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이 계절마다 마리끌레르는 젠더프리의 문을 열어왔다. 단단한 편견에 균열을 내기 위해, 굳건한 규정을 탈피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8인의 여성 배우가 올해 여덟 번째 젠더프리 필름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내 기억 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간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정원 役

앵클부츠 MICHAEL Michael Kors, 네크리스 Portrait Report.
채원빈
<8월의 크리스마스> 속 ‘정원’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천천히 낮은 어조로 읊조리는 채원빈 배우의 얼굴에서 1990년대 우리가 사랑했던 몽글한 사랑 이야기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제가 그 시절의 멜로영화를 좋아해요. 저는 살아보지 못한 시절이지만, 왠지 그때의 이야기가 더 진실되고 마음에 와닿는 느낌이 있거든요. 그래서 젠더프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을 때 멜로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곧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가 생각났어요. 그리고 떠올린 게 정원의 편지였고요.”
단 세 문장의 대사에도 그 편지를 써내려갈 때의 마음, 이를 받게 될 사람을 떠올리는 마음, 결국 보내지 못했을 때의 마음을 살피는 그가 연기하면서 가장 깊이 품은 갈망은 이해의 영역이다. “어떤 작품을 만나든 이 인물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 깊이로 이해할 수 있을까 골몰해요. 한평생 같이 살아온 저 자신에 대해서도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데, 활자로 접한 남을 연기할 때는 더 큰 이해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래서 상상을 많이 해요. 글에 담겨 있지 않더라도 이런 과거가 있지 않을까, 이럴 땐 이런 마음이 숨겨져 있진 않을까 가늠해보는 거죠. 제 안의 질문을 하나하나 쌓아가다 보면 어느샌가 잘 이해된 것 같은 순간이 찾아와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그는 지금 자신을 열어두는 연습을 더하는 중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전제 없이 새로이 발견되는 자신을 관찰하고, 이를 기억해두는 작업은 멀게만 느껴지는 어떤 캐릭터를 만나게 되었을 때 귀중하게 쓰일 거라 믿기에.
“매년 여름 비 오는 날마다 <불한당>을 봐요. 우애인지 사랑인지 줄타기를 하는 ‘재호’와 ‘현수’를 여성 배우들이 연기하면 어떨까 생각해보기도 하죠. 제게 적용해보면 아직은 어떻게 하지 싶은데, 저를 열어두는 연습을 계속하다 보면 가능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아, <세자매> 속 지긋지긋하고 싫다 하면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 가족 이야기도 좋아해요. 저는 어떤 식으로든 깊은 이해가 필요한, 입체적인 인물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