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에 대해선 한 치도 후회가 없어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거든요.” 
최선 이후의 고요. 로운은 지금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하루하루가 귀하게 느껴질 것 같아요. 입대를 앞둔 이 시간이.
너무 귀중하죠.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그렇다고 특별할 건 없어요. 일도 하고, 일 없을 땐 친구들을 만나고, 혼자 쉴 때도 있고. 아직은 체감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짧은 머리는 해본 적 있어요?
드라마 <연모> 때 옷깃에 닿지 않게 하려고 뒷머리를 좀 치긴 했는데, 아주 짧게 잘라보지는 않았어요.
시점을 한 달쯤 뒤로 옮겨보면, 그때의 나는 어떤 모습일 것 같아요?
지금의 저를 엄청 부러워하겠죠. 휴가 한 번에 목숨 걸고 축구 하면서.(웃음) 잘 적응할 것 같아요. 주변에서도 서글서글하게 잘할 걸 알아서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아, 웬만하면 뭐든 자원해서 하라는 조언을 덧붙이면서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래요.
축구는 잘해요?
몇 달 전 팬 미팅을 했는데, 팬들이 보내는 메시지를 읽는 시간이 있었어요. 축구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10개마다 꼭 하나씩 있더라고요.(웃음)열심히 해야죠. 젊은 친구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슈즈 Bottega Veneta, 팬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난해 여름,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힌트를 남겼던 드라마 <탁류>가 공개되었어요. 당시 감독님,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의 즐거움에 대해 들떠서 얘기하던 모습이 떠올라요.
맞아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탁류> 현장이 참 좋았어요. ‘장시율’이라 는 캐릭터로서도, 저라는 사람으로서도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음을 명확하게 실감할 수 있었거든요. 유독 의견을 많이 주고받은 현장이었어요. 어떤 현장에서는 배려하느라 서로의 연기에 대해 얘기하지 않기도 하는데, <탁류>에선 “방금 그것도 좋았는데 이렇게 한 번 더 해보는 건 어때?”라는 말이 끊임없이 오갔어요. 모든 배우가 대본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거죠.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어요. 실은 이 작품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내심 ‘추창민 감독님이라는 섬세하고 집요한 분이랑 같이 작업하면서 그 과정까지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진짜 연기를 사랑하는 걸까?’ 하면서 스스로를 테스트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고 나니까 확신이 들어요. 자만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이 작품에 대해선 한 치도 후회가 없어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거든요. 현장이 너무 좋다, 연기하는 게 너무 좋다 하면서요.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요. 할 수 있는 걸 다 해본 현장에 대해서요.
감독님이 이런 말을 해주셨어요. “좋은 연기, 안 좋은 연기는 없다. 단지 영점을 맞추는 일이고, 여러 가지를 해보는 와중에 그럴싸한 걸 찾는 거”라고요. 그래서 초반에 정말 여러 가지를 해봤어요. 갑자기 소리를 질러보고, 침도 뱉어보고, 웃통을 까버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이건 좀 많이 갔어” 혹은 “이건 더 표현해도 될 것 같아” 하며 감독님과 제가 생각한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갔어요. 분장이랑 의상 테스트도 되게 많이 했어요. 제가 생각하는 시율은 ‘뭔가 둥글지 않았으면 좋겠다’인데,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그래서 긴 머리도 해보고, 머리를 짧게 잘라도 보고, 묶어서 올려도 보고, 헤어스타일을 정하는 데만 8시간 정도를 썼어요. 의상도 “이런 의상인데, 이걸 모랫바닥에 2시간 정도 문지른 느낌이면 좋겠어요” 하면서 지저분한 정도를 맞추느라 또 한참 의논했고요. “이게 시율이 같은데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하고 또 한 거죠.
무법천지의 조선 땅에서 과거를 감추고 왈패 일당이 된 시율이라는, 텍스트로 존재하던 인물이 진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과정이었던 셈이네요.
로운이라는 배우와 시율이라는 캐릭터가 하나로 맞춰지는 순간을 위해서요. 캐릭터를 말로, 저를 기수로 가정하면요. 연기하면서 제가 그 말을 조종할 때도, 말의 속도에 맞춰 따라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탁류>에서는 오히려 제가 말과 함께 달려 나가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계산되지 않은,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감정들이 섞여서 흘러나올 때요. 이를테면 시율에게 닥친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는 순간 ‘이건 복합적인 감정일 거야’ 하며 촬영에 들어갔는데, 막상 표현은 의외로 단순하게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바로 “오케이, 컷!” 하시는 거예요. 그때 ‘그래, 내가 시율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런 순간을 만나기 위해 지난 과정이 있었구나 싶었어요.
