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때로는 자신이 게으르고, 비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명확하게 바라보는 거죠.”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눈으로 응시하는 일.
서강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오직 현재, 그리고 자신이다.


인터뷰 날을 기준으로 사흘 전, 전역 후 복귀작인 <언더커버 하이스쿨> 첫 화가 공개됐죠. 4년의 공백기를 지나 오랜만에 현장을 찾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어요?
첫 촬영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요. 현장의 모든 풍경을 하나씩 뜯어보면서 전부 눈에 담으려고 했거든요. 오디오 팀이 무거운 촬영 장비를 끌고 지나가는데, 그 삭막한 쇳덩이들을 보면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거예요. 그런 게 너무 그리웠어요. 현장에 대한 감사함을 이렇게 가슴 깊이 느낀 적이 있었나 싶더라고요.
작년 여름부터 촬영한 작품이라 들었어요. 이렇게 오랜 기간 품고 지낸 작품을 세상에 내보내는 순간에는 어떤 마음이 들어요?
매번 떨리는데, 작품이 공개된 후에는 반응이나 평가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으려는 편이에요. 촬영이 지난주에 끝났는데, 제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고 봐요. 작품을 어떻게 봐주실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죠. 저는 작품이 공개돼도 제 모습을 다시 들여다보지 않아요. 못 보겠더라고요.
어째서요?
단점이 잘 보여서요. 그걸 고치고 싶지 않아서 안 보는 것도 있어요. 예전에는 종종 모니터링을 했는데, 단점을 보완하려고 하니까 제 연기가 어떤 틀에 갇히게 되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재미가 없어지고요. 그때부터 모난 건 모난 대로 남겨두고, 차라리 다른 부분을 발전시켜서 인물을 풍요롭게 만들어보자 싶었어요. 정말 완벽하게 연기하는 배우들이 있잖아요. 그런 연기를 보면 잘한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제가 추구하는 방식은 아닌 것 같아요. 사람들도 보면 누구나 다 저마다의 결점이 있잖아요. 어딘가 어수룩해 보이기도 하고, 텅 비어 보이기도 하고요. 배우가 가진 결점이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게 매력적인 것 같아요. 제 연기에도 그런 흔적을 남겨두고 싶고요.
여러 인터뷰에서 ‘사람 같은’ 면을 가진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고 말해온 것과 연결되는 이야기 같아요. 어떤 인물을 볼 때 사람 같다고 느껴요?
한두 가지 색깔로 정의되지 않는 인물들이요. 보통 누군가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한두 가지 단어로 설명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단면적이지 않죠. 우리가 상황에 따라, 관계에 따라 상대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미묘하게 다르듯이, 인물도 특정한 하나의 성격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다양한 결을 가진 인물에게 흥미를 느껴요.
한 인물을 사람처럼 만들어내기 위해, 무엇부터 시작해요?
인물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상상해요. 과거사를 토대로 인물을 수학적으로 설계해둔 작품이 많은데, 그 공식들을 버리고 이 캐릭터가 어떤 사람인지에 집중해보는 거예요. 과거사는 정보일 뿐이고, 그 자체로 캐릭터를 만들지는 못해요. 인물에 살을 붙여나갈 때, 저는 이 인물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떤지, 어떤 정서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를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요. 연기할 때 제 안에 있는 여러 면 중에서 그 캐릭터와 맞닿아 있는 부분을 꺼내 쓰는 편이라 그 과정에 서 제 가치관과 해석이 자연스럽게 투영되죠.
‘해성’은 서강준의 어떤 면을 꺼내 발전시킨 인물인가요?
해성이도 분명 제게서 출발한 인물인데, 평소의 제 모습을 토대로 발전시킨 건 아니에요.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닌 것 같아요. 해성이가, 히어로거든요. 사회의 부조리를 바로잡으려 고등학교에 잠입한 국정원 요원이에요. 활발하고 에너지 넘치는 성격인데 제가 느끼기엔 어딘가 모르게 둥둥 떠다니는 친구 같았어요. 갈 곳이 없어서 외로운 순간이 많은. 극 중에 해성이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많지 않은데, 반 친구들이랑 함께 있을 때 그런 모습이 언뜻언뜻 비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연기했어요.
해성을 연기하면서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점도 있어요?
