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이 계절마다 마리끌레르는 젠더프리의 문을 열어왔다. 단단한 편견에 균열을 내기 위해, 굳건한 규정을 탈피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8인의 여성 배우가 올해 여덟 번째 젠더프리 필름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춤추며 걸어 나와) 누구세요? 누구세요?
저예요. 제가 많이 늦었죠? 오늘 메뉴는 화분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큰 소리에 놀라며) 깜짝아.”
영화 <메기> 이성원 役

오경화
‘젠더프리는 예전부터 좋아하는 프로젝트인데요. 제가 지금 하고 싶은 남성 캐릭터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요.’ 올해의 젠더프리 프로젝트를 함께하고 싶다는 제안에 오경화 배우는 답변을 유보하고, 진심으로 해보고 싶은 역할을 찾아 나섰다. “하고 싶고 좋아하는 프로젝트라고 해서 일단 오케이 하고 역할을 찾는 게 저는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연락을 받고 며칠간 하고 싶은 캐릭터 찾기에 몰두했어요. 사회가 변하고 있음에도 아직 여성 캐릭터 중에 없는 건 뭘까, 그것만 집중하자 했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인데요, 거기서 ‘엘리오’에게 아빠가 해주는 말을 특히 좋아해서 그걸 해볼까 싶었는데요.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에 가까웠고, 그보단 저로서 더 잘할 수 있는 걸 찾고 싶었어요. 그러다 생각난 게 <메기>의 성원이에요.”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젠더프리 프로젝트 최초로 소품(수건과 직접 기르는 화분)까지 가져오는 열성을 보이며 자신만의 한 장면을 완성해냈다. 현장의 모두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연기를 선보인 후 이를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은지 묻자 그는 쓱 휴대폰을 꺼내 ‘세계 인구’를 검색했다. “지금 세계 인구가 약 81억여 명인데요. 그중 딱 두 명만 빼고 다 봐주면 좋겠어요. 저랑 구교환 선배님. 저는 저를 못 볼 것 같고, 구교환 선배님은 제발 안 봤으면 좋겠어요.”
매번 예상을 빗나가거나 넘어서는 그의 말을 들으며 불쑥불쑥 웃음이 났다. 기대가 어긋나서 오히려 즐거워지는 대화의 주제는 ‘나를 규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저는 ‘나는 어떤 것 같다’는 정의를 늘 해체하고 싶어요. 저 자신을 한 단어로 규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또 그 단어들조차 깨고 싶어요. 단어란 게 소통하기 쉽게 사람들이 정한 일종의 룰이잖아요. 어떤 땐 그게 저를 가두는 것만 같거든요. 연기를 하는 동안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만큼 그 규정들을 타파할 생각이에요. 그래서 제가 연기한 인물들의 스펙트럼을 최대한으로 넓히는 게 제 목표예요.”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너른 오경화 배우의 인물들을 펼치기에 가장 좋은 환경은 어떤 곳일까. 그에게 마지막 질문으로 궁극의 환경을 물었다. “다양한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자신만의 예술성을 뽑아내는 현장이요. 실은 저도 모르는 새 이미 경험했을 수도 있지만요. 색으로 표현하자면 무지개 같은 현장에서 펄럭이며 존재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