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조우진이 역할마다 심연에서 만난 것들.




“진실성을 최대치로 담아내는 것이 목표였고, 100%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정확하고 진심 어린 연기를 해야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올해는 영화 <하얼빈>과 <승부>로 관객을 만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사마귀> 오픈과 영화 <보스> 개봉 또한 앞두고 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시간을 보내고 있나?
복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같이 어려운 때에 작품을 만들어 극장에서 상영하고, OTT 플랫폼에 오픈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나. 그럼에도 긴장감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는다. 배우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작품 수가 는다 해도 긴장이 줄어드는 건 아니더라. 다만 보다 많은 분들과 좋은 에너지를 나눌 수 있도록 건강한 긴장을 유지하려 한다. 쉽진 않지만. 오늘 화보 촬영만 해도 무척 긴장했다. 어떻게 오늘 촬영하며 좀 건진 게 있나?(웃음)
건진 정도가 아니라 쓸어 담았다.(웃음) 긴장하는지 전혀 몰랐을 정도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여도 물속에서는 엄청나게 발길질을 하는 중이다.
10월 개봉을 앞두고 영화 <보스>를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 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에서 먼저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영화제 30회라는 점에서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왠지는 모르지만 체질상 부산과 참 잘 맞는다. 부산에서는 확실히 다른 종류의 도파민이 만들어진다. 흔한 표현으로 업된다고 하지 않나. 이제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과 한 몸처럼 느껴진다. 영화제에서 일하는 분들의 열정, 그분들이 만들어낸 영화적 분위기, 좋은 작품들… 그 모든 에너지 덕분에 그 안에서 나까지 흥분되는 거다. 그래서 부산에서는 늘 초흥분 상태를 다잡으려고 애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 <보스>를 선택한 이유를 어떻게 추측하나?
신박한 설정과 아이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는 쿨한 에너지, 거기에 여러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요소를 곳곳에 심어놓은 영화다. 이런 지점이 부산국제영화제에 어필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성격이 축제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페스티벌처럼 찍자는 마음으로 임했거든. 영화가 주는 행복, 기분 좋은 여운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부산의 시원한 바다 물결처럼, 박수 치며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영화다.
9월 26일 공개 예정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이자 <길복순>의 스핀오프인 <사마귀>도 <보스>도 액션물이다.
두 작품이 지닌 액션의 성격이 조금 다르다. <보스>가 라이트하고 신나는 안무 같은 액션을 보여준다면, <사마귀>는 각 캐릭터의 특색이 무기와 동선에 그대로 녹아 있다. 주먹질만이 아니라 다양한 무기를 들고 합을 맞추기 때문에 소리와 타격감도 다변화한다. 그래서 새로운 액션의 현란함을 느낄 수 있을 거다.
한동안 감정과 표정, 행동만이 재료인 역할을 주로 맡은 터라 액션 연기가 배우에게 전환이 되었을 것 같다.
맞다. <보스>에서 액션 연기를 하면서 많이 정화된 부분이 있다.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는 액션이기도 해서 덩달아 신나게 임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까불기도 하면서.(웃음) 성룡식 액션처럼 타격감도 있으면서 보는 재미가 살아날 수 있게 하고 싶어 지금까지 참여한 액션영화 중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낸 작품이기도 하다. 코믹하고 캐릭터가 보이는 액션을 담아내려 했다.
영화 <하얼빈> 촬영 후 <보스>에 임한 걸로 안다.
<하얼빈>을 끝내고 체중이 많이 빠져 있었고, 신체적, 정서적으로 무거운 작품을 소화한 직후라 <보스>의 ‘순태’를 통해 그 잔상과 무게를 덜어내며 환기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결국 환기와 치유도 역할과 작품을 통해 하는 건가?
맞다. 현장에서 쌓인 건 현장에서 푸는 것이 가장 건강한 방법인 것 같다.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경험과 감정은 소중하지만, 이를 모두 담고 살아가는 게 벅차기도 하다. 그럴 때 작품과 인물을 통해 내 안에 담은 것들을 치유와 환기를 통해 내 나름대로 극복해야 한다. 그래서 이 작업이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진다.







올해의 영화로 <하얼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극 중 ‘상현’이 스테이크를 손으로 집어 입에 넣는 장면은 몇 계절이 지났음에도 생생히 남아 있다. 모멸감과 자괴감에 휩싸인 상현이라는 인물의 무게를 어떻게 받아들이고자 했나?
사실 처음에는 그 장면이 복합적인 감정의 깊은 호흡을 담아내야 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촬영을 해나가는 와중에 어느 순간 무엇 하나 허투루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 속에 빠뜨린다’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상현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깊은 자괴와 모멸, 독립운동가로서 마주하는 좌절과 자기 배신감, 가장 밑바닥 감정까지 파고들게 됐다. 그 감정들이 고기를 씹는 순간, 가장 솔직하게 튀어나왔을 거다. <하얼빈>은 진실성을 최대치로 담아내는 것이 목표였고, 100%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정확하고 진심 어린 연기를 해야 관객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상현이야말로 <하얼빈>의 인물들이 지닌 고뇌 중 가장 현실적인 고뇌를 지녔기에 더 크게 공감한 부분도 있다.
