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를 이, 이야기 설. 배우 이설에게 이름의 의미대로 산다는 것.

무더운 여름입니다. 이 계절을 어떻게 지나고 있나요?
매주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 <디 이펙트> 공연을 올리며 보내고 있어요. 6월에 첫 공연을 마쳤고 8월까지 쭉 이어지는 일정이라, 남은 여름도 공연장 안에서 보낼 것 같아요. 살면서 가장 뜨겁고 재미있는 여름인 것 같습니다.
연극 <오셀로> 이후 무대에 서는 건 2년 만이죠?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첫 연극 연습을 드라마 <우리영화> 촬영이 끝나갈 때쯤 맞물려서 시작한 터라, 발성이나 움직임 자체를 달리하는 데 익숙해지느라 시간이 필요했어요. 처음에는 좀 어렵다가 막상 무대에 오르니까 전환이 탁 되더라고요. 드라마나 영화는 누군가의 손을 거쳐 편집되어 나오잖아요. 연극은 그 순간 제가 선택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어서, 그 점이 가장 즐겁고 행복해요.
별다른 소품이나 무대장치 없이 배우의 연기만으로 채워가야 하는 작품입니다. 거기에서 오는 부담은 없었나요?
숨을 곳이 없다는 게 늘 무섭죠. 자신이 없거나 조금이라도 주춤하면 아무리 짧은 찰나라도 다 보이더라고요. 첫 공연 때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떨렸어요. 근데 그래서 더 즐거운 거겠죠? 짜릿하고.
무대 위에서 느끼는 자유나 해방감이 무척 크게 다가오나 봐요.
엄청 커요. 이번 작품이 항우울제 임상 테스트를 진행하는 박사와 참여자로 이루어진 4인극인데, 저는 참여자 중 한 명인 ‘트리스탄’ 역을 맡았거든요. 매사에 감정을 숨기지 않는 캐릭터인 데다 극 중에 소리 지르는 장면이 아주 많아요. 공연 한 번 하고 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더라고요. 사람은 적당히 소리를 지르면서 살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말 그대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중이었군요.(웃음)
네.(웃음) 그래서 그런지 요즘 내내 행복한 상태예요. 근데 이게 주변 사람들에게도 느껴지나 봐요. 친한 지인들이 공연을 보고 이런 말을 해주더라고요. 무대 위에서 제가 진심으로 자유로워 보인다고, 행복해하는 게 눈에 보인대요. 물론 연기하면서 느끼는 해방감도 크지만, 무대 위에서는 관객들이 저를 사랑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더 생생하게 느껴져요. 이래서 다들 공연을 하는구나 싶어요.
젠더벤딩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작품이기도 하죠. 원작에서는 남성으로 설정된 캐릭터를 여성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나름 국내 최초로 시도하는 건데, 단순히 대사를 바꿔 읽는 게 아니라 같은 역할을 여성, 남성 배우가 동시에 연기하는 거예요. 배우의 성별에 배역을 맞추는 방식이라 대본에 각색을 더하고요. 대본에 성별에 따른 신체적 차이나 특징을 반영하기 위해 정재승 박사님께 뇌인지과학 분야에 대한 자문을 구해가면서 배우들이 각색 과정에 직접 참여했어요. 같은 캐릭터라도 배우마다 이야기가 달라지다 보니 여러 번 관람해 주시는 관객이 많더라고요. 이걸 ‘회전문 돈다’고 표현하던데, 요즘 후기들 찾아서 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라요.
<우리영화>에 대한 반응도 살펴보고 있어요? 며칠 전 마지막 화가 공개 됐죠. 인터뷰를 준비하며 몇 회를 연달아 봤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어요.
저도 그랬어요. 최근에 참여한 영화 <침범>도 그렇지만 요 근래 잔혹하고, 피 튀기고, 누군가를 증오하는 이야기를 자주 만났거든요. 한창 그런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이기도 했고요. 한없이 아름다운 이야기, 편안한 봄날 같은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우리영화> 대본을 받았어요. 읽자마자 무조건 하고 싶다, 내가 기다리던 이야기다 싶었죠. 그간 유난히 우여곡절이 많은 인물들을 맡아서 그런지, 이번 작품에서 보여준 모습이 오히려 다른 의미로 새로웠어요.(웃음)
한국 영화계의 독보적 톱스타, 한 줄로 이렇게 소개되는 ‘서영’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해석 했어요?
