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이 계절마다 마리끌레르는 젠더프리의 문을 열어왔다. 단단한 편견에 균열을 내기 위해, 굳건한 규정을 탈피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8인의 여성 배우가 올해 여덟 번째 젠더프리 필름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한 가지만 얘기할게. 넌 집에 가면 엄마가 밥 해주고 공부하라고 얘기해주지?
나는 집에 가면 내가 밥해 먹어. 가끔 아버지 얼굴 보면 인사하고.
아침에 눈떠보면 학교 지각이라서 왜 안 깨웠냐고 화내거든?
근데 안 계시잖아 엄마가. 아무도 없어. 그 정도야.
그 정도가 내가 얘기할 수 있는 우리 집 관련된 얘기야. 됐지? 됐냐고.”

영화 <파수꾼> 기태 役

레더 재킷 YCH, 브레이슬릿 Swarovski.
톱과 팬츠 모두 & Other Stories,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한선화

“마리끌레르의 필름 프로젝트 ‘젠더프리’에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나니까 하고 싶은 작품이 너무 많았어요. <불한당>에서 ‘재호’와 미묘하게 줄 타듯 관계를 형성하는 ‘현수’의 말,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마음을 일렁이게 만드는 ‘인우’의 말. 그간 연기 연습할 때 자연스레 여성 캐릭터 위주로 봤는데, 이번 기회에 남성 캐릭터를 찾아보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되게 흥미로웠어요.” 올해 젠더프리 프로젝트 참여 배우 중 가장 오래 작품을 고민한 한선화 배우가 선택한 건 영화 <파수꾼> 속 자신의 결핍을 드러내는 기태의 말이다. “너무 무겁지 않게 표현해보자 싶었어요. 물론 상처를 슬프게 표현해도 힘이 있겠지만, 저는 결핍을 드러내지도 숨기지도 않은 채 그저 아무렇지 않은 듯 대할 때의 울림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잘해낸 건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라이트하게. 간단하고 명료하게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방식을 설명했지만, 그는 작품을 두고 고민할 때 못지않게 다양한 시도를 거듭했다. 담백하게, 다음은 조금의 움직임을 더해서, 그다음은 모든 움직임을 배제한 채, 그리고 또 다음. “예전에는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게 두려웠다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규정짓지 않을 때 좀 더 즐거울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더 해보기도 하고, 덜 하기도 하고, 계속 다르게 해보자 생각해요. 그래야 저도 몰랐던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그런 모습을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으니까요.” 다른 것, 새로운 것을 향한 갈망을 확인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럼 오늘처럼 어떤 제한도 없다면, 연기해보고 싶은 다름은 무엇일까. “근현대사를 다룬 시대극 중엔 아직 여성을 앞세우는 작품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것 같아요. 접해온 작품 중 대부분이 남성 서사였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사이사이에 자신의 몫을 다하며 존재한 여성도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욕심내보고 싶어요. 곧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오늘의 열망과 내일의 기대가 가득 밴 그의 말을 듣는 내내 더 넓은 젠더프리를 희망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저는 참 감사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젠더프리 같은 시도도 이뤄지고 있고, 여성 서사가 주가 되는 작품도 늘어나고 많이 유연해졌잖아요. 저는 그저 반가운 마음으로 현재를 맞이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