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으로, 스크린으로, 영화제로.
배우 전소니와 이유미의 마음이 닿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

이유미 브로큰 튈 슬리브리스 드레스 Rokh, 링 Hirotaka, 슈즈 Gianvito Rossi.

11월 7일 공개를 앞둔 넷플릭스 시리즈 <당신이 죽였다>가 부산국제영화제 온 스크린 섹션에 선정되어 부산을 찾을 예정이에요.
부산국제영화제는 늘 제게 싱그러운 열정을 느끼게 해요. 이른 아침부터 극장 앞에 줄을 서고, 예매에 성공했는데도 상영 시간을 놓쳐서 울적해하던 20대 초반의 서툴던 추억이 있는 곳이에요.(웃음) 올해 부산에서 <당신이 죽였다>를 상영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극장에 모인 관객이 작품에 더 몰입해줄 것 같아 기대되고, 큰 스크린을 통해 제 표현들이 상세하게 보일 거란 생각에 긴장도 돼요. 작품을 처음 선보이는 순간이 여전히 제일 떨리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부산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이 죽였다>는 죽거나 죽이지 않으면 벗어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살인을 결심한 ‘은수’(전소니)와 ‘희수’(이유미)가 예상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며 벌어 지는 일들을 그리죠. 희수의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조금 조심스러웠어요. 이 이야기를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싶었거든요. 이정림 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이런 고민을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이 어느 날 시 한 편을 담은 편지를 건네주시는 거예요. 화자의 심리가 느껴지는 그 시를 읽고 나니, 이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후 편지를 고이 간직하며 촬영하는 동안 수시로 펼쳐 봤어요.
어떤 시인지 궁금하네요.
폴레트 켈리의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목처럼, 화자가 남편에게 꽃을 선물받는 일이 반복되는 가운데 다른 사건들이 벌어져요. 그 내용이 희수의 상황과 맞닿아 있지 않나 싶었어요.
희수는 ‘남편의 반복되는 폭력으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인물’이라고 소개되어 있어요. 그의 마음을 깊이 살피고 표현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대본을 읽고 희수의 모습을 머릿속에 시각적으로 그려봤을 때, 그가 느꼈을 감정이 더 강하게 와닿더라고요. 희수에 대해 고민하면서 ‘왜?’라는 의문을 계속 품다 보니 마음이 좀 아팠어요. 희수는 섣불리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고, 그의 아픔을 표현하면서 제가 감히 상처받아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희수의 아픔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저 자신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감정적으로 어려운 신들을 이겨냈어요.
희수의 아픔을 본인만의 언어로 묘사한다면요?
음… 가느다란 하얀 실 같아요. 실은 조금만 당겨도 끊길 것 같지만, 보기보다 질겨서 단번에 끊어지지 않잖아요. 희수의 아픔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아픔을 극복해 나갈 힘이 희수에게 있다고 느꼈어요.
희수 곁에는 그를 돕는 단짝 은수가 있죠. 전소니 배우와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아요.
이번 작품으로 소니 언니를 처음 만났어요. 일단 친해지려고 노력했죠.(웃음) 궁금한 게 많아서 사소한 질문을 많이도 했는데, 그때마다 언니가 성의껏 재미있게 대답해주더라고요. 대화를 자주 한 덕분에 언니와 빨리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아까 전소니 배우가 이유미 배우의 미담을 들려줬어요. 은수와 희수의 모형이 담긴 스노볼을 선물받아 기뻤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전 좀 속상했어요. 스노볼을 주문 제작했는데, 기대만큼 예쁘지 않았거든요. 심지어 최근에 언니가 스노볼 속 아이들이 녹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줬어요. 아까워…(웃음) 그래도 선물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준다면 좋겠네요.
두 배우가 사이를 좁혀가며 표현한 희수와 은수의 서사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돼요. 불행에서 벗어나려 하는 두 여성의 우정을 보여준다고 들었어요.
살아가다 보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존재’를 만날 때가 있는 것 같더라고요. 친구의 성장이 내 성장을 이끌고 그 덕분에 친구도 좀 더 자라는 거죠. 희수와 은수도 함께하면서 점차 성장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를 구원해나가요.
두 인물의 관계가 특별할 거란 생각이 들어요. 타인을 구원하려는 마음이 쉽게 생기는 게 아니니까요.
그렇죠. 아무리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많은 것을 공유해온 소울메이트라도 그런 마음을 갖기는 어려울 거예요. 그래서 구원이란 단어가 참 무겁게 다가와요. 제 생각엔 누군가를 구하고 싶다는 말은 그 사람을 깊이 사랑해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사랑을 통해 힘겹게 내비친 은수의 구원이 느껴진 순간, 희수도 구원을 되돌려주겠다고 결심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서로를 구원하려는 마음을 주고받을 때, 최대치의 용기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구원하려는 마음을 통해 희수가 상처를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죽였다> 이전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2009년 데뷔 이후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해왔어요. <오징어 게임>처럼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시리즈도 있고, <박화영>과 <우리는 천국에 갈 순 없지만 사랑은 할 수 있겠지> 같은 독립영화도 눈길을 끌어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시간이 되게 빨리 지나간 것 같아요. 그동안 출연한 작품 목록을 보면 놀랍기도 해요. ‘이렇게나 많이 했네! 세상에, 내가 잠을 안 잤나?’ 하면서.(웃음) 치열하게 살아왔구나 싶은데, 결국에는 좋은 기억만 남는 듯해요. 세세히 들여다보면 조바심이나 슬픔을 느낀 순간도 분명 있겠지만, 모든 경험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다가와서 행복했다는 느낌만 전하더라고요.
