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끝까지 남는 건 서로 주고받은 마음뿐일 거예요.”
삶의 길목에서 마주하는 것들을 기꺼이 끌어안으며,
자연스레 흘러가는 저스틴 민의 여정.


팬츠 Pref, 슈즈 Elcanto.

영화 <흐르는 여정>이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비전 섹션에 선정되어 부산을 찾았습니다. 지난 5월 서울을 방문한 이후 네 달 만에 다시 내한했어요.
한국에 올 때마다 점점 더 집처럼 느껴져서 기쁩니다.(웃음) 부산을 찾은 일도 의미가 커요. 부산은 제 어머니의 고향이고, 15년 전쯤 외할아버지를 뵈러 온 게 마지막 방문이었거든요. 그 후 안타깝게도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부산에 다시 와서 머무는 동안 그분에 대한 기억이 많이 떠올랐어요. <흐르는 여정>이 삶과 죽음, 세월의 흐름과 맞닿아 있는 작품이라 더욱 깊이 와닿는 날들이었어요. 영화와 영화제를 통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이번 영화를 보며 웃고 운 관객들과 대화하는 시간도, 시차 때문에 아침 일찍 눈을 떠 해운대 해변을 거닌 순간도 참 좋았어요.
영화제 기간에 열린 마리끌레르 아시아스타어워즈에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었죠.
특별한 밤이었어요. 사랑하고 존경하는 배우와 감독, 예술가들로 가득한 공간에 함께할 수 있었죠. <애프터 양>의 코고나다 감독님과 재회하게 되어 더더욱 뜻깊었습니다. 감독님의 옆자리에 앉아 한국 관객이 우리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영화제를 계기로 한국을 다시 찾아올 수 있는 게 얼마나 각별한 일인지 이야기 나눴어요. 제가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홍보한 영화가 <애프터 양>인데, 이 자리를 통해 하나의 큰 순환이 완성된 듯했습니다.
이날 코고나다 감독님이 저스틴 민 배우에게 ‘아시아 와이드상’을 수여하셨어요.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하는 아시아계 배우로서 느끼는 아시아 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아시아 영화는 ‘우리’에 의한, ‘우리’를 위한 것이에요. 아시아인이 직접 쓰고 찍으며 아시아 관객을 대상으로 할 때도 있죠. 물론 할리우드도 아시아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의 이야기를 진정성 있게 다루기 위해 나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하지만 아시아 영화는 우리의 시선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에, 작품 속 캐릭터들을 보다 온전한 인간으로 그려낼 수 있어요. 그게 제가 아시아 영화, 특히 한국 영화에 참여하면서 가장 흥미를 느끼는 지점입니다. 한국 영화 산업에서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에요.
저스틴 민 배우의 첫 한국 영화 주연작이 <흐르는 여정>이죠. 사별한 남편과 살던 주택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온 ‘춘희’(김혜옥)와 이웃 주민 ‘민준’(저스틴 민), 피아노를 좋아하는 소년 ‘성찬’(박대호)이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에요. 강릉을 비롯한 동해안 일대에서 촬영했다고요.
강릉에 간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한국의 새로운 모습을 접할 수 있어 놀라웠어요. 분주한 서울과 달리 아주 고요한 곳이더라고요. 마을이 작다 보니 거의 매일 같은 식당에 갔고, 한 아파트 단지에서 촬영을 이어가면서 주민들과 안면을 트기도 했어요. 강릉이라는 공동체 속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정말, 정말 좋았습니다.
지역 고유의 분위기처럼 촬영 현장에도 편안한 분위기가 감돌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땠나요?
맞아요. 평화로운 현장이었습니다. 항상 “밥 먹었니?” 하면서 저를 세심하게 챙겨주신 김혜옥 선생님, 연기에 처음 도전하며 현장에 활기를 불어넣어준 박대호 배우를 비롯한 모두가 즐겁게 임했어요. 촬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새벽의 바닷가에서 민준, 춘희, 성찬이 마지막으로 함께하는 장면을 찍던 일이 생각나요. 붉은 해가 떠오르고,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든 해변을 배경으로 세 인물이 서로 꼭 안아 주는 장면이 제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줬어요. 그 순간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세 인물의 인연은 춘희의 옛집에 있던 그랜드피아노에서 비롯돼요. 민준은 피아노를 익숙하게 다루는 지휘자죠. 김진유 감독님이 <흐르는 여정>의 시작점에 대해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류이치 사카모토가 지휘하는 손짓이 수어와 비슷하다고 느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만큼 민준의 지휘를 섬세하게 표현해야 했을 것 같아요.
