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바람, 나무와 풀잎을 감각하며. 오롯이 나로 자유로이 누빈 김도연의 어느 날.

사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사유할 수 있을 때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자유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평범한 상황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사유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촬영을 다 마쳤으니, 이 화보가 만들어지기까지 거친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요?
좋아요. 좀 새롭고 도전적인 과정이 있었죠.(웃음)
‘배우의 내면에 부유하는 생각들을 화보로 형상화해보자’는 기획이 출발점이었고, 그래서 시작 단계부터 함께 고민하며 시안을 완성해나갔죠. 첫 미팅 때, 아주 조심스럽게 “제가 이 과정에 함께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었던 거 기억나요?
그럼요. 화보를 찍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을 때 ‘그럼 뭘 하면 좋지? 새로운 걸 해보자. 그간 해온 거 말고’ 이런 고민을 하다가 ‘내가 요즘 하고 있는 생각들을 담아보면 어떨까’ 싶어서 아이디어를 내긴 했는데… 걱정이 많았어요. 그날도 얘기했듯이 제가 진행 과정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제안한 건 아닌가 싶었거든요. 말만 던지고 결국 해결해야 하는 부담은 에디터와 사진가에게 떠안기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고요. 그렇다고 지나치게 개입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는 터라….
다행히 산으로 가지 않고 모두가 즐겁게 마지막 컷까지 당도할 수 있었 죠.(웃음)
미팅 하면서 얘기를 많이 나눈 덕분인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서로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들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것에 가까운 결과를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아까 헤어 메이크업 실장님과도 얘기했는데, 결국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애써 찾아 나서지 않아도 계속 어떤 생각을 하다 보면 그에 부합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도 나와 통하는 지점을 발견하게 되는 어떤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리를 만나게 한, 배우가 요즘 하는 생각이자 이번 화보의 주제가 있죠. ‘자유, 욕망, 고통’. 언제부터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인가요?
돌이켜 보면 4~5년 전부터 민감하게 반응해온 주제이긴 한데, 본격적으로 사유하게 된 건 1년 정도 됐어요. 연기는 불안하잖아요. 잘하고 싶은데 확실한 정답은 없다는 점에서요. 제가 그 불안에서 비롯된 계획과 계산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연기할 때 저를 굳게 만든다는 걸 느꼈죠. 그때부터 이성적으로 판단하려 하기보다 감각을 열어두는 방식을 탐구했고, 그중 하나로 문학을 많이 접했어요.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몸으로 감각한다는 걸 느끼게 해준 작품이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예요.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게 자유와 고통, 욕망이었고요. 신기하게 직후에 오디션을 본 작품의 대본에 비슷한 감각들이 있었어요.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는 욕망들이 있었고, 고통받는 상황도 있었죠. 그걸 읽을 때 엄청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자유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숨이 좀 쉬어지는 경험을 한 거죠. 그러면서 ‘아 내가 추상적인 감각에 갈증이 있구나, 마음이 움직이는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언제 자유로움을 느끼나요?
자유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감각하기 전과 후가 다를 것 같은데요. 어떤 기준을 세워 말해야 하는지부터 고민되는데요. 음… 최근에 연극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에 출연하면서 느낀 점이 있어요. 그 안에 너무나 당연해서 억압돼 있는지도 모르던 자유를 인식하게 하고, 주어진 틀 밖을 상상하게 만드는 말이 나오거든요. 그렇게 틀이나 경계를 인식하고 벗어났을 때 드는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은 틀 안에 갇혀 있는 게 편하고 안정적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상황에서 박차고 나가려는 에너지가 더 강한 사람이에요. 또 다른 관점에서 느끼는 자유도 있어요. 꼭 거창하고 호기롭게 도전하지 않더라도, 사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사유할 수 있을 때도 충분 히 얻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자유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평범한 상황이라 말할 수도 있지만, 사유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다 는 사실 자체가 자유를 누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저도 <화이트래빗 레드래빗>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연극은 어땠어요? 감독도 리허설도 없이, 배우가 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홀로 무대에 오른 뒤에야 처음으로 대본을 보고,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바로 시작되는 실험극이라 관객으로서도 무척 긴장하면서 볼 수밖에 없었어요. 특히 대본이 든 봉투를 열 때, 나도 이렇게 긴장되는데 배우는 어떨까 싶던데요.(웃음)
진짜요?(웃음) 저도 엄청 떨렸어요. 그런데 두려움은 없었어요. 예측할 수 없는 데서 오는 긴장감은 있었지만, 그 긴장에 억눌리거나 압도당하진 않았죠. 대사의 첫 줄을 읽는 순간 시작되는 이야기에 10여 년 전 이 글을 쓰는 작가와 2025년 지금의 우리가 만나는 경험이 담겨 있잖아요. 그 통로에 제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신비로웠어요.
