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으로 최대치에 가까워지려는 이의 우아한 초상.
영화 <박하사탕>은 언제나 현재 시제다. 그 세계에서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김영호’는 매 순간 살아 있다. 자기혐오와 수치, 생을 향한 분노와 후회로 일찍이 죽은 이가 그 누구보다 형형하게 죽은 채, 거기 살아 있다. 한 인간이 유약해지다 지독해지고, 다시 유약해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을 1백30분간 멈추지 않고 계속 보기란 쉽지 않다. 익히 봤고,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다. 견디고 견디다 일시 정지를 누르고 숨을 고른다. 이야기 밖으로 수차례 빠져나와야 간신히 엔딩 크레디트를 만날 수 있다. 배우 설경구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박하사탕>을 다시 마주했다. 오프닝 음악이 멈춘 지 얼마나 되었을까. 강변 자갈 위에 누워 있는 김영호의 충혈된 눈, 눈물이 가득 고인 축축한 옆얼굴을 바라보다 일시 정지 버튼을 눌렀다. 영화가 시작된 지 2분 9초 만이었다.
데뷔작으로 한 배우의 생을 기억하는 것은 배우에게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뛰어넘어야 할 자기 한계, 벗어던지고 싶은 족쇄 같은 시작이 그에게는 훼손하고 싶지 않은 영광으로 새겨져 있다. 2000년부터 현재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10년, 20년이 지나도 나의 대표작은 <박하사탕>일 것이다”라고 일관되게 말한다. 찬란한 영광에 젖지도 짓눌리지도 않은 채 같은 연배의 ‘연기의 신’들과는 분명히 다른 행보를 취하며 여러 갈래로 드넓게 뻗어왔다. 그래서 신비롭다. 지금 당장 “배우 설경구의 전성기는 언제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떤 이는 한국 영화계를 뒤흔든 강렬한 첫 등장 <박하사탕>을, 한국 최초로 천만 관객을 달성한 <실미도>를, 혹은 속편까지 만들어지며 범대중적 사랑을 받은 <공공의 적>을 꼽을 수도 있겠다. 마니아들의 격렬한 지지를 얻으며 ‘지천명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한 배우의 깊고 단단한 품위와 우아함이 깃들여 있던 <자산어보>를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방대한 필모그래피를 앞에 두고 설경구 배우와 마주 앉았다. 인터뷰 중 그가 가장 자주 한 말은 ‘특별히 그렇지 않다’다. 배우로서의 철학, 역량, 특수성에 대한 질문 앞에서는 여지없이 ‘딱히 그렇지 않다’, ‘다를 것이 없다’로 일축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별다를 것 없는’ 배우가 30여 년의 시간을 묵묵히 통과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했다는 것인데. 이 평범의 위대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마음이 황무지 같은 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찬란한 날에도 숨을 고르고 촬영장으로 향하는 바위 같은 마음을,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여지없이 쏟아지는 후회 속 자신을 추스르는 꿋꿋한 순간들을, 그렇게 최선으로 최대치에 가까워지려는 사람의 일상을 말이다.
좀처럼 화보 촬영을 안 하시죠. 어려워하신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잘하면 할 텐데요. 진땀이 나서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허진호 감독님과 함께한 영화 <보통의 가족>을 선보입니다. 매 작품, 극장에서 관객을 만나기 직전의 마음은 어떤가요?
매번 어렵죠. 갈수록 더 어려운 것 같고요. 개봉 전까지 많은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지만 일반 관객은 어떻게 볼지 두려워요. 영화를 보는 눈이 점점 바뀌는 것 같아요. 해외 영화제에서 평은 좋은데 국내 관객들도 좋아할까 하는 걱정은 좀 있어요.
<보통의 가족>은 토론토 국제영화제를 비롯한 다수의 국제영화제로부터 초청되며 이미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죠. 그럼에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나봅니다.
지난해에 토론토 국제영화제에서 상영을 했었어요. 다음 날 리뷰들을 모아 제작사 대표님이 문자메시지를 보내줬어요. ‘우리 영화가 이렇게 평이 좋다고?’ 하고 놀랐어요. 상영 후 GV 할 때도 좋은 반응이 느껴지더라고요. GV 마치고 관객들이 무대 쪽으로 나와 손도 잡아주시고.
