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신중하게 마음속의 파동을 다스리며. 배우 강훈은 그렇게 나의 드라마에 당도했다.

버건디 니트 스웨터 Ferragamo, 브레이슬릿 Keme.
레더 셔츠와 팬츠 모두 Ferragamo.
그레이 톱과 팬츠, 슈즈 모두 Dior Men, 링 Tom Wood.

배우 강훈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맑고 해사한 모습 말고 다른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 이번 화보의 목표였는데요. 그 덕분에 고요하고 약간은 서늘한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새로운데 어색해 보이진 않네요.

사실 전 익숙한 얼굴이에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밝은 모습을 많이 보이는데, 혼자 있을 땐 주로 이런 표정이거든요. 밝은 이미지로 인식되는 것이 불편하거나 아쉽진 않았지만 언젠간 다른 얼굴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오늘 그 모습이 나온 것 같아 만족합니다.

곧 방영할 드라마 <나의 해리에게>에서도 오늘과는 또 다른,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지 않을까 싶어요.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인간관계에는 서툰 ‘강주연’이라는 인물을 맡아 그가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깨닫는 순간을 연기했어요.

주연에게서 눈에 띄는 두 가지 면모가 있었어요. 첫 번째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적 특성이에요. 영상을 이것저것 찾아서 보니 아나운서는 대부분 일상생활을 할 때도 말에 힘이 있고, 보다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더라고요. 자세도 꼿꼿해요. 말이나 행동 모두 곡선보다는 직선에 가까운 형태를 상상했어요.

원래 꼿꼿한 편인 줄 알았는데, 캐릭터 해석에서 기인한 거군요.

맞아요. 원래는 자세가 좀 구부정한 편이라 드라마 준비하면서 곧게 펴는 연습을 되게 많이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비싸고 좋은 옷 입으니까 자연스럽게 정자세가 나오던데요.(웃음)

(웃음) 탐구한 두 번째 면모는요?

이야기 안에서 주연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생애 처음으로 사랑을 알아가는 시점이에요. 그래서 처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됐을 때 드는 감정을 계속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사랑을 알게 되는 거니까, ‘늦은’이 신경 쓰였죠.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이와 상관없이 첫사랑의 느낌은 똑같을 것 같더라고요. 처음 사랑에 빠지면 주변이 다 지워지고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몰두하게 되잖아요. 사람이 가장 순수해지는 순간인 것 같아요. 그래서 최대한 계산하지 않고 임하려고 했어요. 외형은 단단하게, 사랑의 감정을 표출할 땐 서툴고 말랑한 느낌을 머릿속에 그렸어요.

촬영은 어느 정도 남았어요?

이제 한 회차 남았어요. 좀 빨리 찍었어요. 12부작이라고 치면 보통 5~6개월, 길면 8개월 넘게 찍는데 이번 드라마는 4개월도 채 되지 않아 다 찍어가요.

아쉬워요? 아니면 맡은 과제를 다 해내간다는 점에서 후련해요?

짧은 시간동안 정이 확 들었어요. 모든 작품이 무척 소중하지만, <나의 해리에게> 는 너무 빨리 끝나버려서 아쉬워요. 감독님의 영향인지 현장이 되게 유쾌하거든요. 그래서 매일 촬영장에 가기만을 기다린 것 같아요. 촬영이 없는 날은 좀 우울하고 그랬어요.

현장이 좋았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는데, 가지 않는 날은 우울할 정도라니, 대체 어떤 분위기였던 거예요.(웃음)

좀 특이했어요. 되게 바쁜데 다들 웃고있어요. 정신없이 돌아가는데 엄청 배려해준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그리고 감독님이 칭찬을 좀 많이 해주셨어요, 헤헤. 그러니까 더 보여주고 싶고 그랬던 것 같아요. 냉철한 비평보다는 칭찬에 춤추는 스타일이군요. 저는 채찍질하면 기죽는 스타일이에요. 계속 속에 담아둬요. 그 반대로 칭찬받으면 신나서 춤추고요. 감독님이 제 성향을 아신 건지 아주 달콤한 말을 많이 해주셨어요.(웃음) 나중에는 막 사명감까지 생기던데요.


오늘 촬영할 때 칭찬을 더 할 걸 그랬어요.