연극을 마치고 나선 어떤 감상이 남았나요?
끝나고 계속 ‘하길 잘했다, 너무 좋다’ 하고 생각했어요. 이 연극을 하고 나서 저라는 사람은 지금 불확실성에서 오는 즐거움이 두려움보다 더 크다는 걸 깨달았어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달까요. (잠시 말을 멈추고 지난 시간을 복기하다 불현듯 웃음을 터뜨리며) 실은 연극을 하기 전에 아빠랑 약간 다툼이 있었어요. 아빠도 제가 잘했으면 좋겠는데, 불안하고 걱정이 되신 거죠. 전화하셔서 “도연아, 네가 무대에서 어떤 식으로 사람들에게 얘기할지 미리 정리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셨는데, 그때 제가 좀 짜증을 냈어요.(웃음) 연극이 끝난 뒤 얘기를 잘 나누긴 했는데, 제 생각은 이런 거였어요. 그간 부모님의 영향 아래 살아오던 나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걸 바탕으로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나로 살고자 새롭게 시작했는데, 아빠의 그 말이 다시 저를 안정적인 틀 안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 같았던 거죠. 아무튼 이런 식으로 요즘 저는 계속 불확실함 속으로 들어가보려 하는데, 이번 연극이 큰 동력이 되어준 것 같아요. 실패할지라도 그 실패를 겪어내고 싶은 저에게 꼭 필요한 경험이었어요.
연극을 보면서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어요.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무대에 오른 모습이 내내 마음에 남았거든요. 왜 맨발을 선택한 건가요?
어떤 대본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몸이 좀 편안해야 잘 받아들일 수 있 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가볍고 편한 옷을 택했죠. 신발을 신지 않은 것도 발바닥을 무대에 착 붙여두어야 빨리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확실히 발이 무대에 직접 닿으니까 금방 적응하고 좋더라고요.



지금은 답을 내리고 싶지 않아요. 어디로든 열려 있는,
유연하고 여백이 있는 상태가 좋아요. 길을 좀 열어둬야 뭔가가 오고 갈 수 있으니까요.
그럼 오늘의 맨발은 어떤 의미의 선택이었어요? 첫 컷을 찍을 때 신발은 안 신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냈어요. 그렇게 맨발로 나무에 오르고, 풀밭도 뛰어다녔죠.
신발을 신는 게 뭔가 이질감이 들었어요. 풀밭에서 힐을 신고 서 있는 게 다른 때라면 몰라도 오늘 우리가 생각한 주제 안에서는 일종의 제약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죠. 맨발이 된 덕분에 자유롭게 이곳을 누빈 것 같아요.
지난 3월에 마친 <애나엑스>에 이어 <화이트래빗 레드래빗>까지, 두 편의 연극에 도전하며 발견한 건 무엇인가요?
한동안 나를 계속 의심했어요. 내가 틀릴 수도 있다, 겸손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자기 확신이 없어지는 거예요. 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보니 저라는 사람까지 흔들린 거죠. 그러다 ‘아,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때부터 조금은 나를 믿을 필요가 있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연극에 도전한 것 같아요. 저로서는 엄청난 도전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하고 나니 어떻게든 해낼 걸 나는 알고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나를 믿기 위한 선택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미 나를 믿고 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던 거죠.
