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밥을 먹고, 마주 보며 웃고, 당신으로 인해 변화하는 것. 배우 강하늘과 고민시가 서로의 온도를 나누던 날들.


고민시 블랙 니트 톱과 블랙 스커트 모두 Jil Sander.


고민시 베이지 코트 Lemaire, 화이트 원피스 Philosophy di Lorenzo Serafini, 슈즈 Khaite.


고민시 블랙 스커트 YCH, 콰트로 클래식 라지 튜브 네크리스, 콰트로 클래식 다이아몬드 스몰 링 모두 Boucheron, 블랙 니트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강하늘

촬영하는 내내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현장을 맴돌던데요. 평상시에도 이런 텐션인 거죠?(웃음)
그랬나요?(웃음) 제가 워낙 장난치는 걸 좋아하거든요. 웃음도 많은 편이고요. 오늘 화보처럼 여러 사람이 소중한 시간을 내어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잠깐이라도 저와 함께하는 동안 웃을 수 있었으면 해요. 언제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고민시 배우와 캠코더로 서로를 촬영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당신의 맛> 촬영장 분위기가 자연스레 그려졌어요.
6개월 정도 함께 촬영했으니 꽤 긴 시간이죠. 그동안 매일 얼굴을 보다 보니 친구처럼 가까워졌어요. 물론 처음부터 이렇게 가까웠던 건 아니에요. 초반에는 민시 씨가 집중하는 데 혹여 방해될까 싶어 옆에서 혼자서 장난을 치면서 놀았거든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다 보다 결국 민시 씨도 웃음을 터뜨리더라고요. 이런 현장은 처음이라면서.(웃음)
예상한 대로네요.(웃음) 지금 문득 현장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어요?
다 같이 웃고 떠들던 모습이나 복작복작한 현장 분위기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신기한 게, 돌이켜보면 어떤 작품이든 카메라 앞에서 제가 연기한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보다는 어떤 장면을 준비하다가 누군가에게 장난을 치거나, 작은 실수에 다 같이 웃음이 터졌던 순간들이 더 생생하게 남아요. 그런 에너지가 완성된 작품 안에도 분명히 녹아든다고 믿어요. 그래서 웃음이 있는 현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요.
함께하는 사람들과 한마음으로 그 순간을 즐길 때 나오는 에너지가 있죠. 두 배우가 현장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주로 나눴나요?
연기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서로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눴어요. 휴일에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최근에 어떤 대본을 흥미롭게 읽었는지. 왜냐하면 민시 씨가 연기를 워낙 잘하잖아요. 연기에 관해서는 굳이 덧붙일 말이 없었어요. 말하지 않아도 호흡이 딱딱 맞았고요. 제가 ‘아’라고 하면 ‘어’라고 맞받아쳐주는 느낌?(웃음) 그래서 내내 기분 좋게 촬영했어요. 제 역할에만 충실하면 극 안에서 두 인물 사이의 케미스트리는 자연스럽게 그려지겠다 싶었죠. 그리고 민시 씨의 연기에는 어딘가 전형적이지 않은, 독특한 매력이 있어요. 그래서 저도 평소보다 날것에 가까운 연기를 하게 되더라고요. 흥미로운 경험이었어요.
5월 12일, <당신의 맛> 첫 화가 공개되죠. 처음 대본을 읽고 어떤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나요?
제가 연기한 ‘범우’라는 인물이 저와 닮은 구석이 많다고 느꼈어요. 제가 음식 자체에 큰 관심이 없는데, 범우도 그래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운영하면서 맛에는 일절 호기심이 없고, ‘이걸 어떻게 하면 더 매력적으로 포장해서 판매할까’ 이런 것에만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에요. 그 반면에 민시 씨가 연기한 ‘연주’는 요리든 사람이든 늘 진심을 다하는 인물이고요. 음식을 돈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과 맛에 누구보다도 진심인 사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는 이야기라는 점도 흥미롭게 다가왔어요.
범우는 연주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 변해가나요?
점점 사람다워져요. 큰돈 앞에서는 진심이나 정 같은 건 전부 의미 없다고 생각하던 인물이 진심이란 것을 조금씩 배워가죠. 결국 <당신의 맛>은 ‘인정’에 관한 이야기예요. 타인과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작품이고요. 촬영을 마치고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더욱 선명하게 느끼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당신의 맛>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어떤 맛을 지닌 작품이라 소개할 수 있을까요?(웃음)
음… 파네 파스타?(웃음) 처음 먹을 때는 몰랐는데, 안에 든 스파게티만 먹는 게 아니라 겉에 있는 빵까지 함께 먹는 거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빵도 같이 먹으니까 어? 더 맛있는 거예요.(웃음) <당신의 맛>이 그런 드라마인 것 같아요. 요리를 소재로 한 작품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접근하기 좋은데, 그 안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와 온정에 관한 이야기까지 어우러진 작품이에요. 더 멋들어지게 표현하고 싶은데 어렵네요.(웃음)
파네 파스타,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공개를 앞두고 기대하는 장면이 있다면요?
드라마 초반에 범우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시퀀스가 있어요. 이 장면 이후부터 두 사람이 만나면서 본격적인 에피소드가 펼쳐지거든요. 범우가 전주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연주의 레시피를 빼돌리려고 서울에서 전주까지 굳이 내려가는데, 이런 범우의 행동이 개연성 있게 느껴지도록 각별히 신경 썼어요. 자칫 공감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느꼈거든요. 서울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구태여 전주까지 내려가서 버틴다는 게.(웃음) 이 장면을 시작으로 엔딩까지 달려야 하니까, 시청자들에게 이 장면이 설득력 있게 느껴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첫 방송을 기다리는 중이에요.