찾아보니 설경구 배우의 첫 영화제가 부산국제영화제였더라고요. 1999년작 <박하사탕>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습니다. 데뷔작이죠.
맞아요. 4회 때였어요. 남포동 시절. 그때가 재미있었어요.
부산을 처음 찾았던 당시를 어떻게 기억하나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상영 전 입장과 퇴장 사이에 제 인생이 바뀌었거든요. 지금도 말하면서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데, 평생 다시 하지 못할 희한한 경험을 했어요. 상영 전 이창동 감독님, 문소리, 김여진 배우와 무대에 올라 인사를 했는데 그때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어요. 그러고 나서 상영 시간 2시간 10분이 지나고 밖으로 나오는데 사람들이 저를 빙 둘러쌌어요. 빽빽하게. 일반 관객들이었죠. 당황해서 서둘러 빠져나온 다음 뒤풀이를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숙소에 갔거든요. 거기서 안성기 선배님을 만났어요. 그런데 분명 저를 처음 만난 건데도 너무나 반갑게 인사해주시는 거예요. 영화를 보신 거죠. 그러면서 “앞으로 영화 계속할 거지?” 하시기에 제가 머뭇거리니까 “내가 지금 무슨 소리야, 다들 (설경구 배우를) 가만 안 둘 거야” 하시더라고요. 단 2시간 10분 만에 인생이 바뀌어 있더라고요.
외신 기자단 특별 상영 당시에는 눈물을 엄청 흘리셨다고요.
원체 내 영화를 못 보지만 지금도 <박하사탕>은 못 봐요…. 영화제 기간 내내 여기저기 끌려다니며 매일 술을 마셨어요. 늘 퇴근이 새벽 4~5시였어. 부산에서 열흘간 있으라고 했는데 8일 만에 서울로 도망쳤어요. 죽을 것 같아서. 그날도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덜 깬 채로 외신 기자단 특별 상영에 갔어요. 남포동 극장이었는데 상영 중에 살짝 안으로 들어갔다가 스크린을 보자마자 무너졌어요. 눈물이 막 쏟아지는데 못 보겠더라고요. 지금도 <박하사탕>은 저에게 그런 작품이에요. 대표작이 뭐냐고 물으면 저는 늘 <박하사탕>이라고 하거든요. 앞으로 10년, 20년이 지나도 <박하사탕>일 거예요.
배우가 자신의 데뷔작을 마음속 평생의 대표작으로 삼는 건 드문 일이죠.
그때의 시간과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요. 안 건드리고 싶어.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박하사탕>은 원래 (한)석규 형이 주인공이었고, 저는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었어요. 그러다 석규 형이 못 하게 되면서 공석이 됐고, 공개 오디션이 열렸지만 이미 어렵다고 통보받았기 때문에 저는 오디션도 못 봤어요. 어떻게 보면 추가 합격도 아니고 낙하산이죠. 돌고 돌아 내 작품이 된 건데 운이 아주 좋았어요. 할 때는 죽을 맛이었어요. 매일매일 괴로웠죠. 감독님 뒤로만 다녔어요. 인사도 못 하겠더라고. 어느 날은 감독님께 내 연기 점수가 몇 점이냐고 물으니 한참 생각하시다가 “70점?” 하시더라고요. 그것도 큰 인심 쓰듯이. 영화를 찍는 내내 제대로 된 오케이를 한 번도 못 받아봤어요. 신마다 “된 거 같다. 쓰읍, 다음 뭐 찍니?” 하시니까. 촬영을 한 60% 정도 했나? 고문 장면을 찍을 때였는 데 그날은 감독님께 제가 사과도 했어요. 감독님이 원하는 만큼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힘들다고요. 죄송하다고요. 그때 감독님이 “니 뭔 소리 하노? 여기 배우, 스태프 1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는데 딱 한 사람만이 나를 도와주고 있다. 그게 누군지 아나? 너다 너!”
세상에, 엄청난 밀당을.
