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승리는 ‘너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기는 것’이다.
김우진, 이우석, 임시현 선수는 두려움과 고독, 자기 의심에 맞서 활을 겨눴다.
그 영광의 포트레이트.
나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얻어내는 자신감.
내가 온전히 다 쏟아부었을 때, 거기에 걸맞은 결과를 쟁취했을 때
오는 자신감. 이뤄냈다는 성취의 감각이
결국 나를 발전시키는 것 같다.
올림픽 금메달 석권을 축하한다. 오늘 세 선수가 모여 총 8개의 메달을 꺼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웅장해지더라.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비롯해 TV 예능 프로 출연도 예정돼 있다. 요즘의 기분 좋은 소란스러움, 새로운 경험을 충분히 즐기고 있나?
김우진 국민들의 응원과 성원 덕분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궁금해하시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도 해드리는 게 성원에 화답하는 길이라 생각한다.
오늘 촬영은 어땠나?
임시현 여럿이 함께하니 더 재미있었다.
이우석 놀릴 사람이 있어서.(일동 웃음)
촬영 틈틈이 임시현 선수를 놀리더라. 선수촌에서도 이런 분위기였던 건가?
김우진 맞다. 다 같이 즐겁게 농담하고, 장난도 친다.
이우석 긴장되고 압박도 크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동요해 경직될 필요가 있을까 싶어 오히려 편하게 생각하고 즐기려 했다.
올림픽 준비 시간은 최소 4년, 과정 면에서 보면 각자 평생에 걸쳐 준비한 셈이다. 성취와 성과를 떠나 소중히 간직하는 한 장면을 먼저 떠올리자면 언제인가?
김우진 개인전도 좋은 기억이지만, 단체전이 떠오른다. 우리가 늘 “단체만큼은 진짜 잘해보자, 다들 목에 뭐 하나라도 걸고 돌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하자”고 내내 이야기했었다. 정말 잘하고 싶었으니까. 당시 영상을 봐도 우리가 힘이 넘치더라.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이우석 올림픽을 준비하며 함께 이야기한 게 ‘원 팀, 원 드림’이다. 말 그대로 원 팀으로 함께했다. 준비 과정은 힘들었지만, 막상 올림픽 무대에 올라 시합할 때는 즐거웠다.
즐거웠다는 표현이 어딘가 낯설게 들린다.
김우진 (확신에 찬 목소리로) 즐거웠다. 특히 우진이는 실제로 즐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우석 말 그대로 웃으면서 했다.
이우석 선수는 올림픽 무대에 서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지 않았나. 도쿄 올림픽 당시 대표로 선출됐지만, 팬데믹으로 올림픽이 1년 미뤄졌고, 이후 다시 치러진 재선발전에서 탈락하며 함께하지 못했다. 칼을 갈고 이번 파리 올림픽에 임하지 않았을까 했는데, 그 순간을 즐겼다는 말이 산뜻하게 들린다.
이우석 지금까지 연습한 걸 믿었다. 오랜 시간 열심히 준비한 노력 역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막상 경기에 들어서면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경기는 이미 시작됐으니까. 차라리 이 상황을 즐기자는 생각이 들더라.
불현듯 두려움을 초월한 것일까?
이우석 통달한다고 해야 하나. 막상 활을 쏘는 순간에는 불안하거나 두려운 감정이 전혀 없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김에 잘되든 잘 안 되든 난 이 경기에서 하나는 더 배워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시합에 임했다.
처음부터 이런 마음이 들진 않았을 것 같다. 개인의 역사 안에서 양궁 선수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 자평할 수 있는 때가 있는가? 언제로 기억하는가?
이우석 지난해 항저우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한 단계 성장했다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그 한 해만큼은 모든 양궁 선수를 통틀어 가장 열심히, 간절하게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결과도 그만큼 잘 나와줬고. 이렇게 노력하고 준비하면 결과가 따른다는 걸 경험했고, 그 과정에서 나를 믿을 수 있게 됐다. 돌아보면 그때의 믿음이 지금까지 오게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임시현 작년 상하이 월드컵을 꼽고 싶다. 처음 국가대표 1진 선수로 선발됐는데, 첫 국제 대회가 상하이 월드컵이었다. 당시 아무리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했다 해도 국제 대회를 잘 치러내지 못하면 과연 잘하는 선수인가 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있었는데, 첫 국제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난 뒤 나도 실전에서 할 수 있구나, 나도 좀 멋진 선수인가?(웃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결국 승리의 경험이 도약을 만드는 것인가?
김우진 나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얻어내는 자신감이다. 내가 온전히 다 쏟아부었을 때, 거기에 걸맞은 결과를 쟁취했을 때 오는 자신감. 이뤄냈다는 성취의 감각이 결국 나를 발전시키는 것 같다.
김우진 선수는 도약의 순간으로 언제를 꼽고 싶나?