굳이 한 행동 덕분에 두 인물의 인연이 시작되는 거네요. 범우처럼 ‘굳이’ 무언가 해본 적 있어요?
엄청 많아요, 엄청.(웃음) 어쩌면 제 삶의 방식 자체를 이 단어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요, 삶을 아름답게 살아가려면 낭만과 동심, 이 두 가지는 무조건 있어야 한다고 봐요. 어디선가 들은 말인데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 불편할 수도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낭만이래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택시를 타고 한 번에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굳이 걸어가면서 바람도 맞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도 보고,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 그런 게 낭만인 것 같아요. 그런 마음가짐이 하루하루를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믿고요.
낭만을 지키려는 마음가짐 덕에 얻은 깨달음도 있나요?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됐어요. 낭만이라는 게 결국 머릿속으로만 그려서는 의미가 없고, 실제로 몸을 움직여서 해봐야 실현할 수 있거든요. 독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아무리 인상 깊게 읽은 작품이라도 책장을 덮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버리면, 제대로 읽은 게 아니라 생각해요. 좋은 구절이나 표현을 내 삶에, 내 하루에 녹여내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 거죠. 제가 애니메이션을 참 좋아하거든요. 어떤 좋은 작품을 보고 나서 ‘이건 픽션이니까 가능하지’ 하고 넘겨버리는 게 아니라, 실제로 해보는 거예요. 거기에서부터 삶의 변화가 시작된다고 믿어요.
공감해요. 하지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실제로 어떤 작품에서 만난 구절이나 장면을 삶에 적용해보기도 했나요?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패왕색 패기’라는 기술이 등장해요. 일종의 아우라인데,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이 압도적으로 거대해서 별다른 무기 없이도 적들이 픽픽 쓰러지는 거예요. 저는 이 패왕색 패기를 믿어요. 작품에서는 이 패기가 모두의 내면에 잠재된 힘으로 그려지거든요.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하거나, 단련을 통해 이끌어내지 못하는 거죠. 이 기술을 사용하려면 자신의 세포 하나까지 믿어야 해요. 이 장면을 본 뒤로 삶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기 시작했어요. 내가 나를 온전하게 믿으면 어떤 강렬한 에너지가 바깥으로 뿜어져나갈 거라는 확신을 가지면서요.
패왕색 패기…!(웃음) 느껴집니다. 그런 에너지. 이런 마음가짐이 오랜 시간 연기의 세계에 머무는 동력이 되어주기도 했겠죠?
그런 것 같아요. 저를 움직이게 한 동력에 대해, 지나온 과거에 대해 깊이 골몰하는 편이 아니라 조심스럽긴 하지만요. 벌써 데뷔한지 18년이나 됐다는 사실도, 그간 참여한 영화가 스물두 편이라는 것도 누군가 이야기해줘서 알았어요. 그럼에도 생각해보면 작품에 임하는 그 순간에만 온전히 집중했기 때문에 꾸준히 연기하는 삶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에서는 ‘용식’의 삶에 집중했고, <청년경찰>을 찍을 땐 ‘희열’의 삶에 몰입했죠. 항상 같은 마음이었어요.
그렇게 긴 시간, 배우로서 한결같이 지켜온 마음가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저는 연기를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의 수단으로 삼지 않아요. 그보다는 대본이 재미있으면 무조건 해요. 재미있게 읽은 대본을 ‘맛있게’ 연기해서 관객에게 소개하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배우의 역할이에요. <당신의 맛> 때문에 쓰는 표현이 아니라, 이 표현을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요.(웃음)
문득 묻고 싶어요. 본인의 연기에서는 어떤 맛이 느껴지길 바라요?
저, 청포묵이요.(웃음) 청포묵이 별다른 맛은 없거든요? (먹는 시늉을 하며) 그런데 다 먹으면 꼭 한 접시를 더 먹게 돼요. 그게 맛있어서라기보다 먹고 나면 괜히 생각이 나서 “묵 하나만 더 주세요” 하게 되는 거거든요. 제 연기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는 않을 텐데, 가끔씩 생각나서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보고 나면 속이 편안한. 그런 연기를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계속.

