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영화 안에서 꿈을 꾸는 이제훈의 영화로운 삶.


블랙 도트 스카프 Saint Laurent.

나는 촬영하는 과정에서 영감이 필요할 때도, 지쳐서 쉬고 싶을 때도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이다. 이제는 쉬엄쉬엄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좋은 작품을 보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는 생각에 눈이 번뜩 뜨인다.
2023년에 이어 다시 한번 <마리끌레르 BIFF 에디션>에 참여하게 되었다. 2023년 당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본 영화가 1천 편은 족히 넘을 텐데, 배우로서 내 작품을 얼마나 남길 수 있을까 따져보면 1백 편도 채우기 어려울 것 같다”라며 아쉬움을 토로했었다.
몸이 하나라서 아쉬울 뿐이다.(웃음)
그런데 필모그래피가 쌓이는 기세를 보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지난해에는 영화 <탈주>를, 올해는 영화 <소주전쟁>과 드라마 <협상의 기술>을 선보였다. 촬영은 마쳤는데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작품도 있고.
가능성을 엿보는 정도까진 왔다. 1백 살까지 살면서 계속 연기를 하면 될 것도 같은데.(웃음) 기대 수명을 좀 더 늘려보자면 1백 살까지는 영화를 하고, 이후 10년은 극장에서 매일 영화를 보다가 생을 마감하면… 이보다 좋은 삶이 있을까 싶다.
어떻게 이토록 가열차게 지속할 수 있는 건가?
배우를 직업으로만 여겼다면 이 정도의 에너지와 열정은 생기지 않았을 것 같다. 오래전에 매너리즘에 빠졌을 테고. 그런데 나는 촬영하는 과정에서 영감이 필요할 때도, 지쳐서 쉬고 싶을 때도 극장에서 영화를 봐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이다. 이제는 쉬엄쉬엄 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좋은 작품을 보면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는 생각에 눈이 번뜩 뜨인다. 가끔 궁금하다. 멋진 영화를 봐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내게도 올까? 그때 나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직은 영화와 연기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올해의 작품 <소주전쟁>과 <협상의 기술>은 ‘돈’과 ‘돈을 좇는 사람들’이라는 소재를 내밀하게 풀어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두 작품에 임하던 시기의 지배적인 생각은 무엇이었나?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지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나. 내겐 영화고, 누군가에게는 가족일 테고, 아니면 자아실현인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가 돈일 수 있고, 이는 꽤 보편적인 생각이라는 걸 인식한 시점이 있다. 이후 그럼 많은 돈을 벌고 싶고,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가치를 두는 인생이 투영되는 작품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이는 역설적으로 돈이 전부가 아닌, 삶에는 또 다른 가치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고.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만난 두 작품이라 더 반가웠다.
기업의 인수 합병(M&A)를 주도하는 점에서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깊이 파고들면 <소주전쟁>의 ‘최인범’과 <협상의 기술>의 ‘윤주노’는 무척 다른 사람이다. 최인범이 돈에 대한 열망으로 꽉 찬 인물이라면, 윤주노 팀장은 돈을 가장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다.
맞다. 인범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좇는 사람이다. 그 반면에 윤주노는 돈의 무게감과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다. 또 자신의 판단이나 결정에 따라 많은 사람의 먹고사는 일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깊은 인간애를 지닌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윤주노가 이상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다. 무엇에도 휩쓸리지 않고, 가장 인간적인 선택을 해나간다는 점에서.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계속 현명한 판단을 하는 모습이 내가 연기한 캐릭터지만 닮고 싶을 정도로 멋졌다. 어떤 면에서는 초월적 인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선택의 순간마다 그처럼 현명해지자고 생각하지만, 쉽지 않다. 하하.
관객이 두 편의 작품을 보는 사이 올해 또 다른 작품 두 편을 촬영하는 중이다.
두 작품이나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전작이 많은 사랑을 받아 이어가는 다음 시리즈라는 점에서도 배우로서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더 특별하고 정신없는 2025년을….(웃음) 2주 전에 <두번째 시그널> 촬영을 끝냈고, <모범택시 시즌3>는 계속 촬영을 이어가는 중이다. 올해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벌써 9월이라니. 부국제가 코앞이라니!(웃음)



브라운 팬츠 Fendi, 슈즈 Loro Piana.