김우진 지금 이 순간인 것 같다.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겪어왔지만, 고마운 분들 덕분에 이 자리에 섰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이번 올림픽으로 꿈꿔온 것들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목표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안다.
양궁 선수 중에는 ‘클리커 증후군’(활을 쏘기 직전 클리커가 철컥하는 소리를 내면 패닉에 빠지면서 줄을 놓지 못하는 심리적 현상)을 앓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김우진 클리커는 화살을 일정한 길이까지 당겨 곧은 자세로 활을 쏘게 하는 장비다. 그런데 이 장비가 조금 민감하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면 화살을 당기고도 클리커를 빼지 못해 활시위를 놓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저마다 어려운 시기가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나?
김우진 2012 런던 올림픽에서 4위로 떨어진 뒤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전국 대회에서 50등을 했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운동을 그만둬야 하나 싶을 때 홍승진 감독님이 격려하고, 오래 기다려주셨다. 동료인 배재현 선수도 옆에서 큰 도움을 줬다. 연습하러 가기가 끔찍하게 싫었는데 끌고 나가줬다. 나중에 그때 왜 나를 그렇게까지 도와줬냐고 물어보니 선배 눈에는 내가 너무 아까웠다고 하더라.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선수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게 무척 안타까웠다고, 그래서 그냥 도와주고 싶었다고 하더라. 그들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임시현 도쿄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때다. 3차 선발전에서 탈락했는데, 그때 처음으로 간절하게 뭔가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아주 열심히 했다. 그런데 떨어지니까 운동 자체가 하기 싫어지더라. 6개월 가까이 헤매다가 주변의 도움을 받고 정신을 차렸다.(웃음)
이우석 아무래도 도쿄 올림픽 재선발전에서 떨어졌을 때다. 한창 자신감이 올라 있던 시기였고, 사실 좀 안일했다. 당연히 선발될 거라 생각했기에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컸다. 계속 나락으로 내려가던 때에 문득 자다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했었나? 자만하지는 않았나?’
세 선수의 경기 성향을 보면, 옆 사로를 의식하지 않고 마치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한 박자 빠르게 활시위를 놓는다. 결국 이는 자신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다져야 하는 순간에 어떤 생각이나 말을 되뇌나?
이우석 반드시 10점을 쏴야 하는 순간에는 ‘이기려고 쏘지 말고, 후회 없이 쏘자’라는 말을 상기한다. 오직 이기려는 마음으로 쏴 설사 이기더라도 그 순간에는 좋지만 그 마음이 습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선수가 매번 이길 수는 없지 않나. 이기려는 욕심만 가졌을 때 지면 마음이 무너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승패와 상관없이 후회 없이 쏘자고 다짐한다. 그럼 결국 후회 없이 쏘게 되고, 결과와 상관없이 후련하다. 그런 마음으로 화살을 날린다.
임시현 압박감이 드는 상황에서 내가 준비한 자세만 성공시키면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까지 준비한 것을 믿고 쏜다.
양궁이 멋있는 건 정신과 심리의 지분이 큰 스포츠라는 점이다. 선수들의 시행착오와 마음가짐을 들으니 더욱 그렇게 다가온다.
김우진 많은 양궁 선수가 그럴 거다. 두 선수가 앞서 이야기한 대로 ‘후회 없이 쏜다’, ‘내가 준비한 것만 하면 이긴다’라는 생각을 갖는다. 이게 공통의 언어 같다. 과녁 앞에 섰을 때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고 승패를 떠나 내가 오늘 뭐 하나는 얻어간다, 이건 정말 잘했다 하는 순간을 만들겠다 하고 마음을 다잡으면 긴장을 뚫고 활을 쏠 수 있게 된다.
정신적 영역의 훈련도 있나?
김우진 올해는 김주환 교수님의 뇌과학 프로그램을 받으면서 도움을 받았다. 스포츠 과학 심리 분야의 전담 심리상담사인 김현숙 박사님도 계시다. 스포츠 상황에 특화해 긴장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경기를 해나갈 수 있을지에 대해 상담하고, 멘털 트레이닝을 한다. 또 한국 양궁이 세계 최고다 보니 어느 대회를 나가도 공격이 들어오고, 우리는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런 압박의 상황을 자주 겪다 보니 자연스럽게 멘털이 더 단련된다.
1점 차이로 희비가 엇갈리고, 1mm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양궁 종목 특성상 극적인 승리의 희열과 패배의 좌절을 번갈아 느끼기도 할 것 같다. 이 극단의 감정을 잘 다뤄내야 하는 것도 선수의 몫이자 역량이다.
임시현 겉으로 볼 때는 조용조용 활을 쏘는 것 같지만 사실 속에서는 화가 아주 많이 난다.(웃음) 그런데 화가 날 때마다 화내서 뭐하냐, 화내면 내 기분이 나빠지고, 다음 경기를 이어가는 것도 힘들어지니까 방법을 찾자는 생각을 한다. 그때에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거다.