고민시 화이트 원피스 Philosophy di Lorenzo Serafini.


고민시 콰트로 클래식 다이아몬드 라지 링 Boucheron, 블랙 니트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고민시 콰트로 클래식 라지 튜브 네크리스, 콰트로 클래식 다이아몬드 라지 링 모두 Boucheron, 블랙 니트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고민시

고민시 블랙 니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드라마 <당신의 맛>이 고민시 배우의 첫 로맨틱 코미디 작품이더라고요. 맞아요. 늘 코미디와 사랑 연기가 가장 어렵다고 느꼈거든요. 어떤 최고 경지랄까요….(웃음) 이걸 잘해야 진짜 멋진 배우라 생각했어요. 20대 땐 자신도 없고 망설임이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젠 내가 사랑할 때의 모습도 작품에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코미디 장르니까 이번엔 재미있게 즐기면서 하자는 마음으로 선택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해야 하더라고요?(일동 웃음) 덕분에 많이 배웠죠.
전주에서 원 테이블 식당을 운영하는 셰프 ‘모연주’ 역을 맡았어요. 칼질부터 요리까지 무수한 배움의 여정이 있었을 텐데요.
맞아요. 사실 제가 요리에 흥미가 있는 편은 아니거든요. 오히려 설거지는 잘할 수 있지만요. 요리를 배우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어요. 그리고 전주 사투리가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충남과 전북 사이, 전주 사투리만의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 많이 연습했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을 때도 요리나 사투리를 배우는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걸 알았을 것 같아요. 그럼에도 <당신의 맛>이라는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어요?
일단 시나리오가 따뜻했어요. <당신의 맛> 전에는 피만 나오는,(웃음) 장르물을 많이 했거든요. 작가님 글에 담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순수함을 느끼기도 했고요. 시청자분들께 이 이야기가 닿았을 때도 저와 비슷하게 느끼실 거라 생각했죠.
장르물에서 극적인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따뜻한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힘도 분명히 있잖아요. 작품 안에서 그 따스함을 느끼기도 했나요?
너무요. <당신의 맛>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저를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느꼈다는 건 저도 그 따뜻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현장에 들어가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따스했어요. 모난 사람이 한 명도 없고,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을 다들 사랑했고요. 솔직히 마지막 촬영 날에 개운할 줄 알았거든요. ‘힘든 거 다 끝났다! 이제 됐다!’(웃음) 이럴 줄 알았는데, 다들 슬퍼서 눈가가 촉촉해지더라고요. 서로 헤어지고 싶어 하지 않았고요.
지금 문득 생각나는 현장의 장면이 있어요?
아… 우선 생각만 해도 웃겨요.(웃음) 촬영할 때마다 너무 웃어서 아직도 귓가에 웃음소리가 맴돌 정도로요. 가장 먼저 그렇게 다함께 웃었던 장면이 떠올라요. (강)하늘 오빠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큰 역할을 했고, (김)신록 선배님이나 (유)수빈 오빠도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들이거든요. 저는 그 현장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그리고 테스트 촬영 날과 마지막 세트장 촬영 날, 그 처음과 끝이 교차되며 떠올라요. 첫 테스트 촬영 때는 저랑 하늘 오빠가 너무 어색해서 웃음이 터졌는데, 마지막 촬영 때는 눈빛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바로 알겠더라고요.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현장의 공기를 온전히 느끼고 있었어요. 온기를 나눌 수 있는 가족이 된 것 같았고요.