사실 연기하면서 조금 어려웠어요. 톱스타를 어떻게 표현하지? 나는 한 번도 톱스타였던 적이 없는데?(웃음) 그런데 저는 서영이가 <우리영화>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캐릭터라고 봤어요. 겉은 화려한데 굉장히 입체적인 면을 가진 사람이라고요. 신인일 때 자신을 알아봐준 감독 ‘제하’(남궁민)를 너무 사랑하니까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다음’(전여빈)에게 질투심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뒤로 갈수록 두 사람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응원하잖아요.
서영을 점점 변화하게 한 건 제하에 대한 사랑일까요, 다음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었을까요?
둘 다였을 거예요. 처음에는 제하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움직였다면, 다음을 보면서 느끼는 게 하나둘 늘어갔겠죠. 목숨을 걸 만큼 연기에 열정적이고, 맡은 역할을 해내는 다음이의 모습이 참 숭고하고 아름답게 다가왔을 거예요. 그런 다음이의 대미를 함께 장식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하얀 사랑>을 마무리했을 거라 생각하며 연기했어요. 물론 그 안에는 배우라는 일 자체에 대한 열정도 있었을 거 고요. 이 모든 게 뒤섞여서 서영을 점점 바꿔놓지 않았을까 싶어요.
서영을 보면서 자신과 닮았다고 느끼기도 했어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건 어떻게든 밀고 나가보려는 뚝심 정도는 닮지 않았나, 감히 생각해봅니다.(웃음) 사실 닮은 점이 많다기보다,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서영이 가진 자신감이 너무 부러웠거든요. 서영을 연기 한 뒤로 저도 자신감이 조금 생긴 것 같아요. <우리영화> 제작 발표회가 <디 이펙트> 첫 공연이랑 날짜가 겹쳐서 행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무대에 올라야 했거든요. 그 무대에서 대사 한 단락을 통째로 까먹은 거예요. 많이 당황했지만 그냥 기세로 밀어붙였어요.(웃음) 그런 스스로를 보면서 서영이 생각이 많이 났죠

그저 나다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가면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짝이는 삶 아닌가 싶어요.

<우리영화> 제작 발표회에서 이런 말을 남겼죠. “매일이 버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이게 살아야겠다는 걸 알려준 작품”이라고요. 이 말에는 어떤 의미를 담았어요?
매일매일 먹고 싶은 걸 먹고, 걷고 싶은 길로 걷고,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 한 번이라도 더 들여다보고. 이런 사소한 조각들이 모이면 제 선택으로 이루어진 하루가 계속 반복되는 거잖아요. 그럼 매일이 새롭고 아름다울 것 같다는 생각을 <우리영화> 찍는 동안 했어요. 삶은 유한하잖아요. 그저 나다운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가면서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짝이는 삶 아닌가 싶어요. 자기 선택으로 하루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눈을 보면 빛이 나거든요. 지금 기자님 눈도 그래요.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싶다는 의미였어요.
요즘 그렇게 반짝이는 하루들을 보내고 있어요?
그런 것 같아요.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저 원래 이러지 않았거든요. 이대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들이 더 많았는데, 요즘은 매일이 재미있어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것 있잖아요. 고마우면 고맙다고 하고, 잘못한 게 있으면 먼저 미안하다고 하고.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의 상태를 살펴봐줄 여유가 있는 사람이요. 누군가 실수했을 때 비난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해결하자. 도와줄 거 없어?’ 하고 손 내미는 사람도. 이런 사람들과 함께할 때 안전하다고 느껴요. 제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도 받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고요.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 이고 싶다, 좋은 배우이기 이전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최근 들어 갖게 됐어요.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나 봐요. 자기 안에 여백을 만들고 그 자리를 타인에게 내어주는.
맞아요.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오늘의 나는 이런 데 내일의 나는 어떨지 모르겠다는 말이에요. 나는 왜 이럴까, 왜 이런 사람인가를 자주 생각하던 시기가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오늘은 이런가 보다, 다 지나가겠지 하고 마음을 편히 먹게 된 것 같아요.
그게 자신의 욕망이나 목표가 사라진 상태와는 다르겠죠?
그럼요. 욕망은 항상 들끓는데,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나가면 매몰되기 쉽다는 걸 이젠 알기 때문인 것 같아요. 요즘은 그냥 하루하루 재미있게 일궈내다 보면 어느새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져 있겠지 하고 생각해요. 막상 이렇게 쿨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속으로는 또 ‘언제 저기까지 가냐. 나 급한데. 빨리 다음 다음!’ 이러고 있어요.(웃음) 다 똑같습니다.
이설이라는 이름의 뜻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배우이고 싶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라 들었어요. 데뷔한 지 어느덧 8 년째인데, 문득 이 의미가 지금의 배우 이설에게는 어떻게 다가올지도 궁금해요.