감독님이 마음껏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덕분에 장시율이라는 인물이 되는 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탁류>에서 만난 분들이 다 무척 귀한 데, 특히 감독님과 함께한 게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감독님의 의도와 계획에 맞춰서 움직여야 하잖아요. 그런데 추창민 감독님은 시간이 아무리 촉박해도, 배우가 이해하지 못했다 싶으면 그냥 넘기지 않았어요. 계속 대화를 해요.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그럼 신을 새롭게 만들어볼까?” 하는 식이에요. 그 정도로 배우의 감정과 생각을 존중해주셨어요. 그리고 오케이가 나도, 제가 아쉬워하면 “이번엔 마음대로 해줘” 하면서 꼭 한 테이크를 더 가게 해주셨어요. 그게 배우에겐 굉장한 자유를 주거든요. 집에 가서 이렇게 해볼걸 하면서 찜찜해하는 일 없이, 날마다 준비한 패를 다 꺼내 쓸 수 있는 현장이었던 거죠.
완성된 드라마를 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어요? 후회 없다고 단언할 정도로 다 쏟아냈으니 가뿐한 마음으로 작품 자체를 즐기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그럼에도 처음엔 이야기 전체보다 신 바이 신으로 제 연기를 먼저 보게 되더라고요.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은 아쉬움이 아니라 ‘내가 이 작품을 너무너무 사랑했구나, 나 이때 정말 미쳐 있었구나’ 싶은 지점이 더 많이 보였다는 거예요. 촬영하면서 이 작품이 어쩌면 내 연기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결과물을 보고 나서 내 범주를 더 넓힐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 마음을 동력 삼아 풀 악셀을 밟으면 될 것 같은데, 시점이 아쉽긴 하네요.
하아.(웃음) 한편으론 배우로서 잊히는 시간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잘 다녀와서 좋은 작품으로 또 인사드리면 되니까요. 그리고 요즘은 오히려 평화로워요. 뭔가에 쫓기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고, 싫어하는 마음도 딱히 없이 되게 평온하고 잔잔한 상태예요. 한때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상황에서 포기하는 것에 미련을 갖고, 선택에는 후회가 따르기도 했죠. 그런데 지금은 ‘내가 최선을 다했으면 된 거야’ 하고 생각해요. 예전에 삶이 좀 버거울 때, 이적 선배한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선배가 잘 집이 있고, 먹을 음식이 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삶이라는 거예요. 그 말에 요동치던 마음이 좀 가라앉더라고요. 그렇다고 ‘무(無)’의 상태는 아니고요,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에요. 평온한 고립 상태랄까요.

벨트와 네크리스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알고 준비한 건 아닌데, 마침 이번 화보의 주제가 ‘외로움, 고독’이에요. 외로울 때 어떻게 반응하는 편이에요?
간혹 외로움을 위기 상황으로 인지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저는 이 감정이 나쁘지 않다, 자연스러운 거다 생각해요. 외려 반겨요. 어떤 때는 나를 더 고립시켜야 된다 싶고요. 이를 어떻게 컨트롤 하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음… 저는 진짜 외로우면 가만히 이 시기를 바라보고 기억하려고 해요.
나의 외로움을 기록해두는 건가요?
네. 그래서 결국은 그 감정을 인정하게 되도록요.
그대로 응시하는 것 말고 극복하려고 한 적도 있어요?
있죠. 그래서 책을 읽었던 것 같아요. 이 감정 뭐지? 어떻게 해야 되지? 이 불편함을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지? 알고 싶어서 인간의 심리에 관한 책을 읽다가 자연스럽게 철학에도 관심이 생기고 그랬어요.
책을 통해 무엇을 알게 됐어요?
진심으로 바라면 가질 수 있다. 물리적으로 실재하는 돈이나 물건 말고요. 불편한 감정이 뭔지 알고 싶어서, 극복하고 싶어서 책을 찾아 읽은 것처럼 진짜 원하는 일이 생기면 뭐든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무언가를 알게 되고, 얻게 되었을 때 그게 갑자기 생긴 게 아니라 실은 간절한 바람으로 스스로 무언가를 했던 데서 기인한 결과가 아닌가 싶은 거죠. 그래서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솔직하게 자신에게 묻는 게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 간절히 바라는 무언가가 있나요?
제 30대, 40대가 무척 기대되고 지금보다 더 좋 은 배우가 될 거란 자신감이 있어요. 웬 근거 없는 자신감이냐 할 수도 있는데, 저는 진짜 바라기 때문에 그 모습을 갖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능력도 중요하지만, 하고 싶은 열망을 이기기 쉽지 않잖아요. 이 마음을 안고 연기와 잠시 멀어지는 게 슬프지만(웃음) <탁류>로 얻은 이 두근거림이 금방 가시진 않을 것 같아요.
무엇을 두고, 무엇을 가져갈 참인가요?
뇌를 두고 갈 생각입니다.(웃음)
(웃음)단순해질 필요도 있죠.
하지 말라는 거 하지 않고, 하라는 것만 하고. 괜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싶어요.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그게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좀 비운다는 마음으로 다녀오려고요.
건강하게, 무탈하게 다녀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면 저 또 불러주세요. 충성.(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