제가 어떤 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인지를 다시 한번 알게 됐어요. 해성이는 세상이 그저 아름답다고 믿지도 않고, 그렇다고 마냥 비관하지도 않아요. 추악한 것, 아름다운 것, 따뜻한 것, 차가운 것, 이 모든 게 어우러져 있는 게 세상이라고 믿는 사람이에요. 그런 점에서 저와 닮았고요.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벨티드 팬츠, 블랙 태슬 장식 로퍼 모두 Prada.
문득 고등학생 때의 서강준은 어떤 사람이었을지 궁금해요. 해성을 연기하면서 종종 그 시절을 떠올려보기도 했어요?
자주 떠올려봤어요. 저는… 그냥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두루두루 어울리기보다는, 친한 친구들이랑만 허물없이 지내는.
어떤 사람들을 곁에 뒀어요?
계산적이지 않은 사람이요. 그때부터 은연 중에 알았던 것 같아요. 이 사람이 나를 있는 그대로 대하는지. 저는 늘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그 사람의 이면이 궁금했거든요. 이 친구의 속마음은 뭘까, 나와 함께 있을 때 말고 집에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이 런 것들을 궁금해하고, 또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래서 많이 외로웠어요. 혼자만의 세상에 있는 것 같아서.
혼자 있는 시간에는 무엇에 골몰했어요? 어린 시절에 혼자서 무언가에 깊이 몰입했던 시간이 나중에 그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토대가 되어주기도 하잖아요.
사람을 탐닉했어요. 방금 말했듯이 사람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데 관심이 많았고, 그걸 탐구하는 데 소설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소설은 인물을 훔쳐보는 것 같거든요. 잘 쓰인 소설들은 지문에 인물의 속마음, 사소한 행동, 그 행동이 어떤 감정과 정서에서 비롯됐는지가 전부 담겨 있어요. 그런 흐름을 읽어가다 보면 인물이 구축되어가는 과정이 보이니까 연기에도 큰 도움이 돼요. 그래서 군대에서 틈날 때마다 소설로 인물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그때 읽은 소설 중에 지금 문득 떠오르는 작품을 꼽아본다면요?
카뮈의 <이방인>을 재미있게 읽었어요. 해성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면서 붙들고 있던 질문이 하나 있었거든요. 왜 이렇게까지 작전을 펼쳐가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하려는 거지? 돈이나 명예를 원하는 것도 아닌데, 무엇을 위해서? 이런 생각이 계속 맴돌았어요. 이때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 를 보면서 실마리를 얻었어요. 극 중에서 뫼르소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데도 끝까지 진실만을 이야기하거든요. 거짓을 말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데도요.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살아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결국 진 실만을 말하다 사형을 당해요. ‘왜 이렇게까지 했을까’라는 질문을 거듭하다가, 이어서 카뮈의 또 다른 작품 <반항하는 인간>까지 읽고 나니까 그 마음을 얼추 이해하게 됐어요.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나름의 해석을 가지고 책을 덮은 기억이 있어요.
어떤 해석이었는지 궁금해요. 뫼르소도, 해성이도 왜 그렇게까지 했던 걸까요?
반항하는 인간. 제목이 힌트예요. 카뮈의 작품에 ‘반항’이 키워드로 자주 등장하거든요. 여기서 반항은 단순한 반골 기질이 아니라,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려는 어떤 진실에 관한 거예요. 현실에서는 타인을 설득하려면 때때로 타협이 필요하잖아요. 신념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도 있고요. 그런데 타협하지 않고 진실만을 고집하는 마음 아래에는 모순된 세상을 향한 반항심이 깔려 있다고 봤어요. 부조리에 지고 싶지 않으니까, 맞서는 거죠.
결국 타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반항인 거네요.
그렇죠. 자기만 아는 거 죠. 그 부분에 큰 감명을 받았어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내면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있는 거잖아요. 제 안에도 그런 게 있어요. 제3의 눈. 그래서 스스로에게 정직하려 노력해요. 그렇게 살아가고 싶고요.
