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라는 불투명한 세계에서 ‘나’의 해상도를 높여가는 일.
연기를 향한 배우 최우성의 선명한 마음.

셔츠 Auralee, 슬리브리스 톱 Loewe.
재킷 Acne Studios, 안에 입은 톱 Nonnative, 연청 데님 팬츠 Maison Margiela.
재킷 Acne Studios, 안에 입은 톱 Nonnative.
재킷 Acne Studios, 안에 입은 톱 Nonnative.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러닝메이트>의 공개를 2주 앞두고 만났어요. 요즘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2월에 넷플릭스 시리즈 <이 사랑 통역 되나요?> 촬영을 마치고 오랜만에 쉬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요즘은 <러닝메이트> 홍보 일정을 소화 중이에요. 촬영은 2년 전에 끝나서 함께한 배우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여전히 편하더라고요. 다들 오래 기다린 만큼 더 기대하고 있어요. 특히 한진원 감독님이 아주 좋아하세요.

영화 <기생충>의 각본을 공동 집필한 한진원 감독의 첫 연출작이죠. 이번엔 ‘하이틴 정치 드라마’라는 흥미롭지만 생소한 소재를 다뤄요.

저도 처음에는 낯설었어요. 그런데 대본을 읽다 보니 정치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주인공 ‘노세훈’(윤현수)의 성장 과정을 학생 선거라는 소재로 풀어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노세훈은 소위 말해 아웃사이더 같은 학생이에요. 제가 연기한 ‘양원대’에게 선거 러닝메이트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은 뒤, 주변에 사람들이 생기고 여러 사건을 겪으며 성장해요. 그런 모습을 보며 시청자들도 각자의 학창 시절을 떠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죠.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러닝메이트> 1~3화를 상영했죠. 후기를 살펴보니 캐릭터들이 직설적이고 선명하다는 평이 많더라고요.

맞아요. 10대 학생들이다 보니 상황을 계산하기보다는 자신의 의견과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해요.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는 걸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고요.

양원대는 어떤 인물이라 생각하며 표현했어요?

야심이 넘치고 리더십도 강한 사람이에요. 언제나 정상에 있고 싶어 하고, 주변 상황을 원하는 대로 제어하려 하죠. 하지만 모두를 잘 챙기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외로움이 있을 수 있잖아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도 티 내기 싫어할 테니까요. 그런 이면의 감정을 표현해보고 싶어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감독님께서 “난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네가 그렇다면 한번 해봐라” 하시더라고요. “어디에 해볼 거냐?” 하셔서 “이 부분에서 살짝 울컥해보겠습니다” 했죠.(웃음)

스스로 양원대와 닮았다고 느끼기도 했나요?

전혀요. 양원대와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노세훈과 닮았었죠. 그런데 촬영하다 보니 제 성격도 변하더라고요. 시나리오를 읽은 뒤 양원대의 입장에서 MBTI 검사를 해봤을 때 ESTP로 나왔어요. ISFP인 나와 달리 외향적이고 이성적인 친구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이제 제가 ESTP가 됐어요.(웃음)

원래 연기하는 인물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네. 한 작품 안에서 연기하다 보면 반년에서 8개월 정도를 그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잖아요. 그러다 보면 작품 바깥의 나에게도 자연스레 영향이 가더라고요. 특히 이번엔 지방 촬영이 많아서 이동하거나 대기할 때도 그 인물인 것처럼 느껴졌어요.(웃음) 그래서 더 쉽게 체화된 듯해요.

전작에서는 선배들과 호흡을 맞출 일이 많았어요. 영화 <룸 쉐어링>에서 나문희 배우와,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서 이제훈, 이동휘 배우와 함께했죠. 선배들과 함께한 현장은 어땠어요?

매 순간 많이 배웠어요. <룸 쉐어링>을 촬영 때 나문희 선배님과 같은 대기실을 썼어요. 요즘엔 태블릿이나 휴대폰으로 대본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은 A4 용지에 인쇄해서 종일 보시더라고요. 종이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요. 집에서도 늘 대본만 보신대요. 연기를 그렇게 오래 하셨는데도 여전히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계신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돌아보며 반성했죠. <수사반장 1958> 때는 이제훈, 이동휘 선배님의 넓은 시야를 배우고 싶었어요. 현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위험한 일이 생기진 않을지 사전에 파악하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전 제 연기에만 집중했는데, 선배들은 현장의 흐름까지 읽는구나 싶었죠.

셔츠, 팬츠 모두 Dries Van Noten.
점퍼, 팬츠, 로퍼 모두 Bottega Veneta.
슬리브리스 톱 Loewe.

<수사반장 1958>을 촬영하면서 체중을 25kg이나 늘리기도 했죠. 외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탐구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잖아요. 그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테고요. 연기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배역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면 그의 유년기부터 상상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청자들이 보는 건 작품 속 짧은 순간이겠지만, 그 인물이 그 자리에 있기까지는 숱한 시간을 거쳐왔을 테니까요. 그래서 <수사반장 싹 다 찾아서 봤어요. 그래야 20%라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나와 완전히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겠어요.

음… 연기하는 캐릭터가 저와 비슷하면 편할 수는 있겠지만, 그러자고 연기하는 건 아니라서요. 다른 사람이 돼보고 싶어요. 다양한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거든요.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싶은 이유는 무엇이었어요?

앞서 말했듯이 학창 시절에 소극적인 편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반면에 TV 속 배우들은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며 삶을 개척하는 것처럼 보여서 동경했고요. 그러다 10대 후반 무렵, 아직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위축된 채 보낸 학창 시절이 아까웠고요. 배우가 된다면 다양한 인생을 거치며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연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했고요.

<러닝메이트>를 통해 활동적인 학생 양원대로 살아본 경험이 더 특별했겠어요.

맞아요. 당당한 성격으로 학교생활을 해보고 싶어서 학원물을 많이 하고 싶었거든요. <러닝메이트>를 통해 소망을 이뤘다고 볼 수도 있죠.(웃음) 그 덕분에 성격도 밝고 적극적으로 변했는데, 지금의 상태가 좋아요. 터닝 포인트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어요.

<열여덟의 순간>으로 데뷔한 이후 6년이 지났어요. 그 시간을 반추하면 자신에게 어떤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라는 사람을 알게 됐어요. 연기를 하다 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계속 자문하게 되더라고요. 연기를 하다 보면 자신을 잃어가고, 나중에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된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오히려 이 6년의 시간 동안 저를 점점 찾은 것 같아요.

앞으로 마주할 시간을 통해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

믿고 보는 배우가 되고 싶은 건 당연하고요. 또 하나는 다음이 기대되는 배우이고 싶어요. 다음에는 어떤 작품에 출연해 새로운 변화를 보여줄까 궁금하게 만드는 배우요. 그래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매사에 배우려는 태도를 잃지 않으려고 해요. 무언가를 계속하다 보면 가끔은 새로운 게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잖아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 경계해요. 만약 미래의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다면, 네가 아는 게 다가 아니라고,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연기의 어떤 면이 나를 계속 배우고 싶게 만든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무언가 하나에 오래 집중하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시험을 보면 백 점을 맞는 게 그 일의 정점일 텐데, 끝이 있다고 생각하면 깊게 빠져들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다 처음 연기를 접했는데, 같은 인물을 연기해도 어제 하는 연기와 오늘 하는 연기가 다르더라고요.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 부분에서 흥미를 느꼈죠.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완벽해지지 않는 게 연기구나, 그럼 앞만 보고 갈 수 있겠구나 싶었죠. 정답이 없으니 한계 역시 없을 테고요. 그게 제가 계속 연기를 하는 원동력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