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이 계절마다 마리끌레르는 젠더프리의 문을 열어왔다. 단단한 편견에 균열을 내기 위해, 굳건한 규정을 탈피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8인의 여성 배우가 올해 여덟 번째 젠더프리 필름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와서 보라. 테베의 모든 시민들아! 와서 보라.
여기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의 진상을 더럽혀
자기의 형제이자 자식인 아이를 낳은 이 사악한 자를 와서 보라!”
연극 <오이디푸스> 오이디푸스 役

모두 Jinsun, 슬링백 슈즈 Jimmy Choo.
예수정
“너희들은 다시는, 다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리라.” 이렇게 시작되는 예수정 배우의 ‘오이디푸스’는 연기라기보다 외침에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뭐 특별하겠어요? 그냥 요즘 살면서 모든 사람의 심정이 나 같을 것이다. 즉 시대의 영웅이 그리운 때가 아닌가, 그런 생각에서 <오이디푸스>의 이 대목이 떠올랐어요. 흔히 이 왕을 떠올리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거기서 더 안 나가더라고요. 그런데 그에 관한 진짜 중요한 이야기인, 오이디푸스왕이 진정 고귀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이 대목에서 나와요.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는 있는데 이를 고백하는 건, 특히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쉽지 않을 거예요. 그간 이룩한 명성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니까. 그런데 오이디푸스는 이 땅에 내려진 재앙을 없애기 위해 사악한 인간을 내쫓자며, 그 인물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과정에서 결국 진실의 끝이 자신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숨지 않아요. 자신의 눈을 찌르고 말하죠. ‘모든 시민들이여, 와서 보라, 내 아버지를 죽인 사악한 인간이 여기 있다, 나를 추방해라.’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운명이야’ 하며 도망치지 않고 부끄러운 자신을 내어놓는 거죠. 그것이 비극의 정수라 느껴져서 이 대사를 들려주게 되었어요.” 대화는 ‘이 대사를 누구에게 들려주고 싶은가’로 이어졌다. “내가 저지른 죄를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의 반응이 어떨 것인지 두려워서 고백하지 못하기도 한데요. 오이디푸스가 고백했을 때 시민들은 그를 불행한 운명에 묶인 가엾은 분이라 말해요. 진정한 고백에는 죄지은 이를 향한 돌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힘들 것인지를 먼저 보아주게 하는 것, 그 힘이 있어요. 그게 필요한 모든 분이 들어주셨으면 해요.”
그가 평생 마음에 품어온 극작가 브레히트의 말, “극장은 시민을 계몽하는 공간이다”가 떠오르는 대답이었다. “그 기능이 없으면 굳이 시간 내어 발걸음을 옮겨서 극장을 찾을 이유 가 없죠. 휴대폰 안에 즐거운 거 너무 많잖아요. 물론 즐거움을 배제하는 건 아니지만 극장은 역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것이 있는 작품을 해야 제 몫을 하는 거라 생각해요.”
굳건하고도 명징하게 이어지는 이전의 답과 달리 젠더프리에 관한 질문엔 자신은 이제 반걸음을 나아갔을 뿐이라며 수줍은 미소를 띄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젠더프리가 아직도 회자될 게 있나 했는데, 생각해보니 아직 나 자신은 프리한 건 아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오랜 세월을 이 공동체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아직 그렇게 프리하지 않은 점이 있는 거죠. 그래서 젠더프리의 대명사 같다 싶은 후배들을 만나면 너무 시원하고 매력적이고 좋아 보여요. 나는 거기까지는 안 간 것 같아요. 이제 반걸음 간 거예요. 방어벽을 여는 정도. 열고 나와 보니 훨씬 따뜻하고 넓은 세상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 그 정도의 생각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