하지만 매 순간 내면을 예민하게 살피고, 스스로에게 정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매 순간 진실된 삶을 살긴 힘들겠죠.(웃음) 소설은 어디까지나 이상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현실을 살아갈 때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때로는 자신이 게으르고, 비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에,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명확하게 바라보는 거죠. 나는 이렇게 생긴 사람이구나, 하고요. 그래서 저는 저한테 바라거나 기대하는 모습이 없어요. 삶에서 그리는 이상도 없고요.
이상이 없다는 건 지금에 온전히 집중한다는 이야기로도 들려요. 평소 연기에 대해 말할 때도 먼 미래가 아닌 현재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늘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할까요?
현재가 곧 과거가 되잖아요. 그렇다면 가장 중요한 건 지금 아닐까요?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는 건 현재인데 다른 곳을 바라볼 이유가 없는 것 같아요. 오늘을 후회 없이 살면 그게 곧 후회 없는 과거가 되고, 다가올 미래도 그렇게 되겠죠. 그래서 저는 현재에만 충실해요.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다 보니 삶에서도 크게 후회되는 게 없고요.
지나온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때는 없어요?
아쉬운 과거는 있죠. 예를 들어 작품이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하면 당연히 아쉬워요. 그런데 그때의 제게는 그게 최선이었던 거예요. 작품을 선택하고, 연기하는 모든 과정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죠. 아쉬울 수는 있어도 후회는 안 해요.

블랙 웨스턴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연기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태도 같아요. 연기를 사람에 비유해 보면, 그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을 어떤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애증이죠. 꼴도 보기 싫다가도, 너무나 큰 행복을 가져다주니까. 백번 힘들어도 한 번 찾아오는 그 행복이 너무 커요. 힘들게 해요, 저를.(웃음)
그 힘듦이 계속 연기해나가는 동력이 되어주기도 하죠?
그럼요. 오기가 생겨요. 은연중에 기대도 품게 되고요. ‘이걸 이겨내면 뭐가 찾아올까, 성장하는 길로 가는 계단 하나가 더 생길까’ 하는 기대요. 20대를 돌아보면 그런 계단을 계속 만났고, 그때마다 조금씩 성장해왔어요. 성장을 하려면 항상 고통스러워야 했고요. 한창 청춘일 때 치열하게 좌절하고 절망했던 순간들은 지나고 보면 아름답지만 당시엔 지옥 같잖아요. 꼭 지나야 아는 것 같아요. 그런 시기를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고통이 찾아오면 오히려 반갑기도 해요. ‘내가 성장하려나 보다, 한 꺼풀 벗으려나 보다’ 하고요.
그 애증의 상대와 앞으로 어떤 관계를 만들어나가고 싶어요?
할 수 있는 만큼 지지고 볶다가, 진절머리 날 때 떠날래요.(웃음) 밥 먹는 것조차 더는 보고 싶지 않을 때.(웃음) 그러니까 지금은 모든 걸 쏟아부어야죠. 싸우고 싶을 때 싸우고, 사랑하고 싶을 때 계속 사랑하고. 끝까지 불태우고, 다 타서 재만 남으면 미련 없이 이별해야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네. 확고하게요. 그래서 과정이 중요한 것 같아요. 연기하는 과정에서 얼마만큼 태우고, 고민해보고, 고통스러워하고, 행복해봤는지가 관건인 것 같아요.
지금 그 과정을 어떤 마음으로 지나고 있는 것 같아요?
글쎄요. 막 들이받고 있는데.(웃음) 정말 잘하고 싶어요. 동경하는 배우들이 하는 연기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 때까지 스스로를 계속 채찍질하고 싶어요.
한 인터뷰에서 ‘연기는 삶의 목표라기보다는 젊은 날의 꿈’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젊은 날의 꿈’이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어요?
연기가 제 인생의 일부분이라는 의미예요.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전부가 아닌 일부. 배우가 되려고 태어난 건 아니니까요. 오늘의 제가 온 마음을 쏟아붓고 있는 대상이지만, 언젠가는 시선이 완전히 다른 곳을 향해 있을 수도 있어요. 그게 베이커리에 있는 빵일 수도 있죠. 모르는 거예요.(웃음)
연기의 세계에 머무는 동안 꼭 시도해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언젠가 즉흥극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요. 설정과 상황, 관계만 있고 대본은 없는 극이요. 그 순간의 진심만을 담은 연기를 해보고 싶고, 그때는 연기하는 제 모습을 한번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