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현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하기에 결국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불확실성 속에 자신을 던져둔 채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 확언하거나 단정 짓지 않을 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음을 아는 사람. 어떤 문장으로도 그를 온전히 표현할 순 없겠지만, 노상현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말하기에 결국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파친코>에서 선자를 만나 변화한 목사 ‘이삭’이, <대도시의 사랑법>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흥수’가 된 것처럼. 앞으로도 수많은 인물이 그를 거쳐 새로이 탄생할 것이다. 자신을 비워내고 또 쌓아나갈 노상현의 열정이 지금 연기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파친코> 시즌 2 촬영이 지난해 1월에 끝났다고요. 1년 반의 시간을 지나 세상에 공개되었네요.
촬영 당시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어 ‘벌써 1년 반이나 지났다고?’ 싶어 요. <파친코> 시즌 2를 본 주변 분들은 다들 슬프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영화로운 순간’ 영상 촬영 때도 <파친코> 시즌 2에서 ‘선자’(김민하)와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을 꼽았어요. 그날을 복기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편안했어요. 아무런… (긴 정적) 연기한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이 신을 잘해야 한다는 걱정도 전혀 없이… 글쎄요. 정말 죽기 직전의 마음이었나?(웃음) 촬영하는 서너 시간 동안 굉장히 슬펐어요.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괴로울 정도로요.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모르겠어요. 조금 이상해요.
<파친코>에서 이삭은 선자라는 타인을 통해 삶의 변화를 마주하죠. 노상현 배우도 그 작품 안에서 이삭을 만나며 크고 작은 영향을 받았을 듯해요.
작중 이삭이 선자를 만나 “내 인생이 커진 것 같다”고 말하고, “이 사람 덕분에 나도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해요. 자신의 목적을 향해 나아갈 힘을 얻고요. 비교하자면 <파친코>도 제게 그런 존재이지 않을까 싶어요. 시즌 1부터 시즌 2까지 긴 여정 속에서 깊게 몰입했고, 연기를 더 오래 잘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신감을 조금 더 얻기도 했고요. 제 세상을 키워준 작품이라고 느껴요.
얼마 전 김고은 배우와 호흡을 맞춘 영화 <대도시의 사랑법>도 개봉했죠. 이 작품의 어떤 점에 이끌려 함께하고 싶었어요?
시나리오가 솔직 담백하면서도 재미있어요. 대사가 현실적이어서 공감할 수도 있고요. 그러면서도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며 뚜렷한 메시지를 전해요. 좋은 영화에 함께할 수 있겠다 싶어 참여하기로 결정했죠.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는 친구 ‘재희’(김고은)와 우정을 쌓아가며 자아를 찾아나가는 인물인 흥수 역을 맡았어요. 흥수를 만나 새롭게 경험하거나 배운 것도 있어요?
흥수는 나답게 살려고 용기를 내요. 재희와 교류하며 유대를 쌓고 서로 도우며 성장하죠. 그 모습을 보며 그런 용기의 가치와 관계의 힘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동시에 세상에 흥수 같은 사람이 많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라는 사람 자체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가지고 있잖아요.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본능이고요. 흥수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죠.
<파친코> <사운드트랙 #2> <대도시의 사랑법>에 이어 촬영 중인 <다 이루어질지니>까지 바쁘게 달리고 있어요. 노상현이 배우로서 작품 안에서 ‘잘해냈다’고 말하려면, 최소한 무엇이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선 잘해냈다는 생각을 잘 안 해요.(웃음) 자기 연기에 만족하면서 촬영장을 떠날 수 있는 배우가 많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저 해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만족을 느끼는 것 같아요. 최선을 다했다, 내가 할 일을 해냈다, 하는 거죠.
이전 인터뷰를 보니 ‘묵묵하고 무던하게’, ‘내가 할 일을 그저 잘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걸 보고 노상현 배우는 애써 의미를 찾기보다는 무언가를 행하는 행위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일 거라 짐작했어요. 하지만 배우는 지속적으로 대중에게 결과물을 보여주고 평가받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해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순간도 있을 법한데요.
‘잘해야지’ 한다고 잘해지는 건 아니더라고요.(웃음) 예전에 인상 깊게 본 광고가 있어요. 조승우 선배가 나와서 이런 말을 해요. “정상에 오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정상에 오르는 건 아니야, 올라야지. 홈런을 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홈런을 치나? 쳐야지.”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 내 욕심이잖아요. 연기하는 순간, 배우는 그 인물로서 최대한 살아 있어야 하는데, ‘잘해야지’라고 속으로 되뇌고 있다면 이미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럼 오히려 힘이 들어가거나 불안해질 테니까요. 그래서 의식적으로 그 생각을 안 하려고 해요. 욕심이 없는 게 아니라, 정말로 잘해내고 싶어서요.
그런데 그게… 쉽나요?
어렵죠.(웃음) 매우 어려워요. 그런데 그게 맞다고 믿게 된 이후로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을 내려뒀어요. 배우가 아니라 인간 노상현으로 있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무언가에 연연한다고 해서 결과가 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마음만 고통스럽죠.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자신을 붙잡진 않던가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더라고요. 솔직히 말하자면 과거를 돌이켜보거나 미래를 두려워할 여유도 없고,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늘 눈앞에 있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당장 해야 할 일이고, 지금만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럼 배우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에요?
음… 집념이요. 작품마다 결이 다르고, 인물에 따라 접근 방식이 다르잖아요. 작품이나 배역을 만날 때면 매번 새롭게 접근하려고 해요. 그 전에 모든 걸 비워내려 하고요. 하지만 어떻게 연기할지를 처음부터 완벽히 알고 시작할 수는 없거든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하는 배우들과 호흡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현장에서 슛이 들어간 순간에도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해요. ‘이 사람은 이렇고, 이 작품은 이런 이야기를 해. 땅땅’ 하며 확신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으니까요. 끝까지 고민을 멈추지 않는 의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모르거나 부족할 수 있음을 인지하는 태도 같은 거요.
오늘 이야기를 나눠보니, 노상현 배우는 확신에서 힘을 얻기보단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한 사람인가 봐요.
하나의 생각만을 강하게 주장하고 싶지 않아요. 세상을 관찰하다 보면 이런 생각도 저런 생각도 있음을 알게 되거든요. 인생에는 정답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어요. 가끔 지난 인터뷰를 다시 보면 제가 확언한 것 같아 낯간지럽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 말이 헤드라인으로 인용된 걸 보면 ‘내가 이런 말을 했나?’ 싶기도 하죠.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말하자면, 저는… 늘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이번 인터뷰 제목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노상현’, 어때요?
오, 좋아요.(웃음)
마지막 질문이에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노상현은 왜 지금 연기를 해야 할까요?
연기가 지금의 제 열정이 닿아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연기란 완성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도달해야 하는 완벽한 지점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 속에서 새로운 인물을 만나며 무수한 변화를 겪겠죠. 그걸 최대한 즐기며 알아가고, 배우고, 잘 표현하고 싶어요. 지금은 이런 마음을 품고 계속 연기 안에 머무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