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배우로서 작품을 통해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도 살아갈 힘을 주는 것 같아요.”
김민하의 영화로운 삶, 일상 가까이 있는 영화.
김민하 배우에게 올해의 부산국제영화제는 조금 더 특별할 것 같아요. 처음으로 본인의 작품으로 참가한다는 점에서요. 그것도 두 작품이나. 영화 <폭로: 눈을 감은 아이>와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을 각각 ‘한국영화의 오늘: 스페셜 프리미어’와 ‘온 스크린’ 두 섹션에서 선보일 예정입니다.
그래서 무척 뜻깊고 설레요. 그 자리가 그간 ‘내 속도대로 잘 걸어오고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 같아서요. 또 지금까지는 저라는 배우를 <파친코>로 떠올려주는 분이 많았는데 새로운 작 품, 새로운 저를 보여줄 자리가 생겼다는 점에서도 즐거워요. 제가 배우로서 잘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관객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을지 기대도 되고요.
확실히 영화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에너지가 있죠. 배우로선 그것이 더 크게 다가올 테고요.
이번처럼 초청되어 가든, 아니면 혼자 놀러 가든 영화제에서 얻는 기운이 엄청나요. 대학생 때부터 부산국제영화제 하면 ‘와! 놀러 간다’ 이런 기분에 들떴어요.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성취를 축하해주는 며칠의 기간이 되게 아름답지 않나 싶어요. 그 시간을 위해 달려온 사람은 어떤 성취감을 느낄 테고, 대학생 시절의 저처럼 나의 영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원동력이 될 거예요. 영화제의 역할이 그런 것 같아요. 계속 움직이고 발화하게끔 하는 엔진 역할이요.
부산국제영화제는 언제 처음 갔어요?
스무 살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때 <존 윅>을 봤어요. 이후에도 몇 번 가긴 했는데 영화를 보진 않았어요. 그냥 놀러 간 거예요.(웃음) 가서 영화의전당도 둘러보고 괜히 부스도 돌아다니고.
올해는 무엇을 할 계획이에요? 유난히 바쁜 일정을 보내게 될 것 같은데요.
일단 제 작품을 두 편이나 상영해서 공식 행사가 많을 것 같긴 한데, 시간 날 때마다 놀 거예요. 맛있는 것 먹고, 술도 마시고.(웃음) 그렇지만 일정 중 가장 기대하는 건 GV(관객과의 대화)예요. 빨리 하고 싶어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극장 안의 공기가 어떨지 너무 궁금해요. 아으, 너무 떨려요.(웃음)
그 떨림은 어떻게 극복해요?
극복 안 해요. 그냥 떨어요. 그러고 나서 ‘아유, 별거 아니었네’ 그러고 말지. 나름대로 방법이 있다면 ‘와, 너무 떨려!’ 이렇게 2배 더 오버해요. 그럼 1분 만에 까먹어요, 하하.
미리 예상 질문을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관객들에게서 어떤 질문을 받을 것 같아요?
두 작품 모두 이전에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 담겨 있는 데다 분위기가 완전 극과 극을 달리는 터라 그 부분에 대한 질문이 나올 것 같아요. 당연히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나 작품을 보며 생긴 궁금한 점을 묻는 분도 있을 테고요. 특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은 고등학생에서 스물넷 성인으로 타임 점프를 하는데, 두 시점의 대비가 꽤 커요. 그 간극에 대해 묻는 분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독립 영화에 출연할 때부터 많이 받은 질문이 있는데, 제 안에 밝은 면이 많은지 어두운 면이 더 많은지 궁금해하더라고요.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밝은 면이 더 많아요, 어두운 면이 더 많아요? 그 질문은 먼저 하고 싶네요.(웃음)
반반인 것 같아요. 정확하게 반반이라 어느 쪽이 더 많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로요. 다만 개인적으로는 어두운 면이 조금 더 편한 것 같아요. 본능적인 밝음도 물론 있지만, 사실 일을 하면서 조금 더 밝게 보이려는 모습이 있거든요. 그래서 혼자 있을 땐 (내면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것 같아요. 둘 다 지니고 있는데 어떤 걸 수면 위로 자주 꺼내느냐, 깊은 곳에 침잠하도록 두느냐의 차이이지 않나 싶어요.
두 작품을 하면서 새로 발견한 면모도 있나요?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하며 발견하는 편이에요. <폭로: 눈을 감은 아이>는 평생 감추고 싶던 비밀을 어떤 사건을 통해 꺼내게 되는 이야기인데, 이 과정에서 본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오로지 하나만 보고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인물 ‘인선’을 연기했어요. 그런 인선의 태도에 남들이 보기에는 답답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데, 돌이켜보니 그런 면이 저한테도 있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왜 이렇게까지 융통성이 없어?”, “왜 이렇게 돌아가?” 이런 말을 종종 들어요. 그런데 저는 지키려는 게 있으면 이걸 어떤 우회적인 방법으로 어긋나게 하고 싶지 않은 거죠. 그래서 누구보다 내가 인선이라는 인물을 잘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반면에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을 하면서는요. 아하핳.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데요. 좀 전에 얘기한 것처럼 제가 연기한 ‘희완’의 고등학생 시절과 스물네 살 때 모습이 무척 달라요. 고등학생 때는 완전 우당탕퉁탕 왈가닥이거든요. 그 연기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집에 와서 그대로 뻗었어요. 밝음을 연기하는 나에게 스스로 기가 빨려서요.(웃음) 그러면서 ‘나는 뼛속까지 내향인이구나’ 하고 역설적으로 깨달았어요. 그 부분이 어떻게 완성됐을지 제일 궁금해요.
