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실사영화 <초속 5센티미터>의 속도.

“있잖아, 초속 5센티미터래. 벚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시속 5킬로미터래. 미나미타네 발사장까지 가는 속도.” “서른이면 딱 지구 한 바퀴를 돌았을 나이네요. 태어나서 줄곧 걸었다고 친다면 서른까지 그 정도 거리를 걸은 셈이죠.” 시간과 거리로 자신의 마음을, 그리고 삶의 여정을 그려 내며 큰 사랑을 받은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가 2025년, 실사영화로 다시 돌아왔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흐르는 ‘타카키’의 시간을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과 주연배우 마츠무라 호쿠토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더 섬세하고 유려하게 완성했다. 12월, 국내 정식 개봉을 앞두고 감독과 배우를 만나 영화의 시간과 자신의 속도에 대해 물었다.

오쿠야마 요시유키 재킷과 팬츠 모두 Golden Goose.
마츠무라 호쿠토 재킷과 팬츠 모두 Jil Sander.
재킷 Jil Sander.
재킷과 팬츠 모두 Golden Goose.

<초속 5센티미터>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대표작인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선보이는 작품입니다. 원작이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던 터라, 실사영화 제작 소식이 나올 때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는데요. 두 분은 이 작품의 어떤 면에 이끌렸나요?

오쿠야마 요시유키 감독(이하 오쿠야마) 몇 년 전, 다마이 히로마사 프로듀서에게 실사영화 제작 제안을 받고 원작을 다시 봤어요. 이 작품을 처음 본 고등학생 때와는 다른 부분이 보이더라고요. 어른이 된 타카키의 불안이나 초조감, 조급함 같은 불완전 함이 30대에 접어든 제게도 있는 모습이니 나를 투영해서 영화를 만들어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마츠무라 호쿠토 배우(이하 마츠무라) 저 역시 원작을 좋아한 관객 중 한 명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와 동시에 두렵기도 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특별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작품이잖아요. 뭔가 닿을 수 없는 신비한 존재 같달까요. 그러다 오쿠야마 감독님을 비롯한 <초속 5센티미터> 팀과 만나고 나서야 안심하게 됐어요. 이들과 함께하면 원작만큼 멋진 하나의 꽃을 피울 수 있겠다, 그렇게 된다면 무척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원작자인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잘 만들어달라는 간단한 인사만 건네고, 각색을 비롯한 모든 제작 과정을 오쿠야마 감독에게 위임했다고 들었어요. 애니메이션을 실사영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가장 오래 고민한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오쿠야마 원작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인 거리와 시간을 어떻게 그려낼지는 실사영화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어요. 예를 들어 타카키가 이와후네역으로 가는 길에 눈이 내려 기차가 멈추는 장면이 있잖아요. 멈춘 기차 안에서 그가 느꼈을 고독은, 실제로 정차한 시간이 몇 시간에 불과했다 하더라도,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을 거예요. 이렇듯 실제 흐르는 시간과 느껴지는 시간의 차이는 원작에서 많이 표현되어 있는데, 그건 시간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죠.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도무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상황이나, 반대로 심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처럼 거리와 시간이 인간관계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잘 표현해내고 싶었어요. 눈이 내리는 속도를 어떤 장면에서는 천천히 내리게 하거나, 벚꽃이 흩날리는 속도도 그때그때 인물의 감정에 맞닿도록 표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주인공인 타카키를 연기할 배우를 찾는 것 또한 주요한 고민 중 하나였을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 타카키와 마츠무라 배우를 연결 짓게 된 순간이 궁금합니다.

오쿠야마 마츠무라 배우를 처음 만난 날이었어요. 말할 때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였어요. 생각을 단번에 내뱉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와 대화한 다음에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태도에서 오는 흔들림이 보였고, 그 점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극 중에서 타카키는 어릴 때부터 계속 이사를 다니면서 마음의 고향을 찾지 못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도시를 헤매죠. 그런 모습이 마츠무라 배우와 겹치는 부분이 있겠다 싶었어요.

마츠무라 어릴 때 본 원작에서는 덧없고 그리운 감정을 크게 느꼈다면, 실사영화를 위한 <초속 5센티미터>의 시나리오에선 30대가 된 타카키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어요. 저 역시 막 30대에 접어들며, 마치 안갯속을 지나는 듯한 시기를 겪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의 내가 타카키와 더 가까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 했고요.

누군가는 <초속 5센티미터>를 로맨스물이라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10대부터 30대까지, 한 사람이 겪어내는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이야기 입니다. 그 흐름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오쿠야마 한 인물을 시기에 따라 총 3명의 배우(마츠무라 호쿠토, 아오키 유주, 우에다 하루토)가 연기하기 때문에 이들이 하나의 타카키로 보이게 하는 게 저에겐 도전이자 미션이었어요. 각 시기의 타카키를 제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배우들 역시 표현하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해 시나리오 외에 별도의 텍스트북을 만들었어요. (실제 배우, 스태프들과 공유했던 텍스트북을 꺼내 보이며) 이런 책인데요.

와, 이보다 세밀한 일대기가 있을까 싶을 정돈데요. 부제를 타카키의 모든 것이라 해도 될 정도로요. (텍스트북에는 시기별로 타카키가 겪는 감정 변화뿐만 아니라, 당시의 모습과 화법, 주변 사람들, 환경, 심지어 타카키가 머무는 공간의 구성이나 교통편의 형태까지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마츠무라 처음엔 원작을 좋아한 사람으로서 팬심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아니야, 이거 공부잖아’ 싶더라고요.(웃음) 오쿠야마 배우들이 불안감 없이 연기할 수 있도록 각본에는 그려져 있지 않은 타카키의 인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싶었어요. 열심히 만들었습니다.(웃음)

영화를 보며 이 작품의 아름다움에는 음악 역시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음악 작업 역시 음악 감독 에자키 아야타케와 함께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했다고 들었어요.

