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저만큼은 저를 믿고 싶어요.” 배우 정준원의 새로운 출발선 앞에서.

재킷 Dior.
반소매 셔츠와 쇼츠 모두 Loewe, 로퍼 Dr.Martens, 셔츠, 타이, 삭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 팬츠, 톱 모두 Recto, 브라운 로퍼 CamperLab, 안경 Oliver Peoples.

드라마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구도원’으로 뜨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어요.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이 계속 정준원 배우를 소환하던데요.(웃음) 변화를 실감하고 있나요?

세상이 절 속이는 느낌이에요.(웃음) 전 제 영상을 찾아서 보니까 알고리즘에 뜰 수밖에 없는데, 지인들 SNS에도 제가 계속 등장한다고 하더라고요. 온라인으로만 반응을 볼 땐 잘 몰랐는데, 실제로 여기저기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야 조금씩 실감이 났어요. 우리 작품에 많은 관심을 보내주시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에요.

2015년 영화 <조류인간>으로 시작해 <동주> <더 테이블> <독전> <탈주>, 드라마 <모범가족> 등 여러 작품에 단역, 조연, 주연을 넘나들며 참여해왔어요. 그러다 최근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을 통해 더 많은 대중에게 본격적으로 자신을 알리기 시작했고요. 이 작품이 더 특별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10년 동안 연기해왔지만, 이번 작품을 통해 새로운 출발선에 선 느낌이에요. 시작은 오래전에 했고 이제 다음 단계에 도달했다기보다는, 이제야 진짜 배우로서 첫발을 내디딘 거죠.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을 기점으로 앞으로도 배우로서 기록을 하나하나 쌓아 가고 싶어요.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구도원은 레지던트 1년 차 후배들을 품 넓게 이끄는 다정한 선배이자, 완벽한 일처리로 모두에게 신임받는 산부인과 에이스예요. 이 역할과 만나게 된 과정은 어땠어요?

네 번에 걸친 오디션 끝에 구도원을 만났어요. 보통 오디션을 볼 때, 나중에 다른 역할을 맡게 되더라도 주연 캐릭터의 대본을 줘요. 전 처음부터 구도원 역할의 대본을 받았는데요. 짧은 대본이라 상황이나 인물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구도원이 좋은 캐릭터라는 느낌은 분명히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맡게 될 거라고는 기대도 못 했어요.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땐,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기뻤고요.(웃음) 당시에 연기와 배역에 대한 갈증이 정말 컸거든요. 선택해주셔서 감사했죠.

네 번에 걸친 오디션 중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요?

세 번째 오디션에 참가하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쯤 ‘이 정도면 진짜 나를 쓰려나’ 하고 희망을 품기 시작했어요.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의사 가운을 사서 가져갔죠.(일동 웃음) 분위기 좋을 때 쓱 한번 입어보려 했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더라고요. 결국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안 입길 잘한 것 같아요. 나중에 너무 부끄러웠을 것 같아서.(웃음)

결국 의사 가운을 입은 구도원이 되었네요.(웃음) 스스로 구도원과 닮았다고 느끼는 부분도 있어요?

그렇다고 말하기엔 구도원이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웃음) 심지어 극의 중반부쯤에는 말도 안 될 정도로 선해서 판타지 속 인물 같다는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저는 그렇게까지 그릇이 크거나 성격이 유하지 못해요. 닮았다면… 부담을 주지 않는 인상이나 권위 없이 후배들을 대하는 모습 정도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 인물을 연기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무엇인가요?

목표는 하나였어요. 드라마가 끝난 뒤, 시청자들에게 ‘내 주변에도 구도원 같은 선배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요. 그 정도면 이 인물을 잘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1 직장 1 구도원 보급이 시급하다’는 반응이 수두룩하던데요.(웃음)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의 신원호 PD는 구도원을 두고 ‘진짜 어른’ 같은 캐릭터라고 말했어요. 정준원 배우가 생각하는 진짜 어른은 어떤 사람인가요?

제가 만났던 멋진 어른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의 공통점은 늘 상대에게 눈높이를 맞춰준다는 거예요. 전 원래 소심하고 겁이 많고 눈치도 엄청 봐요. 어릴 땐 더 심했어요. 윗사람과 눈을 마주쳤는데 ‘어디 한번 얘기해봐. 네가 해봤자지’ 하는 듯한, 나를 판단하는 시선을 느끼면 금세 움츠러들곤 했어요. 아직도 그 몸의 감각이 기억날 정도로요. 그 반대로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경험했을지라도, 같은 눈높이에서 편견 없이 들어주고,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먼저 나서서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런 선배들을 보며 멋진 어른이라고 생각했죠. 신원호 PD님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고요.

디스트로이드 진 Levi’s, 로퍼 Dr.Martens, 네크리스 Process, 재킷과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반소매 셔츠와 쇼츠 모두 Loewe, 로퍼 Dr.Martens, 셔츠와 타이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재킷, 니트 톱, 셔츠, 팬츠, 로퍼 모두 Bottega Veneta.

재킷, 팬츠, 스니커즈, 톱 모두 Dior, 네크리스 Process.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은 친구, 연인, 가족 등 관계를 다루는 인간적이고 따뜻한 성장 드라마잖아요. 따스한 이야기가 지닌 힘을 느끼기도 했나요?

현장에서 그 힘을 많이 느꼈어요. 드라마처럼 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였거든요. 불만이나 갈등이 드러나는 일도 거의 없었고요.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나도 그들과 닮고 싶어지기도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작품이 가진 따스함이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스며든 것 같았어요. 이런 현장과 동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요. 정이 많이 들어서 촬영이 끝난 뒤에는 한동안 허전하더라고요. 한 달 정도는 계속 ‘다시 촬영하러 가야 할 것 같은데’ 싶었으니까요.