더 물어보고 싶지만, 나머지는 GV 현장에서 듣겠습니다.(웃음) 어떤 이야기가 오갈 지는 모르지만, 김민하 배우의 GV 하면 그려지는 모습은 있어요. 올해 4월,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상영 후 나눈 관객과의 대화처럼, 관객의 이야기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몸을 기울이고 눈을 반짝이는 모습을 또 볼 수 있겠다 싶거든요.
보통 한 시간쯤 하잖아요. 너무 짧은 것 같아요. 앞서 말했다시피 제가 퍽 내향적이라 일정한 공간에 저를 오래 노출하면 힘들거든요. 그런데도 GV 할 때는 너무 재미있어요. 그곳이 큰 공간이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빠져들어요. 관객 한 분 한 분의 말에 집중하는 이유도, 저는 질문하는 그분밖에 안 보이거든요. 그 순간은 둘만 얘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또 다들 조심스럽게, 소중하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하잖아요. 그 모습이 말할 수 없이 고맙고 사랑스러워요. 그래서 더 잘 듣고 깊이 생각해서 답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 모습이 인상 깊은 건 영화에 대한 애정이 보이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그토록 영화를, 영화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어떤 예술의 형태로든 이야기를 체험하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노래 듣고, 영화 보고, 책 읽고 그 과정을 사랑해요. 왜 좋아할까 생각해보면, 저는 이야기를 통해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받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세상에는 아주 많은 사람이 존재하잖아요. 그중 누군가는 분명 외로워할 거란 말이죠. 본인이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 테고요. 슬퍼하는 사람도, 기뻐하는 사람도, 절망적인 사람도 있을 거예요. 이들의 삶을 흡수한 어떤 영화나 드라마가 다시 어떤 이에게 숨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는 것이 참 근사한 일이지 않나 싶어요. 또 제가 배우로 작품을 통해 누군가의 손을 잡아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도 살아갈 힘을 주는 것 같고요. 저와 작품, 관객이 상호 보완적인 위로를 주고받는 것 같달까요. 그래서 끊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일단 너무 재미있잖아요. 시각적으로도 무언가를 계속 구현해내는 게 되게 멋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영화가 가장 필요한 순간은 언제예요? 배우로서 또는 관객으로서요.
배우로서는늘 필요하죠. 영화는 제게 소중한 일터이기도 하잖아요. 계속 일을 하려면 영화와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하고 그래야 저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관객으로서도 저는 언제나 영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에요. 단순하게 정리하면 배우로서는 분출하기 위해, 관객으로서는 흡수하기 위해 영화가 필요하거든요. 여러 사람이 모여 각자의 것을 표출했을 때 그것이 하나의 영화가 되는 거잖아요. 관객일 때는 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분출해내는 것을 받는 입장이 되고요. 그렇게 관객인 내가 흡수한 것을 축적해, 또 배우로서 분출하고. 그렇게 계속 순환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분출과 흡수 중 어느 쪽에 머무는 중인가요?
요즘 새 작품을 촬영하고 있기 때문에 분출하는 쪽인 것 같아요. 주 5일간 제가 생각하고 상상해온 것을 꺼내 보이는 중이에요.(웃음) 오늘도 그날 중 하루가 아닌가 싶어요. 저는 화보 촬영을 할 때도 어떤 영화 속 장면이나 분위기를 상상하면서 무드를 정해놓고,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하거든요. 오늘은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비틀쥬스>였어요.
실은 저도 내심 한 작품을 떠올리긴 했어요. 제가 상상한 건 <펄프 픽션>이에요.
오, 그것도 너무 좋죠. 눈이 약간 돌아가 있는, 하하.
앞서 진행한 영상 콘텐츠를 찍으면서도 느꼈는데,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인 것 같아요. ‘나의 영화로운 순간’에 대한 질문에 많은 배우와 감독이 영화 안에서의 어떤 순간을 말하는데, 김민하 배우는 특이하게 영화 밖 일상을 얘기했어요.
저는 연기할 때나 글을 쓸 때나 모든 영감을 일상에서 받아요. 영상 인터뷰 때 한 말을 다시 정리하자면 이런 거죠. 어느 날 갑자기 바람이 불었을 때, 그 바람이 너무 특별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제가 바다를 좋아하는데, 바다에 가면 사람들의 말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리잖아요. 저에게는 그게 아주 아련하게 느껴져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고요. 연기할 때 그런 순간을 생각하면서 표현할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감각으로 기억하는 것이 제겐 무척 중요해요. 반대로 그런 걸 못 느꼈을 때 매우 걱정스러워요. 무감각할 때가 가장 무섭거든요. 그래서 모든 게 예민하고 민감하게 피부에 와닿을 때, 그 순간이 더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아요.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이 곧 영화로운 순간인 셈이네요.
어릴 때, 특히 사춘기 때 좀 슬프거나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면 노래를 들으면서 ‘지금 나는 영화를 찍는 거야. 아니면 뮤직비디오를 찍는 거야. 언젠가는 끝날 거야. 이 노래가 끝나는 3분 40초 후면 슬픔도 끝날 거야.’ 항상 이런 생각을 했어요. 한 번은 제가 왜 이렇게 일상을 영화처럼 여기는지 생각해봤는데요. 어쨌든 영화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물론 실존하지 않는 세상을 그린 SF나 판타지도 있지만, 그조차도 인간적인 이야기가 담기기도 하고요. 그래서 자꾸 제 삶을 영화로 연결 짓는 것 같아요. 제 내밀한 모습을, 제 삶과 닿아 있는 영화를 꿈꾸면서요.
김민하라는 배우 혹은 사람의 내면을 파고드는 영화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네요. 마음껏 분출할 수 있는 영화를 만났을 때, 또다시 ‘영화로운 순간’에 대해 들려주세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어떻게 보면 못났다고 생각하는 부분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나를 외면하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