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단단하게 굳어 있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이 계절마다 마리끌레르는 젠더프리의 문을 열어왔다. 단단한 편견에 균열을 내기 위해, 굳건한 규정을 탈피하기 위해.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8인의 여성 배우가 올해 여덟 번째 젠더프리 필름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보다 자유로운 형태로 나아가는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 걸까. 정말 죽였잖아 나의 손으로. 믿을 수가 없어 꿈을 꾸는 걸까 태워버려야 해 불길한 노트. 그렇지만 결국 썩은 인간들은 언젠가는 제거해야 해. 이상하다. 온 세상이 더 아름답게 빛나고, 거리에는 환한 미소 넘치네. 이 노트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뮤지컬 <데스노트> 라이토 役
“지난해 뮤지컬 <하데스타운>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최정원 선배가 ‘헤르메스’ 역을 맡아 화제가 되었잖아요.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러 갔는데 오히려 제가 엄청난 응원과 위로를 받았어요. 선배의 연기는 이 캐릭터가 본래 남성인지 여성인지 나뉘지도, 나눌 수도 없이 그저 헤르메스 자체로 보였어요. 제겐 엄청난 자극이자 충격이었고, 선배께서 이 역을 너무 멋지게 표현해 가슴이 벅차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그 덕분에 헤르메스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고요. 그날 공연장을 나오는데 ‘아,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은 힘이 생긴 것만 같았어요. 선배의 도전 덕분에 제가 오늘 짧게나마, <데스노트>의 라이토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젠더프리 프로젝트 영상이 나오면 제일 먼저 선배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앞선 선배의 행보를 보며 얻은 자극은 정선아 배우에게 전환의 동력이 되었다. “연출자가 아니라 배우이기 때문에 어떤 시도를 하기에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어요. ‘이건 이거야’ 라며 딱 떨어지는 역할을 많이 해서 그렇기도 했고요. 그런데 요즘 들어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어요. 늘 어딘가로 더 나아가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는데, 그러려면 역할에서 나이든 성별이든 심지어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무너뜨릴 줄 알아야 하는 거죠. 나 자신을 규정하지 않고 더 멀리 보는 게 진정으로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아닌가 싶어요. 실은 나이가 들수록 도전보다 안정을 찾게 되지만.(웃음) 이번 프로젝트를 계기로 저 자신이 더 꿈꿔보고 더 뛰어들어봤으면 좋겠어요.”
더 꿈꿔보겠다는 말은 이제 막 무대에 오른 배우가 아니라 데뷔작 <렌트>부터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도전을 거듭해온 배우의 새 다짐이기에 더 귀하게 느껴졌다. 같은 영역에 오래 머물수록 변화를 감지하는 것도, 스스로 새로움을 찾아나서는 것도 어렵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무대에서 젠더프리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건 아닌 것 같아요. 리트머스종이에 물들 듯 조금씩 스며든 거죠. 하나둘 관객과 배우의 열망이 모이면서 그게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졌고, 저 역시 점점 더 깊이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게 좋아요. 갑작스럽지 않게,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쪽으로 차근히 잘 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여기서 배우의 역할은 부단히 스며드는 것일 테고요. 과거의 저보단 덜 두려워하면서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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