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 가벼운, 가장 투명한 마음을 지닌 채.
배우 이주명은 영화의 세계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
2016년에 데뷔해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스물다섯 스물하나> <모래에도 꽃이 핀다> 등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 이주명. 그는 지난 7월 말 개봉한 <파일럿>을 통해 영화의 세계에 들어섰다. 실력 있는 파일럿 ‘한정우’(조정석)가 실언으로 직장을 잃은 뒤 재취업을 위해 동생 ‘한정미’(한선화)의 이름을 빌리며 여자의 삶을 경험하는 이야기. 그 안에서 이주명 배우는 당차면서도 따뜻한 성정을 지닌 여성 파일럿 ‘윤슬기’가 되어 웃음으로 가득한 영화에 적당한 무게를 실어준다. 개봉 5주 만에 관객 4백50만 명을 돌파한 올여름 흥행작을 필모그래피 첫 줄에 올린 그는 지금 성장통을 기꺼이 겪으며 온 마음을 다해 나아가고 있다.
첫 영화 <파일럿>이 크게 흥행했어요. 요즘 어떤 기분으로 지내고 있나요?
큰 사랑을 받은 지난 한 달이 체감상 넉 달은 되는 것 같아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고, 지나치게 들뜨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파일럿>을 통해 여러 최초의 경험을 했는데, 모든 순간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영화 촬영 현장도, 관객과의 만남도 처음이라 부담과 긴장을 느꼈지만 그러지 않은 척하려고 애썼죠.
무대 인사 영상을 봤는데, 떠는 것 같지 않았어요. 좌우명이 ‘쫄지 말자’잖아요.(웃음) 오히려 대담하게 새로운 경험을 해나가는 사람일 거라 짐작했어요.
그럴 것 같죠?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할 거면 잘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엇이든 “해볼게요!” 하는 편이고, 배우로서 전장에 나설 때마다 쫄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그 전에는 최대한 쫄려고 해요.(웃음) 그래야 실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그 떨림을 이미 느껴본 듯해 보다 익숙하게 해낼 수 있더라고요. 느슨해진 마음의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자만심을 용납하지 못하기도 하고요.
스크린 속 본인의 모습을 처음 마주했을 땐 어땠어요?
제 연기가 어땠는지, 영화가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궁금했지만 쭈뼛쭈뼛하면서 봤어요. ‘이 장면에서 다르게 해볼걸’, ‘더 잘 할걸’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서너 번 보고 나서야 ‘감독님이 예쁘게 찍어주셨잖아!’ 싶기도 하고(웃음), 영화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어요.
<파일럿>의 ‘슬기’는 당찬 여성 파일럿이죠.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승완’, <모래에도 꽃이 핀다>의 ‘유경’ 등 최근에 맡은 캐릭터와 성격이 비슷해요.
제가 당찬 성격을 지향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려 하는 걸 감독님들이 알아봐주신 것 같아요. 슬기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토록 멋진 친구를 내가 잘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어요. 제가 가지지 못한 면을 지닌 슬기를 닮고 싶었는데, 그의 단단한 면모가 제게도 조금씩 스며들더군요. 슬기 덕분에 삶의 용기를 얻었어요.
대본을 읽으며 슬기에 대해 탐구할 때 무엇을 가장 유심히 살폈나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양한 면면을 지니고, 외면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모습도 존재하잖아요. 슬기를 알아갈 때도 시나리오에 드러나지 않는 점을 더 보려고 노력했어요. 슬기가 자기 목소리를 높이게 된 시작점을 살피기 위해 슬기라는 이름의 테이프를 되감아봤죠. 제 생각에 슬기는 나이에 비해 사회 경험을 많이 하면서 마음 아파한 적이 있을 테고, 해외를 자주 오간 만큼 사고도 개방적일 것 같아요. 그렇기에 곤경에 처한 주변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러한 슬기의 따뜻함에 기반을 두고 그를 표현하려 했어요.
김한결 감독도 “코미디영화지만 공감과 이해가 중요하다”라고 말했으니 배우와 감독이 통한 게 아닌가 싶네요. 슬기를 표현하며 배우들과 협업하는 현장에서는 어떤 마음으로 임했나요?
다른 캐릭터와 달리 슬기에겐 웃긴 장면이 없어요. <파일럿>이 내포하는 여러 의미가 있는데, 슬기가 웃음기를 덜어낸 모습으로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죠. 그 역할을 해내되, 너무 무겁게 표현되진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어요. 가끔씩 ‘나도 웃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저만 빼고 다들 코미디 싸움을 하고 있더라고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하는 현장이었겠네요.