이우석 그냥 속으로 삼킨다. 속앓이를 많이 하는 편이다. 속에 많이 쌓아두고 한 번에 해소하는 편이었는데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더라. 최근 들어 고치긴 했다.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인정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화가 많이 난다니. 겉으로 보이는 세 선수는 인간계를 넘어선 사람들 같은데.(웃음)
김우진 평상시에는 성격이 좀 급한 편이다. 많은 분이 보시기에 활을 잡고 있을 때 차분해 보이고, 감정 기복도 없을 것 같지만 지킬 앤 하이드다.(웃음) 옆에 있는 선수들이 더 잘 안다. 활 안 잡고 이야기할 때 가끔 동료들이 “왜 갑자기 화내요, 혀엉!” 할 때가 있다.(웃음)
이우석 내가 주로 그런다.(웃음) 장난치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진이 형은 가끔씩 얼굴이 빨개진다. 그래서 “농담인데 왜 진지하게 화를 내요, 혀엉!” 하게 되는 거다.
임시현 선수는 어떤 편인가?
임시현 평소에는 화를 잘 안 낸다. 운동할 때만 유독 화가 많아진다.
한 치의 아쉬움이 오랜 시간 마음을 붙잡을 때는 없나?
김우진 이번 개인전에서는 4.9㎜의 차이로 이겼지만, 또 언젠가는 그 반대의 순간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 간발의 차이로 졌을 때 일말의 후회도 남지 않는다거나 화가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일 거다. 정말 아까운 패배이지 않나. 그 순간만큼은 부정적인 감정이 올라오지만 지나고 보면 스포츠라는 건 각본 없는 드라마니까. 김우진이, 이우석이 무조건 이길 거라고 정해진 게 아니며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까. 최약자가 최강자를 넘어서는 순간도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포츠 경기를 보며 열광하는 것 아닌가. 이 또한 그런 과정이지 않을까.
한국 양궁은 유망주도, 천재도 많아 어느 종목보다 경쟁이 치열하다 들었다. 그럼에도 깨끗한 룰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 후에는 상대의 승리를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인상을 준다. 남자 양궁 개인전 후 김우진 선수를 향해 “서로 고생한 걸 아니까 더 축하해줄 수 있다”라고 한 이우석 선수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건강한 스포츠맨십이 개인의 내적 성장에도 영향을 줄 것 같다.
김우진 오래 한 사람이 먼저 이야기하겠다.(일동 웃음) 오랜 시간 양궁이라는 종목을 하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운다. 결과에 승복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됐다. 앞서 언급했듯 유망주는 계속해서 올라온다. 밀리지 않게 정진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하는 스포츠다.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젖어 있지 마라, 어차피 해 뜨면 마른다.” 이 말의 뜻은 지금의 자리가 영원한 자리가 아니며, 새로운 유망주가 혜성처럼 떠올라 너를 말릴 거라는 의미 아닌가. 양궁을 하면서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걸 배운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스포츠다.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이우석 국가대표를 가장 오래 한 선수. 이는 그렇게 되기까지 꾸준히 노력하고, 잘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임시현 경기 운영을 잘하는 선수, 위기에 잘 대처하는 선수로 기억됐으면 좋겠다. 이게 내 목표이기도 하고.
김우진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는 게 내 오랜 꿈이다. 왜 우리가 축구 하면 손흥민 선수, 그 이전에는 박지성 선수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있지 않나. 그 발자취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정진하려 한다.
마무리할까. 지금이 선수로서 전성기라고 생각하는가? 임시현 선수는 이 질문에 대해 사전 영상 인터뷰에서 ‘전성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전성기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노력할 거다’라고 답했다.
이우석 경기력만으로 봤을 때는 전성기라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나 스스로는 전성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합하는 과정에서 받아온 느낌이 있다. 또 다른 전성기가 오지 않을까?
김우진 스스로 전성기를 판단할 수 있는 때는 은퇴 후일 것 같다. 운동선수로서 활동하는 한 어느 때가 전성기라 말할 수 없다. 우석이 말했듯 우리는 언제든 발전할 수 있으니까. 지금보다 더 훌륭한 기량을 펼칠 수도 있는 거다.
임시현 음…, 내 대답은 편집해야 할 것 같다.(일동 폭소)
노력해서 전성기를 이어가겠다는 임시현 선수의 말, 너무 멋있지 않나?
김우진 임시현 선수는 지금 전성기 맞다. 항저우 아시안게임 3관왕, 파리 올림픽 3관왕 했으면 금메달이 도합 6개다.(웃음)
이우석 틀린 말은 아니야.(웃음)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어.
김우진 자신감 있는 태도인 거다. 그 태도가 맞는 것 같다. 나는 좀 보수적인 태도인 거고.(웃음)
임시현 겸손하지 못한 발언을 한 것 같다.
김우진 근데 그런 자신감 있는 모습을 독자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임시현 그런가?(웃음)
이우석 그럼 그럼, 넌 최강이야.(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