꾸준히 행복하게 활동을 이어갈수록 익숙해지는 점도, 매번 새롭게 느껴지는 점도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새 작품에 들어가서 첫 촬영을 하는 날, 현장에서 무엇을 파악하고 신경 써야 하는지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많은 걸 보려고 할수록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껏 편한 마음으로 현장에 간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3년 전 마리끌레르와 인터뷰하며 “많은 고민과 상상을 하면서 여러 경우의 수를 만들어 대비하고 촬영장에 간다”고 말한 게 떠오르네요.
요즘도 그래요. 작품마다 현장도, 함께하는 사람들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실수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준비하는 거예요. 그래야 촬영할 때 감독님이나 다른 배우들의 생각에 따라 유연하게 맞춰가기 수월하기도 하고요.
준비를 철저히 한 이후, 촬영이 시작되면 대담하게 임하는 편이죠? <Mr. 플랑크톤>을 만든 홍종찬 감독이 이유미 배우에 대해 “목표가 보이면 모든 걸 내 던지고 겁 없이 달려든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겁이 아예 없진 않아요. 번지점프를 할 때 “하나, 둘, 셋 하면 뜁니다!”라는 말이 두려움을 더하듯이, 무언가를 하기에 앞서 너무 많이 생각하면 오히려 주저하게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슛 들어가면 머릿속을 비우고 그냥 하는 편이에요. ‘충분히 고민했으니까 아무 걱정 말고 해. 너 겁쟁이 아니야!’ 하면서요.(웃음)
겁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좋은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요. 작품을 본 사람들이 제 연기를 만족스러워하고, 무수한 고민 끝에 만들어낸 표현을 알아봐주기를 바라요. 더 다양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기도 하고요. 연기가 저한테는 무척 재미있는 일이에요.
지난 인터뷰들을 읽어봤는데, 연기가 재미있다는 말을 그동안 참 많이 했더라고요.
맞아요. 어린 나이에 오디션을 보러 다닐 때부터 그랬어요. 성의가 부족한 말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이기 때문에 계속 말하는 거예요. 줏대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으로.(웃음) 긴 시간 동안 재미를 느끼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신난다’는 감정은 순간적인 것이지 계속 이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전 예전부터 연기에 대한 제 마음이 하루이틀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느꼈어요. 왠지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 것 같았고요.
연기에 이토록 깊이 매료된 계기가 있었어요?
초등학생 때 가족이랑 영화관에 자주 갔어요. 제가 심심해하거나 토라져 있을 때, 부모님이 저를 극장에 데려가주셨거든요. 극장이 당시의 제게는 놀이터이자 치유와 기쁨의 공간이었던 거죠. 그러다 어느 순간, 스크린 속 캐릭터가 배우의 연기라는 사실을 인지했어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멋진 거짓말쟁이가 있다고?’ 싶더라고요. 제가 배우의 거짓말에 속아서 큰 감동을 느낀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이 경험을 계기로 배우라는 직업에 관심과 동경이 생겼고요. 어린 시절의 제가 그랬듯이, 지금 제 연기를 보는 사람들도 근사한 사기를 당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욕심을 내게 돼요.
동경하던 직업을 갖게 된 요즘은 이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해나가고 있어요?
물론 체력적으로 힘든 순간이 있지만, 아직까진 크게 지친 적이 없어요. 언젠가 지칠 거란 우려도 하고 싶지 않고요. 그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복 받았다’ 싶기도 해요. 새벽까지 촬영하고 돌아와 침대에 누워 있으면, 꿈꿔온 일을 열심히 해나가고 있다는 게 실감 나서 벅차오르더라고요. 그 감정이 다음 날 아침 현장으로 다시 향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줘요.
한 사람의 성향은 어떤 직업을 갖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잖아요. 배우가 되었기에 본인에게 생긴 변화가 있나요?
다양한 캐릭터를 연구하고, 여러 현장을 겪으면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깨닫게 돼요. 물론 사람은 하루하루 바뀌기 마련이지만, 저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있어요. 그 경험이 쌓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예전엔 자주 흔들렸다면,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감을 느껴요. 저만의 리듬으로 나아가는 중인 것 같아요.
지금 이유미 배우의 리듬은 어떤 모양인가요?
‘사뿐사뿐’이요.(웃음) 가볍게 걸으면서 주변 풍경을 눈에 많이 담고, 마음에 새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빨리 달리지는 않으려고 해요. 숨이 차거나 넘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좀 더 느린 걸음걸이를 찾는 게 앞으로 해야 할 숙제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한 걸음씩 천천히, 무게를 실어 나아가면서 더 많이 배워가려고 해요. 깊고 넓은 배움이 저를 오래오래 연기하게 해줄 거라 믿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