감독님과 지휘자 연기에 관해 대화를 나눌 때면 굉장히 긴장되더라고요. 민준이 무대에서 지휘하는 장면은 제 인생에서 가장 떨리는 촬영 중 하나였습니다. 그날 땀을 뻘뻘 흘렸어요.(웃음) 주말마다 서울로 올라가서 전문 지휘자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실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완성할 수 있었어요. 지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 형식이라는 걸 느끼게 해준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직업적 특성 이외에 민준을 연기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점이 있다면요?
이번 영화에는 민준을 비롯한 인물들의 전사가 크게 드러나지 않아요. 그 점에 집중하면서 민준의 이야기를 스스로 채워 넣으려고 했어요. 민준은 독일로 입양되었다가 엄마를 찾기 위해 무작정 한국으로 왔는데, 그렇다면 그의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은 어땠을지 고민하는 식이었죠. 이를 통해 제가 이해한 민준은 삶을 낙천적으로 바라보는 인물이에요. 어떤 고난이 닥쳐도 자신을 희생자로 여기지 않고, 주변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려고 하거든요. 그게 제가 그동안 맡은 캐릭터들 중 민준을 특히 아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잠시나마 민준의 입장이 되어보니, 그의 마음가짐을 저에게도 적용해보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고요. 사람의 선함을 믿으려는 태도를 민준에게서 배웠어요.
민준뿐 아니라 <흐르는 여정>의 모든 인물이 선한 인상을 줍니다. 악한 존재나 자극적인 사건 없이, 잔잔하게 펼쳐지는 이야기가 이상적이라고 느꼈어요. 요즘에는 이런 작품이 드물기도 하고요.
그렇죠. 아마 이 세상에 무해한 사람이 실존한다는 믿음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주변을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가까이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길에서 스쳐 지나간 행인, 커피를 내려주는 바리스타, 과외 선생님 같은 이들을요. 물론 현실은 어두울 수 있지만, 끊임없이 선한 일을 하는 존재도 분명 있어요. 선량함과 다정함이 여전히 있다는 걸 이번 영화가 일깨워주기를 바랍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삶의 어떤 것도 당연히 누릴 자격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어요.
매 순간, 모든 것을 선물로 여기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삶의 선물들이 전하는 경이로움에 늘 매달리고 싶어요.





앞서 언급했듯, <흐르는 여정>은 삶과 죽음을 다루는 작품이기도 해요. 비전 시상식에서 2개의 상을 수상하며 “좋은 죽음과 좋은 삶을 동시에 사유하게 만드는 어려운 일을 결국 해낸다”라는 호평도 받았죠. 이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며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나요?
삶과 죽음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인지했어요.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고, 삶의 하루하루는 죽음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날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자주 꺼내 지만, ‘어떻게 죽고 싶은가’에 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아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회피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하지만 저는 죽음을 인정하고 대면해야 살아가는 법을 진정으로 배울 수 있다고 믿어요. 삶이 얼마나 유한하고 취약한지 자각하는 순간, 비로소 깨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삶의 덧없음 속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되는 거죠.
그 점을 이해한다면 우리 삶에 어떤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요?
이번 영화를 만드는 동안, 나아가 그 이후에도 계속 되새기는 생각이 있어요. ‘인생은 짧지만, 우리가 맺는 관계만은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인간적인 연결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부와 명성, 경력 같은 것들은 언젠가 사라지고 말잖아요. 결국 끝까지 남는 건 서로 주고받은 마음뿐일 거예요.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여준다는 것, 그게 <흐르는 여정>이 우리 삶에 전하는 미덕이라고 느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동안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해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고민은 온라인 플랫폼 ‘서브스택’에 올린 글에서도 엿볼 수 있었어요. 일상 속 순간들이 삶을 들여다보는 사유로 확장된다고 느꼈어요.
그 글들은 제가 꾸준히, 거의 매일 써온 일기의 연장선상에 있어요. 머릿속에 복잡하게 뒤엉켜 있는 생각을 글로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그 안에서 일관성을 발견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더라고요. 이 과정이 저 자신과 주변 세상을 면밀히 관찰하고 성찰하게 해줍니다. 삶의 속도를 늦추고,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죠. 그래서 여전히 노트북 대신 펜과 종이로 천천히 써나가는 걸 선호해요.