어휴, 정말 사람을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마리끌레르>는 매년 4월 마리끌레르영화제를 열고 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올해는 젊은 배우들이 각자 자신이 사랑하는 한국 영화를 꼽아 관객과 함께 관람하고 GV를 했어요. 김민하 배우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꼽았습니다. 다시 보니 요즘은 쉽게 볼 수 없는 아기자기한 면모가 있는 영화더라고 요. 새삼 좋은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맞아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을 같이 찍은 변성현 감독과 작업을 많이 하는데요. 감독님이 늘 하는 말이 2000년대 초반이 한국 영화의 황금기였다고, 자기는 그때의 감독과 배우들이 가장 부럽대요. 다양성이 존재하던 때죠. 호흡이 긴 영화도 어느 정도 사랑받았고요. 요즘은 호흡 길었다가는 다 작살나니까.(웃음)
당시 도시 풍경, 영화의 톤과 호흡이 오히려 젊은 관객에게 새롭게 다가가는 것 같더라고요.
과천에서 찍었거든요. 박흥식 감독님이 비를 좋아해서 비 오는 장면을 반드시 비 오는 날에 찍었어요. 본인은 살수차가 너무 싫다고, 살수차를 쓰면 폭우가 내려서 안 된대요. 그래서 비 오는 날 촬영을 잡고, 비 예보가 있으면 일단 촬영장에서 대기했어요.
낭만이 있었네요.
이런 현장 분위기는 배우가 느끼고, 연기하는 데도 도움이 돼요. 요새는 햇빛이 쨍쨍해도 그냥 살수차 뿌리니까. 아, 전도연 배우랑 비 피하면 서 나뭇잎 뜯는 장면은 살수차를 동원했어요. “여우가 시집가는 날이구나” 하는 장면. 그때만 (살수차로) 비를 뿌렸어요. 날씨와 대사가 맞아야 하니까.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시네요.
급하게 찍지 않아서 그런 것 같아요. 함께 다져가면서 찍는 느낌? 그래서 <박하사탕>도 다 기억나요. 이창동 감독님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니까. 오죽하면 나중에 제가 “그만하세요. 헷갈려요!” 할 정도로 한 신 한 신을 다져가며 정성 들여 찍었어요. 엊그제인가, 전도연 씨가 갑자기 아침에 문자메시지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당시 홍보 사진을 보냈어요.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자 일동 탄성) 당시 촬영 전 미팅 때 본인이 나한테 “오빠라고 부를게요. 아저씨 같지만”이라고 말했었대요. “기억 나 오빠? 나 도대체 어떤 애야?” 하더라고요. 이제 와서.(웃음) 누구긴 누구야. 전도연이지.(일동 웃음)
배우라는 일은 추억이 많아서 참 좋은 직업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희한하게 그즈음 영화들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추억도 많고요. 잘됐든 못됐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역할도 있나요?
그 무렵 인물이라면 다 가보고 싶어요. 감독님들도 저마다 색깔이 뚜렷했고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를 때라, 모르는 게 무기였던 시간 같아요.
그 말은 곧 그 시절의 나, 그 시절의 현장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맞아요. 무엇이든 잘 느끼던 때였던 것 같아요. 배역을 잘 느끼고 내 것으로 잘 소화하던 때였던 것 같고요.
배우로 계속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예감은 언제 들었어요? 원래 연출을 염두에 두고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셨죠?
맞아요. 연출을 생각하고 대학에 갔다가 선배들한테 끌려서 연기를 했는데 첫 무대에서는 경련이 일었어요. 무서워서. 그렇게 첫 공연을 끝냈는데 눈물이 터지더라고요. 너무 허해서요. 애써 만든 무대가 사라지고, 소품들도 창고로 막 내던져지는데… 그 맛이었나… 당시 연출을 했던 누나가 배우 모두에게 편지를 써줬거든요. 저한테는 “영화 연출하려고 하는 거 아는데 배우도 한번 고민해봐. 배우 해도 되게 좋을 거야”라고 썼더라고요. 그러다 2학년이 돼 전공을 정하면서 연기를 좀 알고 연출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연극 파트로 갔죠. 그렇게 연기를 하면서 (진로가) 바뀌었어요.
끼와 재능이 넘치는 세계에서 유난히 내성적인 성격으로 버티기 어렵진 않으셨나 봅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도 불가사의라 할 정도로 내성적이었어요. 옛날에는 국어 시간에 한 사람씩 일어나서 소리내 책을 읽혔거든요. 제가 25번이었는데 5일만 되면 아침부터 가슴이 심하게 뛰어요. 보통 5일이면 5번, 15번, 25번을 일으켜 세우니까. 한글을 읽을 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떨리고 힘이 들던지. 남들 앞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근데 왜 배우가 됐나…. 근데 배우라는 일이 외향적인 성격이나 끼가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아요. 주변에 내성적인 배우가 꽤 많아요. (장)동건이도 말이 거의 없어요. 몇 년 전만 해도 배우들끼리 송년회 하면 (박)중훈이 형 정도 있어야….(웃음) 아니면 침묵의 자리에요. 다들 말이 없어요.