동시에 이 작품은 사회 초년생들의 시작점을 다루기도 해요. 연기에 처음 발을 들인, 시작의 순간을 돌이켜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던 시기를 떠올려보면, 아무것도 몰라서 무모했던 것 같아요. 연기가 재미있기만 한 줄 안 거죠. 아는 게 없으니 오히려 더 자기 세계에 갇혀 날이 서 있었고요. 동기, 선배들과 모여 연기가 어떻다는 둥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몇 시간씩 떠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 필드에 제대로 발을 들이니, 내가 맡은 역할에 책임을 진다는 게 생각보다 훨씬 큰 일임을 알게 됐고요.

처음부터 배우라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나요?

아니요. 처음부터 이 일에 확신이 있거나 큰 꿈이 있었던 건 아 니에요. 대학을 졸업한 해에 처음 영화를 찍게 됐고, 이후엔 1년에 한두 작품이라도 불러주시는 분들이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참여해왔어요. 그 과정에서 현실적인 어려움을 피부로 느끼기도 했죠. 작품 수 자체가 점점 줄어들고, 저처럼 일이 없어 힘들어하는 배우도 많더라고요. 만약 내가 연기를 그만두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어요. 결국 이것뿐인 거죠.(웃음) 배워둔 것도 없고, 새로 무언가를 시작할 경제적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다른 길이 없으니까 일단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계획이나 의도 없이요.

그 과정에서 연기가 미운 적도 있었어요?

그럼요. 싫은 적은 없었는데 미운 순간은 많았어요.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싶으니 덩달아 연기도 원망스러워지더라고요. 가장 괴로운 건 이런 생각이 들 때였어요. ‘사실 내게 재능도 경쟁력도 없는데, 그걸 나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그럴 때마다 섬뜩하더라고요. 세상에 배우는 많고, 나는 계속 나이 들어가고, 이젠 결과로 보여줘야 할 시기인데 방법은 도통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연기를 계속해도 괜찮을지 끊임없이 질문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내 안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어요?

언젠가 그만두더라도 한 번쯤은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러니 기회가 올 때까지 참고 또 기다려보자고 마음을 다잡았죠.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자존심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마음이 절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 같아요. 제가 콤플렉스가 많거든요. 외모가 특별히 뛰어나지도 않고, 압도적인 연기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런데 그런 스스로에 대한 아쉬움과 그걸 넘어서고 싶다는 마음이, 언젠가 보여주고 증명해야 한다는 자존심이 제가 연기를 포기하지 않게 해준 것 같아요.

연기의 어떤 면이 나를 계속 배우로 살게 하는 것 같나요?

아직도 정준원으로서 제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아요. 힘들고,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한데요. 그런데 연기를 하는 순간에는 1백 명이 넘는 스태프들과 정준원이라는 사람을 잠시 배제하기로 약속하는 거잖아요. 그때 한없이 자유로워요. 해방감과 짜릿함, 말도 안 되는 어떤 카타르시스가 있어요. 물론 버겁고 힘든 날도 많고, 자주 집에 가고 싶은데요.(웃음) 그런데도 아주 짧은 찰나, 그 자유로운 순간 하나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하게 돼요.

2016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스스로 물었어요. 연기를 안 해도 살 수 있겠냐고요. 근데 안 되겠더라고요.” 여전히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지기도 하나요?

물론이죠. 이 질문은 앞으로도 계속 품고 갈 것 같아요. 아, 이런 경험이 있어요. 연기하기 전에 미대를 목표로 입시 미술을 준비했거든요. 학원에 가면 석고상을 앞에 두고 하루종일 지겨울 정도로 데생을 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림이 제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날 스스로에게 물었죠. ‘준원아, 이거 안 해도 살 수 있어?’ 망설임 없이 바로 ‘응’이라는 대답이 나오더라고요. 그날 바로 그만뒀어요. 그런데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연기를 안 해도 살 수 있겠냐’는 질문에 ‘응’이라는 대답이 나온 적이 없어요. 무언가에 쉽게 질리는 편인데, 연기만은 예외예요. 단 한 번도 질린 적 없고, 하면 할수록 더 잘하고 싶어져요.

앞으로 오래도록 이어질 연기 인생에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내가 나를 믿는, 그리고 끝까지 믿으려고 노력하는 태도요.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이런 맥락의 대사가 나와요. ‘실제로 내가 틀렸더라도, 그게 나를 파괴할지라도, 자신을 믿지 못하면 선수는 될 수 없어.’ 저 역시 연기를 계속해도 될지 자문하면서도, 어딘가 막연한 확신을 갖고 있었어요. 기회만 있으면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죠. 어쩌면 저 자신을 계속 속이며 버틴 걸지도 몰라요. 나마저 나를 의심하면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거든요. 끝까지 스스로를 믿는 마음이 필요한 건 연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이 사람이라는 걸 믿고 뛰어들어야 하죠.

내 삶 속에서도, 연기를 하는 순간에도 나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거죠?

맞아요. 제가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스스로 그 인물임을 믿지 못한 채 연기하는 거예요. 사실 모든 작품은 허구고, 연기도 역시 현실은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 슛 직전까지도 ‘정말 이게 맞나?’ 싶을 때가 있지만, 결국은 ‘괜찮아, 이게 맞아’ 하고 스스로를 믿고 밀어붙이려고 해요. 그러지 않으면 다 보인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제게 아주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예요. 세상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저만큼은 저를 믿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