 어느 순간 마음이 지쳐서 경기장을 영영 떠나는 선수들을 많이 봤거든요. 내가 하는 종목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것, 그게 운동선수에게 제일 중요한 능력이 아닐까 싶어요.
김자인 선수가 클라이밍을 이토록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지네요.
홀드에 매달려 있을 때, 등반에 완전히 몰입된 순간을 좋아해요. 힘든데도 왠지 편안한 느낌이랄까요.(웃음) 코스가 야속한 적은 많아도 클라이밍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어요. 암벽을 오르는 제가 가장 저답다는 생각도 들어요.
클라이밍과 김자인 선수는 어떤 점에서 닮았나요?
클라이밍을 하다 보면 성공보다 실패를 훨씬 많이 겪어요. 물론 단번에 성공할 수도 있지만, 어려운 코스라면 완등을 위해 수십 번 실패를 겪어야 하죠. 돌이켜보면 제 선수 생활도 비슷한 듯해요. 제가 해온 성공의 경험들을 보면서 이룬 게 많다고 느끼는 분들이 있을 텐데, 사실 그 이면에 무수한 실패가 존재해요. 그럼에도, 어쨌든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 자체의 매력이 크더라고요. 거듭 실패하는 과정을 통해 더 강해지는 것 같고, 그게 결국 클라이밍이 제게 남겨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제 삶의 모든 과정에 충실하며 나아가려고 해요. 매 순간 진심을 담는 선수이자 사람이고 싶어요.
언젠가 마지막 등반을 마친 본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면요?
음… 그게 마지막이라는 걸 모를 것 같아요. 죽을 때까지 클라이밍을 하고 싶거든요. 팔다리만 멀쩡하다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