오쿠야마 에자키 아야타케의 음악은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사운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이 이번 작품 안에서 저의 방향성과 맞는다고 생각해 그와 작업을 함께 하게 되었는데, 이번엔 좀 새로운 작업 방식을 택했어요.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음악 감독에게 각본과 이미지 플레이리스트(오쿠야마 감독이 작품의 세계관과 어울리는 약 50곡을 선별한 파일)를 공유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에자키 씨가 이미지 앨범(특정 장면에 대한 곡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음악 감독만의 해석으로 이미지화해 만든 10여 곡을 담은 앨범)을 제작했어요. 이후 매번 촬영한 영상을 공유했고, 그에 따라 곡도 점점 늘어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총 80곡의 음악을 만들었고, 이 중 30곡 정도를 영화에 쓰게 되었죠. 제가 좋아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가여운 것들>을 만들 때 작곡가 저스킨 펜드릭스(Jerskin Fendrix)와 이미지 앨범을 사전에 제작하고, 만들어진 곡을 편집하며 맞춰가는 제작 방식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하게 된 시도인데, 결과적으로 <초속 5센티미터>라는 영화와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초속 5센티미터>의 이야기 안에서 가장 결정적인 시간은 언제라 생각 하나요? 타카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요.

오쿠야마 어린 시절 소중한 친구인 ‘아카리’가 다른 학교로 전학 가게 되면서 각자 다른 곳에 살게 된다는 걸, 전화로 알려주는 장면이 있어요. 그건 타카키가 ‘소중한 사람과는 계속 함께할 수 없는 건가’ 혹은 ‘나도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겠지’ 하며 다가올 상실을 처음으로 예감하게 되는 순간이에요. 이는 ‘앞으로도 나는 필연적으로 상실감을 느낄 것이고, 무언가 잃어가겠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장면이기도 하죠. 그만큼 타카키에게 아카리와 멀어지는 건 큰 사건이자 분기점이라고 생각해요.

그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타카키에게 과거라는 시점이 굉장히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오쿠야마 타카키와 아카리의 큰 차이점이 과거를 받아들이는 태도이지 않나 싶어요. 아카리는 과거에 만난 소중한 사람이나 추억이 지금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그러니까 현재의 나는 과거의 여러 사건이 만들어준 거라 생각해요. 과거, 현재, 미래를 따로 나누지 않고 과거는 현재이기도 하고, 현재는 곧 미래이고, 모두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타카키에게 과거라는 건 일종의 그리움이랄까요. 되돌리고 싶은 건 아니지만,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생각하며 그때의 마음을 계속해서 찾고 있는 거죠. 타카키는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분명히 나누어서 보는 사람이지 않나 생각해요.

그럼 40대가 된 타카키는 어떤 모습일까요?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타카키의 삶이 이어진다면, 그의 미래는 어떨지 상상해본다면요?

마츠무라 거리의 소리나 바람의 온도 같은 것을 통해 타카키가 조금씩 회복해가는 모습이 은유적으로 나오는데요. 그래서 본래의 성정을 되찾게 될지 아니면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찌그러지고 소모되던 마음이 정리가 되면서 조금은 더 행복한 40대를 맞이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연기한 인물이라 그런지 더 행복을 바라게 되네요.(웃음)

오쿠야마 영화 말미에 건널목에서 뒤를 돌아보다가 다시 앞을 보고 걸어가는 모습이 나오잖아요. 그 이후의 타카키는 알 수 없던 불완전함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으로 작은 한 걸음을 내딛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40대가 된 타카키는 분명 앞을 바라보는 사람이 될 거예요.

두 분은 지금 어떤 시점을 바라보는 중인가요?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디에 시선을 두나요?

마츠무라 저는 미래인 것 같아요. 30대에 접어들며 드디어 출발선에 선 기분이에요. 그렇다고 과거가 명확히 정리되어 더 이상 바라보지 않는 건 아니고, 시선이 변하는 단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미래라는 것이 눈앞에 있는 느낌이 들죠. 설레기도 하고, 쉽지 않겠구나 하는 느낌도 들어요. 어떤 의미로든 요즘의 가장 큰 고민은 ‘미래의 나’이긴해요.

오쿠야마 이 작품을 제안받았을 때의 저는 과거에 대한 미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어요. 그건 아마 인생의 중간 지점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30세 전후의 나이가 정신적으로는 딱 한가운데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과거도 미래도 궁금한 시기였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만들고 나서는 지금에 집중하게 됐어요. 어떤 미래를 경험하는지에 따라 지금까지 겪어온 과거가 다르게 느껴질 수 있잖아요. 미래가 행복하다면 아무리 힘든 과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행복한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지금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이 작품의 미래를 상상해본다면요? <초속 5센티미터>가 미래의 관객에게 무엇을 전할 수 있기를 바라나요?

오쿠야마 누구나 영화를 볼 때 평소 의 고민이나 불안 같은 것을 마음 한편에 둔 채 영화 스토리에 자신을 투영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불안이나 초조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이 따뜻한 위로가 되면 좋겠어요. 대단한 깨달음을 주는 극적인 스토리는 없지만, 은근하고 은은하게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작품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마츠무라 원작인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 시기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SNS의 등장으로 달라진 사람들의 화법이나 사고방식 등이요. 그 변화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건 아니지만, 전보다 고통을 느끼거나 우울해지기 쉬운 환경이 된 게 아닌가 싶어요.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에 더욱 이 영화가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단 한 장면, 한 마디 대사에서라도 용기를 얻는 분이 있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