<두번째 시그널>은 제작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엄청난 관심을 모으는 중이다. 끊임없이 “<시그널> 다음 시즌은 언제 나와요?”라고 묻던 이들의 열망이 확신에 찬 기대가 되었다.
그 질문을 진짜 많이 들었다. 그럼 매번 “제가 쓰는 게 아니라서(웃음) 모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답하고. 나 역시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다 보니 쉽지 않겠다고 짐작했었다. 10년 가까이 지났으니까. 그런데 그 숱한 질문들이 결국 성사시킨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님도 구석에나마 작은 불씨를 살려두신 것 같고. 미리 힌트를 주자면, 대본이 그야말로 놀라움의 연속이다. 아마 공개되면 매회 정신 못 차리고 보지 않을까 감히 예상해 본다.
한편 <모범택시>는 이제 꽤 친근한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더 긴 시리즈로 이어갈 수 있겠다는 기대도 생기고.
첫 시즌에는 배우로만 임했다면, 시즌이 거듭될수록 제작자나 프로듀서 마인드가 더해지는 것 같다. 지금은 ‘다음 시즌을 하게 되어 너무 좋다. 열심히 해야겠다’ 하는 마음으로 끝낼 수 없는 느낌이랄까. 합당한 존재의 이유를 감독님, 스태프들과 같이 고민하게 된다. <모범택시>를 하면서 생긴 목표가 있는데, 한 캐릭터로 찬찬히 시청자들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것도 근사한 일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영화 활동을 이어왔다. 애정이 가는 영화의 GV도 하고, 작은 영화관을 찾아다니는 유튜브 채널 <제훈씨네> 촬영도 했다고 들었다.
드라마 두 편을 동시에 찍다 보니 시간을 내기가 쉽진 않았는데, 그 와중에 해외 로케 촬영을 갔을 때 잠시 틈이 나서 찍어둔 게 있긴 하다. 해외에서 영화 보는 즐거움 또한 놓칠 수 없으니까.(웃음) 그리고 GV는 워낙 하는 것도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 마침 <씨네21> 특별전으로 좋아하는 영화를 같이 보고 얘기할 기회가 생겨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그때 고른 영화 <지구를 지켜라!>의 영어판 리메이크작 <부고니아>를 부국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은 거다. 게다가 장준환 감독 님이 GV를 하신다니, 안 갈 이유가 없어서 함께하게 되었다. 영화도 기대되고, GV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
진정한 씨네필의 삶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좋아하는 영화를 놓치지 않으려는 열성이 엿보인다.
부국제도 앞뒤로 촬영 일정이 있어서 당일치기로 가야 하는데, 그저 신난다.(웃음) 씨네필에게 감독의 말을 통해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듣는 것만큼 재미있는 게 또 없으니까. 평소에 유튜브에서도 영화 제작기나 감독 코멘터리 보는 거 되게 좋아한다. 아니면 고양이나 강아지 영상. 그게 전부다.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의 어떤 면을 좋아하게 된 건가?
2003년이었다. 공 사장 안전모를 쓴 웬 남자가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포스터를 보곤 ‘뭐지? 웃긴 영화인가?’ 하고 호기심이 생겨서 티켓을 끊었다. 그리곤 시작부터 누군가를 납치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는데 ‘이거 심상치 않다’ 싶더라. 저 사람이 왜 저럴까 그러다 안타까워졌고, 마지막 반전에 선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듯했다. 한국 영화 중 이런 유의 블랙코미디나 SF영화를 본 적이 있었나?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흥행이 안 되는 게 아쉬울 정도로. 되게 재미있는데 왜 안 보지 싶은.(웃음) 돌이켜보면 한국 영화가 다양성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계속 회자되는 거고. 얼마 전에 GV를 준비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보니 영화가 또 달리 해석되더라. 주인공 ‘병구’(신하균)의 시점에서 보면 너무 가슴 아픈 이야기인 거다. 플래시 백으로 보이는 그의 성장 과정에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이면이 담겨 있지 않나. 나온 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신선하고 흥미로운 작품인 것 같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를 흠모해 왔다는 말을 남긴 적이 있다. 그때의 영화들이 가진 힘이 무엇이라 생각하나?
당시엔 작가 겸 감독이 많았던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건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생각으로 영화를 직조할 수 있다는 것이지 않나. 그 덕에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영화들이 탄생한 것 같다. 또 창작에 대한 자유와 열정도 엄청나게 팽창하던 시기이지 않았나 싶고.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열성을 다하던 이들이 당시 한국 영화의 확장을 이끈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맞다. 그래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품는 당시의 한국 영화가 몇 편쯤 있을 거다.
말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다. <지구를 지켜라!>는 물론이고, 뻔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박찬욱, 봉준호, 최동훈 감독의 초기작들은 지금도 최고의 영화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다. 이분들이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작품을 내놓는 모습을 보면 존경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다음 세대 감독들의 더 확장된 세계도 만나보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아 아쉬울 뿐이다.
이 대화가 포럼 형태로 나아가는 듯하다. 주제는 ‘한국 영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이할 수 있을까?’(웃음)
(웃음) 배우로서 갖는 고민만큼이나 많이 하게 되는 생각이긴 하다. 영화제작 편수가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영화관에 가는 데 소극적인데, 어떻게 하면 영화관이 다시 관객으로 북적일 수 있을까 고민한다. 그래서 쉼 없이 작품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라도 열심히 해보려고.
급기야 영화관을 만들고 싶은 생각까지 하고 있다고? 유튜브 채널 <제훈씨네> 에서 언젠가 내 영화관을 갖고 싶다는 바람을 밝힌 적이 있다.
배우로서 꿈이 평생 연기하는 거라면, 관객으로서 궁극적인 목표는 나의 영화관이 아닐까 싶다. 보고 싶은 영화를 매일 볼 수 있는 곳.
어떤 영화관을 꿈꾸나?
작은 동네 영화관인데, 관은 2개 정도. 클래식하게 실물 티켓을 받을 수 있는 매표소도 있어야 한다. 매점은 팝콘, 핫도그, 콜라 같은 영화관의 클리셰 메뉴로 구성할 생각이다. 그리고 한편에 영화 서적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 옆엔 굿즈 숍도 있어야 한다. 미술관처럼 영화관에서도 작품을 보고 나와서 바로 굿즈 숍에 들르는 즐거움이 있으면 좋으니까.
아무래도 작은 영화관으론 안 될 것 같다. 이름은 ‘제훈씨네’인가?(웃음)
영화관 이름이기엔 좀 노골적이라.(웃음) 공모해야겠다. GV 할 때 보면 우리나라 씨네필은 참 예리하고 창의적인 것 같다. 그런데 영화관 만드는 상상을 하니까 되게 설렌다. 잠깐 환상의 세계에 다녀온 기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