맞아요. 정미인 척하는 정우가 휴대폰에 걸려 온 전화 때문에 정체를 들킬까 봐 집에서 거의 날다시피 할 때 특히 웃겼어요. (조)정석 선배의 연기도 날개 돋친 듯했고요. 특별한 대사나 지문이 없는데도 자유로운 연기로 명장면을 탄생시키니 감탄스러웠죠. 코미디는 연기의 정수라 할 만큼 어려운 장르라고 하잖아요. 저도 내공을 더 쌓아 코미디 연기를 제대로 선보이고 싶어요. 완전히 망가져도 좋아요.(웃음)
이제 <파일럿>을 떠나보내고 다음으로 나아갈 시기예요.
아쉬운 마음이 들고, 후련하기도 해요.(웃음) 전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인데, <파일럿>은 과정에 치열히 임하는 데서 나아가 결과까지 좋았어요. 관객의 박수를 받는 경험을 해보니 ‘연기엔 정답이 없지만 정답에 가까워질 수도 있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초심자의 행운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영화를 계기로 근거가 명확한 자신감을 얻었어요. 전작을 잘 보지 않는 편인데도 <파일럿>은 자주 꺼내 보게 될 것 같아요.
이번 영화가 먼 훗날의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줄 것 같아요?
배우로서 나아가는 마음의 표본 같은 작품이요. 활동을 이어가다 보니 잘하고 있는 건지, 왜 이 일을 하는 건지 생각이 많아져요.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질문들을 떠올리다 보면 늪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하더라고요. 그럴 때 <파일럿>을 떠올리면 늪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물음표를 붙이지 않아도 될 때가 있고, 마음을 가볍게 먹어도 괜찮다는 걸 일깨워주지 않을까 싶어요.
고민에 매몰되기보다 그저 해나가는 것이군요.
맞아요. 그 과정에서 힘들 땐 배우는 게 있고, 재미있을 땐 느끼는 게 많아요. 아직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기분이 들지 않는 순간이 과연 올까 싶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은 호기심과 흥미를 품은 채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가려 해요.
연기의 세계에서 살아가며 일상에 생긴 변화가 있다면요?
제 행동에 연기적으로 접근하게 된 것 같아요. 낄낄대며 웃다가도 문득 ‘아, 이게 진짜구나. 연기할 때 이런 감정이 들 수 도 있겠다’ 싶어요. 물론 연기에는 도움이 되겠죠. 예전의 저라면 배우로서 좋은 태도를 지닌 거라고 여겼을 텐데, 지금은 마냥 좋은 현상은 아닌 듯해요.
배우로서 성장통을 겪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성장통은 지나가잖아요. 이게 평생 안고 갈 숙제라면 성장통이 아니라… 그냥 ‘통’일 거예요.(웃음) 시간이 흘러 이 일에 더 익숙해지면 통증이 무뎌질 수도 있겠죠? 어떤 감정이 느껴질 때 ‘오케이, 접수!’ 한 다음 언젠가 현장에서 꺼내 쓸 수도 있을 테고요. 현재로서는 잘 모르겠어요. 겪어보고 말씀드릴게요.
꼭 알려주세요.(웃음) 이 시기를 지나 오래도록 이 일을 하기 위해, 본인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여유가 생기면 좋겠어요. 얼마 전 선배님들이 이런 대화를 나누는 영상을 봤어요. “이 신 너무 열심히 했다. 대충 해야 하는데.” 그게 무슨 느낌인지 이젠 조금 알게 된 듯해요. 무언가를 잘해내고 싶은 마음이 크면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잖아요. 힘을 좀 풀고, 지나치게 몰입한 상태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힘줘야 할 때도 많죠. 아직도 촬영 전날이면 잠이 잘 오지 않아요.(웃음)
그렇게 잠 못 이룰 정도로 이 일에 열중하며 어떤 기쁨을 느끼나요?
혼자 고심하면서 무언가를 알아가는 시간을 거쳐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을 때, 완성작을 보며 울고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자체로 참 기쁘더라고요. 작품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이 전해졌다는 거잖아요. 이를 깨닫는 순간에 가장 큰 희열을 느껴요.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을 통해 누군가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죠.
맞아요. 돌이켜보면 제가 영화를 찾는 순간은 주로 감정의 허기를 느낄 때인 것 같아요. 심심하거나, 웃고 싶거나, 외로울 때 영화가 제 내면을 충만하게 만들어줬어요. 배우의 감정과 이야기를 따라가는 관객들이 저마다의 감상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영화를 참 좋아해요.
더 많은 영화 속 이주명 배우를 볼 수 있기를 바라요.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기를 꿈꿔요?
예전엔 간단명료했는데 생각이 많아진 지금은 참 어렵네요. 그럼에도 분명한 건, 언제나 진심이 통하는 배우이고 싶다는 거예요. 이 말의 의미가 사람들에게 온전히 가닿을까 싶어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잖아요. 그런데 이를 대체할 표현이 떠오르지 않아요.
그게 가장 적확한 이주명 배우의 소망이기 때문일 거예요.
그렇죠. 어떠한 허상도, 과장도 아닌 진실이에요. 진실로, 진심이 담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이 마음이 지면으로 전해 질 수 있을까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