그러니까요. 저 계속 귀 기울이고 있었는데.(웃음)

레더 셔츠와 팬츠 모두 Ferragamo, 링 Keme.
재킷과 핑크 셔츠 모두 Prada.
버건디 셋업과 니트 스웨터, 슈즈 모두 Ferragamo, 브레이슬릿 Keme.

그토록 최선을 다하는 데는 간절함도 작용했을까요? 예능 프로그램 <택배는 몽골몽골>에서 배우로서 작품에 대한 갈망을 털어놓은 적이 있어요. 그 과정을 지나 만난 작품이 <나의 해리에게>고요.

촬영 시점으로 따지면 드라마 <꽃선비 열애사>를 끝내고 이 작품을 만나기까지 텀이 좀 길었어요. 사실 <택배는 몽골몽골>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두고 고민이 많았어요. 저보다 더 오랜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쨌든 저만 바라봤을 때는 무척 힘든 시간이긴 했어요. 팬데믹 시기 가 아니었다면, 제작 편수가 줄어드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더 많은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고요.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나는 운이 없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러다 <나의 해리에게> 를 만난 거죠.

그때의 불안은 어떻게 다스렸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불안을 느낀 까닭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더라고요. 그 사실을 깨닫기 까지 시간이 좀 걸렸고요. 그 이후에는 저만 바라보려고 애써왔어요. 어차피 포기하지 않을 거고 계속할 거니까 기다리고 버텨보자 한 거죠.


맞아요. 계속하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있잖아요.

아무리 힘들어도 다른 직업은 생각해보지 않았어요. 평생 해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을 것 같은 유일한 일이 제게는 연기거든요. 제가 이 일을 엄청 사랑해요. 그리고 한 가지 이유를 더 대자면 어릴 때 농구 선수를 꿈꾸다 포기했는데, 부모님께 그때 같은 실망을 또 안기고 싶진 않은 것도 있어요. 아버지가 유독 이 일을 응원하고 좋아해주세요. 누나가 있는데, 누나는 남들한테 보여지는 직업을 가진 게 아니어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지 얘기해주지 않으면 모르거든요. 그런데 제 일은 부모님이 볼 수 있으니까, 그 점을 되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새 작품을 하게 됐을 때, 사실 가장 기뻐한 이는 부모님일지도 모르겠네요.(웃음)

어머니는 조용히 좋아해주시는데 아버지는 엄청나게….(웃음) 작품에 출연한다고 하면 그때부터 무슨 연기 영상을 보내면서 이렇게 해봐라, 저런 방법도 있다 하며 연락이 계속 와요. 그럼 저는 “알아서 할게요” 그러고요, 헤헤.

욕망 앞에서 솔직해지는 편인가요? 아니면 오히려 초연해지나요? 이 일을 무척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니, 솔직하게 표출하는 쪽일까요?

지금도 완전히 솔직하진 못하지만, 예전에는 많이 숨겼어요. 감독님을 만나서도 “저 이 작품 꼭 하고 싶습니다” 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열정은 부글부글 끓는데도요. 지금은 간절함을 조금씩 드러내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론 겁이 많고 조심스러워요. 어디서든 선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 움직이려는 편인 것 같아요.

연기할 때도 조심스러운 성정이 발현되나요?

그런 편이에요. 제가 맡은 인물이 보여줄 수 있는 선을 항상 만들어놓는 것 같아요. 그게 여기까지만 한다는 노력에 대한 건 아니고요. 감독님이 그리는 그림이 있을 텐데, 그 밖으로 뛰쳐나가지 말자는 쪽이에요. 그 울타리 안에서 충실한 게 배우의 역할이지 않나 싶고요.


선을 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는요? 틀을 깨는 선택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요.

저는 그걸 깨뜨리면 무언가를 잃더라고요. 제가 생각한 것이 모두 옳진 않겠지만 선을 확 넘었을 때 결국은 뒤를 돌아보게 되는 것 같아요. 삶에서도 그렇지만 연기할 때도 비슷해요. 선을 넘어보고 싶다면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같이 넘어가는 거죠. 제 욕망이 이야기보다 커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무엇이든 확 가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마지막 질문으로 배우로서 어떻게 나아가고 싶은지 물어보려 했는데, 한번에 확 나아가기보다 천천히 흘러가는 방식을 바랄 거라 예상되네요.

맞아요. 다만 그게 수평선은 아닐 거예요. 높이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계단을 하나씩 오르는 중이고 그 끝이 어딜지 모르겠지만 계속 올라가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천천히 저라는 사람이 확장되길 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