엄청난 도전이라 여기던 일이 결국은 내게 올, 나의 것이었다는 걸 깨달은 거군요.
지금 돌이켜보면 작정하고 대단한 선택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우리가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된 것처럼, 연극도 그때의 저에게 자연스럽게 다가온 게 아닌가 싶어요. 처음부터 ‘연극을 해야지!’ 작정한 게 아니라, 자신에 대한 믿음에 골몰하던 시기에 연극이라는 기회가 주어진 거죠.
그때그때 나에게 오는 것들에 크게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는 말로도 들 리네요.
맞아요. 제가 삶을 그렇게 사는 것 같아요. 어떤 생각을 계속 하면 결국은 그 방향대로 가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요. 결국 만나야 하는 건 다 만나지고, 힘든 일도 때마침 그 시기를 지나는 나에게 필요한 힘듦이라 생각하는 편이에요.
일상은 어떻게 꾸리는지 궁금해지네요. 일상에서도 자연스럽게 보이는 것, 다가오는 것을 마주하는 편인가요?
오히려 일상은 계획하고 통제하는 편이에요. 제 일상은 영화 보러 가고, 책 읽고, 영어 수업 듣고, 운동하고… 이렇게 저를 발전시키는 일로 채워져 있어요.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별로 없어요.(웃음) 그 행위들이 저에게 만족감과 행복을 주고, 이 또한 쉬는 방식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좀 힘들어요, 하하.
어제도 그제도 영화를 봤다면서요. 며칠 전에는 무용 공연도 보고요. 진짜 쉴 틈이 없는 휴일인데요?(웃음)
특히 영화를 집착적으로 많이 보려 해요. 예전부터 저희 가족이 TV를 잘 안 보는 편이었거든요. 그래서 영상물을 보는 게 저한테는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배우를 시작한 이후로 이 일을 잘해내려면 일단 많이 봐야 한다, 거기서 얻는 게 분명히 있을 거다,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이후로 쉼 없이 영화관을 드나들고 있어요. 아직은 괜찮고, 무엇보다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지만, 이제는 온전히 쉬는 방법도 좀 찾아야 할 것 같아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는 시기를 보내는 중인 듯해요. 이 혼재된 생각이 더 확장되길 바라나요? 혹은 명확해지고 정돈되길 바라나요?
지금의 관심사를 찾기 전 10년 동안 저는 무조건 답을 내리는 데만 집중했어요. 일상에서도 일에서도 늘 완벽한 걸 만들고, 정답을 찾아서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 사람이었죠. 멘털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답을 내려야 심플해지니까요. 그런 삶을 살아온 터라 지금은 답을 내리고 싶지 않아요. 어디로든 열려 있는, 유연하고 여백이 있는 상태가 좋아요. 길을 좀 열어 둬야 뭔가가 오고 갈 수 있으니까요.
그 길에서 다음엔 무엇을 만나게 될까요? 마주하고 싶은 게 있나요?
현실적으로 말하면 일단 캐스팅이 되어야…(웃음) 모르겠어요. 그게 연기가 될 수도 있고, 지금과 완전히 다른 일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디로 갈지 장담할 수 없어요. 어쩌면 이런 상황을 가장 바란 건지도 모르겠어요.
미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으니, 그럼 지난 시간을 복기해볼까요. 오늘이 봄의 끝자락인 것 같은데요. 2025년의 봄을 생각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새로운 나를 만나서 짜릿했던 순간들이 떠올라요. 연극을 하면서, 오늘 화보를 함께 준비하면서, 또 봄에 본 책이나 영화를 통해서 전에는 몰랐던 나를 많이 발견했어요. 그럴 때가 있잖아요. 분명히 처음 보는 건데,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요. 나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나 싶은데 그게 왠지 아주 깊숙이 숨어 있던 나인 것 같은 거죠. 그런 발견의 기쁨이 많은 봄이었어요.
오늘이 그 귀한 봄의 한 조각이기를 바랍니다.
너무 좋았어요.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