뜻대로 여전히 잘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실감 나게 전달하는 사람이고 싶거든요. 그 점에서요. 이 의미대로 사는 게 제 꿈이기도 해요. 무슨 청춘 만화 같네요. 자기 이름이 꿈이라니.(웃음)
그간 작품을 선택해온 기준이나 원칙이 있다면요?
돌이켜보면 늘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해온 것 같아요. 그때의 제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가 작품에 드러나는 것 같고요. 저는 왜 이 작품에 함께 하고 싶은지 이유가 명확해지면 이후에는 망설이지 않아요. 한번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어라 해보자, 이런 마음으로 여태 해온 것 같아요. 그래서 시동을 거는 작업이 중요해요. 어떨 때는 경운기 시동 걸듯이 몇 번이나 시도해야 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스포츠카처럼 한 번에 걸릴 때도 있어요.
배우이기 이전에 독자로서는 어떤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요? 촬영 시작 전에도 소설을 읽고 있던데.
온다 리쿠의 소설을 좋아해요. 올봄에 나온 <스프링>을 인상 깊게 읽었어요. 발레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작품에 나오는 클래식 곡들로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틀어놓고 읽거나 읽고 나서 발레 공연 영상을 찾아서 보기도 했어요. <꿀벌과 천둥> <초콜릿 코스모스>도 좋아해요. 각각 피아노 콩쿠르 무대와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장면에 대한 묘사가 무척 실감 나서 읽다 보면 장엄한 느낌을 받아요. 음식은 편식하는 편인데, 책은 끌리면 일단 사서 무조건 끝까지 읽어요. 어릴 때 부모님이 만들어준 좋은 습관 중에 하나예요.
좋은 이야기들을 섭취하는 습관이 연기에 도움이 되기도 하나요?
사람 자체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는 것 같긴 해요. 다양한 책을 가리지 않고 읽다 보면 대본을 읽다가 저랑 판이하게 다른 인물을 만나도 어, 이런 사람 어디서 봤는데. 뭐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지.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요.
그렇게 흡수한 이야기들을 연료 삼아서 작품 속 인물이 되어보는 과정에서는 무얼 느껴요?
고통이요.(웃음) 그와 동시에 그 고통을 압도하는 즐거움이 있어요. 처음엔 괴롭다가도 이 인물에 대해 이해한 만큼 현장에서 구현해낼 땐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하죠. 연기에 정답은 없지만, 스스로 만족하는 지점까지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계속 찾고 찾고 또 찾는 과정의 연속인 것 같아요.
방법을 찾지 못할 땐 어떻게 해요?
어떤 장면에서 꼭 표현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방법을 못 찾은 채로 촬영장에 갈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모르는 상태로 일단 가요. 이 일은 혼자 하는 게 아니니까요. 제 빈틈은 옆에 있는 사람들이 채워줄 거라는 믿음으로 하는 것 같아요.
제작이나 연출에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어요. 두 해 전쯤에는 아이들에 관한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기도 했죠.
거창하게 작품을 준비하는 건 아니지만 늘 무언가를 쓰고는 있어요.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전에도 내봤는데 전부 떨어졌어요.(웃음) 그래도 매일 떠오르는 것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틈틈이 기록해두고 있어요. 낙서하듯이. 그렇게 쓰다 보면 지금 제가 관심 있는 주제가 무엇인지 찾아나갈 수 있어서 좋더라고요.
언젠가 영화를 한 편 만든다면 그 안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어요?
노인들에 관한 이야기요. 휴대폰 메모장에 ‘하이틴 소설을 읽는 노인’ 이런 거 적어놨네요.(웃음) 친구들에게 들려주니까 다들 재미있다고 해서 언젠가 써보려고요. 자신은 없지만요.
재미있는 소재네요.(웃음) 마무리할까요. <마리끌레르> 8월호 주제가 ‘빛’이에요. 올여름에 만난 가장 눈부신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면요?
어제 가족들과 경주 여행을 다녀왔거든요. 이모의 학창 시절 친구 분들도 오셨는데, 전부 60대 여성들이에요. 제 또래 자녀들이 있는. 그런데 정말로, 새벽까지 쉬지 않고 수다를 떠시더라고요.(웃음) 무슨 10대 소녀들이 모여 있는 줄 알았어요. “마! 인생 60부터 시작이다. 배움을 멈추면 안 된다!”, “내는 나이 좀만 더 들면 안 있나, 스포츠카 살 끼다!” 이러면서.(웃음) 그 모습을 보는데 뭔가 뭉클하면서, 빛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어요. 저렇게만 나이 든다면 삶을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 각자 자신이 짊어진 무게를 견디면서 즐겁게 사는 그 모습에서 희망을 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