현장에 위로받는 따뜻한 경험이었겠어요. <당신의 맛> 속 연주의 캐릭터 설명에는 ‘똥고집’이라는 표현이 있어요. 연주를 연기하며 ‘고집스러움’에 대해 생각해봤나요?
저도 한고집 하는 편이라…(일동 웃음) 연주에게 공감할 수 있었어요. 연주는 맛에 대해 자신만의 철학이 있거든요. 재료를 구하는 일부터 요리해 맛을 내는 모든 과정에 진심을 다해요. 돈이나 명예보단 오직 맛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고요. 제게도 비슷한 면이 있거든요. 작품의 메시지가 저를 강렬하게 끌어당기면 잃는 것이 있더라도 작품을 믿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편이에요. 그 반대로 고집 때문에 연주에게 생기는 문제도 있는데, 주변 인물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과정이 인상적이었어요.
극 중 연주처럼 타인에 의해 나의 생각이 변화한 경험도 있나요?
연기에 대한 제 고집을 생각하면 단단한 근육만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해요. 그래서 유연함이 필요한데, 저 역시 주변 사람들이 그걸 많이 채워준 것 같아요.
어떤 방식으로 타인이 유연함을 채워주던가요?
스스로 옳다는 확신이 들면 그 결정을 행하는 과정에서는 타인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하려 해요. 그럴 때 더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작품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무조건 현장을 믿거든요. 작품에 대한 믿음이 선행한다면 현장에서는 내 생각을 내려둔 채 모든 걸 열어두고 유연하게 바라보려 해요. 그러지 않으면 앙상블을 이루기 어렵더라고요. ‘이 정도면 되려나’ 싶은 순간에도 제 부족한 부분을 다른 배우나 스태프들이 채워줄 때가 많으니까요. 그게 제가 현장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하나의 결과물을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합친다는 게 아름답잖아요.
내 선택 앞에서는 확고할지라도 그걸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유연한 태도를 유지하는 거네요. 고민시 배우의 이름에 담긴 뜻에 대해서도 묻고 싶어요. 예담 고민시, ‘너무 올라가지도, 너무 내려가지도 말고 항상 평평하게 나아가라’라는 멋진 뜻을 가지고 있어요. 스스로의 중심을 잡는 나만의 방법도 있나요?
어떤 방법을 찾았다기보단 언제부터인가 저 스스로 세상을 평평하게 받아들이고 있더라고요.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어요. 아주 기쁜 상황도 만끽하지 못하고 ‘그냥… 뭐, 좋아!’ 이렇게 덤덤하게 받아들여요. 슬픈 일이 생겨도 ‘또 좋은 일이 오겠지. 기다려보자’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반대로 ‘이 슬픔 더 느껴. 내 스펙트럼에 다 넣어.(웃음)’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도 있어요. 한편으로는 비슷한 감정이나 경험이 레이어처럼 쌓여서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자연스럽게 덤덤해지는 거죠. 근데 이게 너무 슬퍼요. 왜냐하면 그 동심을, 날것의 마음을 절대 잃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내 안에 잘 담으려 해요.
내가 마주하는 모든 감정을 연기의 재료로 수집하는 거네요.
맞아요. 어떤 면에서는 이 일이 일종의 수행 같아요.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연기는 대본이라는 좋은 아이디어를 내 몸을 통해 사람들에게 번역해주는 거라고요. 그래서 그 감정을 최대한 잘 번역해 표현할 방법을 계속 찾고 있어요. 결국 내가 삶 속에서 느끼는 모든 감정, 새로 마주한 경험을 원료 삼아 연기하며 수행하는 일의 반복 같아요.
배우가 번역기 역할을 한다면 좋은 번역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상태를 유지해야 할까요?