글을 쓰는 것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것도 좋아한다고요. 그 시간을 통해 본인의 내면을 살피고, 타인의 마음까지 헤아리면서 무엇을 얻고 있나요?
‘완전히 특별한’ 사람은 없다는 걸 알아가고 있어요. 우리는 사실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삶에 보편적으로 공감한다는 점을 인지하는 거죠. 또 여러 감정에 대한 가르침을 얻기도 합니다. 모두가 그렇듯, 저 역시 슬프거나 화가 나서 힘들 때가 있어요. 마주하기 어려운 감정이지만, 기꺼이 다가가려 합니다. 감정은 일시적인 것이니 제 몸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면 결코 저를 지배할 수 없다는 걸 배워가고 있거든요. 삶이란 기쁨과 슬픔, 사랑과 고통 등이 어우러진 집합체이기에 살아 갈 가치가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내어주는 경험이 지닌 힘을 믿어요.
다양한 감정을 직면하는 경험이 작품 속 캐릭터들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영향을 미치기도 하죠?
맞아요. 사람은 저마다 여러 면을 가지고 있지만, 그걸 깊이 탐구하고 표현할 기회는 드물잖아요. 타인이나 사회가 덧씌운 이미지로 인해 자신을 당당히 보여주지 못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연기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거나 실제로 드러내지 않던 모습들을 어떻게든 끌어내게 해요. 예를 들어 저는 꽤 내성적이고 때로는 진지한 편이지만, 작품 안에서는 자신감 넘치거나 장난스러운 모습도 보여줄 수 있죠. 그렇게 제 안의 다양한 면을 꺼내고, 조금 이상하거나 어두운 부분까지도 포용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이 일을 해나가는 과정이 스스로를 더 사랑하게 만들어줘요.
배우로서 살아온 10여 년의 시간이 본인의 삶에도 여러 변곡점을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인생의 어느 시점을 지나고 있다 느끼나요?
수용의 단계에 있는 것 같아요. 제 삶과 커리어는 여태껏 ‘더욱’을 추구하며 움직여왔어요. 더 높은 성적, 더 좋은 직업, 더 많은 돈과 일… 물론 그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이제는 ‘더욱’이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요. 더 나은 것에만 몰두하면서 현재를 잊고 싶지 않아요. 오늘의 저는 제가 원할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저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멋진 동료들과 열정을 쏟아낸 이야기를 세상과 나눌 수도 있죠. 지금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려 하면서 나아가는 중이에요.
삶의 경로를 정해두지 않은 채 그저 길을 따라가는 거네요.
인생이란 여정은 길을 억지로 열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애써본 적이 있지만, 뜻대로 된 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제 삶은 꿈꿔온 것보다 훨씬 좋은 방향으로 흘러왔어요. 돌이켜보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들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유기적으로 일어났어요. 우연히 마주한 기회나 사람에게 ‘Yes’라고 답했을 때, 특별한 순간들이 탄생했죠. 앞으로도 마음을 열고, 저를 찾아올 것들을 맞이할 수 있었으면 해요.
자연스레 흘러가면서도 계속해서 붙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요?
예술과 연기에 대한 설렘이요. ‘이젠 지겹다’ 하는 권태감은 절대 품고 싶지 않아요. 시간이 흐를수록 ‘삶의 어떤 것도 당연히 누릴 자격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어요. 그게 제 가치관을 지켜가는 데 큰 도움이 돼요. 매 순간, 모든 것을 선물로 여기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삶의 선물들이 전하는 경이로움에 늘 매달리고 싶어요.
문득 궁금해지네요. 최근에 우연히 발견한 아름다운 순간이 있나요?
얼마 전, 공항 라운지에 있을 때 일흔 살쯤 된 듯한 노부부가 제 앞에 앉아 계셨어요. 서로를 향해 내내 미소 짓고, 손을 꼭 잡으며 키스를 나누는 모습이 참 아름답더라고요. 마치 둘만의 작은 세계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인연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어요. 수십 년을 함께했을 수도, 최근에 만난 사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두 분이 보여준 노년의 사랑은 제게 희망을 안겨줬습니다. 기쁨은 어떤 나이에도,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느낄 수 있다는 걸 실감했어요. 저도 나이 들수록 그렇게 많이 웃으면서 살고 싶어요. 다가올 내일들이 무척 기대됩니다.


슬리브리스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