그런 성정 때문인지 묵묵히 철저하게 준비하는 배우라는 인상을 줍니다. 지난 인터뷰들을 보니 작품과 관련해 체중 증량이나 감량 등 육체적 고충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만, 창작 과정의 어려움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더라고요.
그게… 외국 배우나 다른 배우들의 멋진 인터뷰를 보면… 저로서는 좀 거창해요. 우리가 그렇게 거창한가? 물론 멋진 인터뷰가 읽기도 좋고, 실제 그분들은 그렇게 인물과 교감하며 창조 과정을 거치겠지만 저는 그런 말을 못 하겠어요. 부끄러워요. ‘내 입으로, 감히’ 이런 생각이 드는 거죠. 내가 그 정도인가? 역할에 맞게 몸을 만드는 것 뿐이지. 실제로 그렇게 거창하게 준비하는 것도 없고요.
과정에서 느끼는 고민이나 어려움은 동료나 친밀한 이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으시고요?
그건 내 문제지 누가 해결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요. 직접 해봐야 아는 걸 누군가의 조언을 듣는다? 그런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어떤 면에서는 외로운 예술이기도 합니다.
근데 저 혼자 있는 거 좋아해요. 촬영 끝나고 숙소 들어가면 그 뒤로 매니저 거의 안 불러요. 다음 날 며칠 쉬더라도 숙소에만 있어요. 밖을 안 나가요. 이번에도 촬영으로 해운대 갔는데 바닷가 본 적도 없어요. 숙소에만. 재미 드럽게 없죠. 낭만도 없고.
수양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연기를 위해 고립시키는 뭐 그런 거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안 하고 유튜브 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는 거를 좋아해요. 다큐멘터리처럼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유튜브 보면 재미있어요. 사는 것이 비슷한 것 같고요. 배우라는 일이 그렇게 거창한 일은 아닌 것 같아.
다름이라 하면, 배우의 성취감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만 관객이 든다고 해서, 혹은 수상을 많이 한다고 해서 채워지는 건 아닌 것 같고요. 배우로서 나의 몫을 다했다고 느끼는 때도 있나요?
없는 것 같아요. 만족이 쉽게 오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늘 이것밖에 안 되나 싶죠. 촬영하고 숙소나 집으로 돌아갈 때 그날 촬영을 곱씹어요. 아우, 이렇게 해봤어야 했나 하고 매일 생각하죠. 되돌아갈 수도 없는데요. 매일 후회를 반복해요.
다른 이도 아니고 설경구 배우가 촬영 때마다 숨 쉬듯 후회를 한다 하면….
완벽한 건 없으니까요. 과격하게 이야기하면, 배우는 예술가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100% 창조라는 건 없어요. 정도만 다를 뿐 모두 나의 모습이 담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완벽하게 새로운 누군가를 창조할 수 없죠. 그 한계를 알기 때문에 더 갈구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만족이 안 되고요. 저는 메소드 연기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자기를 버린다는 건데. 글쎄, 그럴 수 있을까? 나를 버리고 다른 인물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봐요. 예전에는 메소드가 있는 줄 알았어요. 요즘은 촬영장에서 농담으로 “메소드 없어. 메소드 하지 마. 어디 있어.” 해요.
역할과 나를 분리하고자 하는 것이죠?
처음에는 그러려고 한 것 같은데 지금은 그게 나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나로부터 출발하는 거니까요. 재료는 나의 것을 가져다 쓰잖아요. 내가 다른 사람 재료를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같은 역할이라도 배우가 다르면 표현도 달라지죠. 나의 것이 덧입혀지는 거죠. 그래서 비슷한 모습이 겹쳐질 때 괴롭죠. 한계인 것 같고요. 그렇다고 갑자기 다른 인생을 살 수도 없고요.
100에 도달하지 못할 걸 알면서 끝까지 가보는 거죠. 최선을 다해.
해보려고 하는 거죠. 부지런히. 안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