관객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평균적인 사람이 지닌 고독의 심연을 표현해보자는 목표가 있었다. 그래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보다 진심을 담는 것이 중요했다. 상현의 그 장면이 설득력을 가져야 관객이 캐릭터를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다고 봤다. 워낙 드라마틱한 인물이라 공감과 이해가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 장면이 내게는 촬영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도 했다.
어떤 질문과 마음을 붙잡고 가야 하는 여정이었는지도 기억하는가?
배역으로서 품는 고독도 있지만, ‘내가 이거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도 무수히 했다. ‘이게 과연 맞는 연기인가? 제대로 해내고 있나? 해낼 수 있나?’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어쩌면 상현은 지금까지 맡았은 역할 중 내 한계를 가장 많이 맛본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나는 종종 그걸 심연이라고 표현하는데, 심연의 심연까지 더 내려가본 느낌이 들었다. 때로 고통스러운 여정이었지만 이를 성장통이라고, 성장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거밖에 안 되나?’ 싶다가도 감독님과 스태프들이 격려하고 손을 잡아줄 때 짜릿했다. 큰 위안이 됐고.
시나리오를 읽을 때는 그 여정을 예상치 못한 건가?
처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큰일 났다는 생각은 했었다.(웃음) 우민호 감독님과는 형, 동생 하는 사이인데, ‘나더러 이거를 어떻게 하라고’ 싶기도 했다. 그런데 감독님이 계속 북돋아줬다. 사실 우리가 서로 말을 길게 하는 편은 아니다. 감독님은 “밑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정도의 말만 거듭했다.(웃음)
조우진 배우 하면 저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씩은 있을 거다. 누군가는 영화 <내부자들>에서 무심히 “여(기) 자르고, 여(기) 자르고”를 읊조리던 ‘조 상무’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1987>에서 박종철 열사의 삼촌으로 분한 모습도 오래 회자되는 장면 중 하나다. 조카의 시신을 확인하기 직전 숨죽이며 들썩이던 젖은 얼굴이 생각난다. 극단의 감정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을 앞두고 어떤 준비를 하는 편인가?
영화보다 더 많은 상황을 상상하는 편이다. 이 사람이 며칠 전에는 어땠을까, 방금까지는 어땠을까 등을 그려보는 거다. <1987>의 삼촌은 조카를 업어 키운 사람일 수도 있다. 착하고 공부 잘하던 조카, 서울대에 들어간 자랑스러운 조카였을 거다. 부모가 못 오니 등 떠밀려 온 사람일 텐데. 얼마 전까지도 내 품에 있던 그 따뜻한 살갗을 기억하는데, 부검대에 누워 있는 조카를 봐야 하는 상황을. 게다가 당시 공권력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을까. 억울함과 억눌림, 깊이 침잠된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 그래서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이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이러니한 소품을 제안했다. 새마을운동 모자를 쓰고 들어가 인사하며 모자를 벗고 부검대 위의 조카를 처음 보는 순간··· 리허설 때는 보지 않았고 본 촬영 때 처음 시선을 마주했다. 북받치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걸 억누르는 연기가 필요했다. 책 제목이기도 한데, 좋아하는 문장이 있다. “미쳐야 미친다.” 내가 이 상황에 미쳐야 보는 사람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작품마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따라올 텐데 그럴 때 어떤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서나?
‘나부터 믿자’. 그래야 함께하는 사람도 믿을 수 있고, 서로 믿으면 한 장면이라도 더 잘 만들어낼 수 있다. 불확실성을 줄이려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나는 방패를 찾기보다 무기를 더 많이 만들려는 편에 가깝다. 감독님에게 선택지를 많이 드리고자 한다.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의 호흡과 부딪음이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한 숏에서 포착될 때 오는 보람과 쾌감이 있다. 그런 순간을 최대한 많이 만들자는 마음으로 접근한다. 나 스스로 감정적 여유가 있어야 더 많은 이들과 호흡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 만난 조우진 배우는 누구보다 좋은 배우에 대한 바람도 고민도 클 것 같은데 어떤가?
자주 생각하지만, 쉽진 않다. 좋은 배우는 공감 능력이 있는 사람일 텐데, 먼저 배우 스스로 인물에 공감하고 이후 타인의 공감까지 이끌어내는 것, 이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근데 이 공감이라는 것이 말은 흔히 쓰지만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어려움을 뚫는 수고로움이 있어야 많은 분이 공감할 수 있다고 본다. 뛰어나기까지 바라기보다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계속 꿈을 꾸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