체력이 가장 중요해요. 그래야 수행도 잘할 수 있거든요. 몸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지치거나 피곤할 땐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감정을 느끼는 일에 무뎌지더라고요. 그래서 운동도 계속 열심히 하고 있어요. 나라는 번역기가 낡지 않도록 계속 돌봐주는 거죠.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모완일 감독은 고민시 배우를 두고 이렇게 말했어요. “타고난 재능인 줄 알았는데 그 뒤에 치열하게 쏟아붓는 노력이 있었다. 그가 보여주는 모든 것은 끝까지 애쓰고 긴장한 결과였다.”
그렇게 해야 나올까 말까 하거든요.(웃음) 늘 그런 태도로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한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당신의 맛> 촬영은 완전히 달랐어요. 처음에는 비슷한 자세로 임했는데, 현장에 가보니 여기선 무언가를 계산하거나 절대적으로 정한 뒤 연기해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요리를 다루는 작품이라 음식이 주가 되는 순간이 있어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할 때가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를 온전히 열어두고 모든 걸 다 받아들였어요. 예전에는 어느 정도 계산한 뒤에 현장에 가서 틀은 그대로 두되, 깊이 생각했던 걸 날리고 현장에 맡겼거든요. 이번에는 틀도 만들지 않고 모조리 수용했어요. 그때의 본능적 감각에 모든 걸 맡겼죠.
그 또한 새로운 도전이었네요.
맞아요. 앞으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저도 궁금해요. 이 모든 과정이 다 제 원료로 쓰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밀수>의 ‘옥분’이나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성아’ 등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봐도 도전적인 역할이 많았어요. 미지의 영역 앞에서 고민시 배우는 어떤 사람이 되는지도 궁금해요.
2년 전, 스카이다이빙을 할 때가 떠올라요. 헬기를 타고 올라갈 때 아주 짧은 찰나의 설렘이 자그맣게 존재하고, 나머지는 두려움과 후회가…(웃음) 저를 압도했어요. ‘이걸 왜 한다고 했지? 돈 내고 목숨 걸고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이런 생각에 똘똘 뭉쳐 있었죠. 뛰기 직전에도 ‘아! 진짜! 어떡해, 어떡해!’를 연발하다가, 뛰어내리기 0.1초 전에 ‘아, 몰라. 던져!’ 하고 하늘로 몸을 내던졌거든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하늘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저를 온전히 맡긴 거죠. 그러자 제 앞으로 광활한 대자연이 펼쳐지더라고요. 울컥하면서… 제가 아주 작은 존재임을 깨달았어요. 그런데 연기도 비슷해요. 사실 매 순간 두렵고 어렵거든요. ‘이 작품 왜 한다고 했지? 이렇게 고생하는 거 다시는 안 하기로 해놓고!’(웃음) 이렇게 오만가지 생각이 들다가도 연기를 하며 찰나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때마다 생각해요. ‘맞아. 나 이래서 연기하지’. 연기에도 그런 순간의 설렘이 분명 존재해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하기에 더 소중하고요.
미지의 영역에 날 내던지는, 짧은 카타르시스의 순간이 어려움을 딛고 계속 연기할 동력이 되어주는 거겠죠?
맞아요. 카메라 앞에서 누군가가 되어 연기할 때, 저는 가장 자유로워요. 날 둘러싼 환경에 모든 걸 맡긴 채 연기하는 순간만큼 자유로운 때가 또 없더
라고요. 사실 인간 고민시의 삶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하거든요. 일 끝나고 집에 갔다가 또다시 일하러 가는 루틴의 반복이니까요. 다들 그렇듯 내 솔직한 마음을 적나라하게 모두 표현하지도 못하고요. 하지만 작품 속으로, 그 인물의 시간으로 깊이 들어가면 저는 한없이 자유로울 수 있어요. 그게 정말, 정말 좋아요.




고민시 | 블랙 니트 톱, 스커트, 샌들 모두 Jil Sander, 실버 이어링 Tom 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