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틈 사이로 느리게 번져가는 한 줄기의 빛.
지금, 서서히 차오르는 문상민이라는 빛.

재킷 Dior.

니트 후디 Recto.
니트 후디 Recto, 팬츠 SONGZIO.

(중앙) 블랙 재킷 Comme des Garçons Homme Plus, 셔츠 ZIOSONGZIO, 팬츠 ZARA, 슈즈 Dior.

드라마 <은애하는 도적님아>와 영화 <파반느>까지, 올해 들어 두 작품이 연이어 공개됐죠. 요즘 제 알고리즘에 문상민 배우의 영상이 가득합니다.(웃음)

정말요?(웃음) 사실 요즘 지인들이 연락해서 그런 말을 자주 해요. 제 이름을 검색하지 않아도 제가 나온 콘텐츠가 알고리즘을 도배해버렸다고요.(웃음) 요즘 매일 기분 좋은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두 작품 모두 준비 기간이 짧지 않았고 공개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오래 준비한 작품이 하나둘 공개되고 예상보다 큰 사랑을 받아서 행복을 배로 느끼고 있어요.

<파반느>의 ‘경록’ 역으로 그동안 본 적 없던 문상민 배우의 얼굴을 발견했다는 반응이 이어지고 있어요. 작품이 공개된 날, 완성된 영화를 처음 마주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어요?

저를 온전히 드러내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하는 게 적합할 것 같은데, 조금 부끄러웠어요. 경록을 연기하는 제 모습을 무척 오랜만에 보는 거기도 했지만, 보통은 작품을 할 때 어느 정도는 저와 다른 면을 지닌 인물을 연기한다는 생각으로 임하거든요. 그런데 경록은 저와 맞닿아 있는 면이 워낙 많아서 그런지, 어떤 감정을 느꼈을 때 순간적으로 나오는 표정이나 말투에 제 본연의 모습이 많이 담겨 있더라고요. 저 같아서 부끄러웠던 것 같아요.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조금 생소했고요.

작품에 함께한 변요한 배우는 “문상민의 모든 연기가 아름다웠고, 그 연기를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진실되기 때문이었다”라고 말했어요. 그런 진실한 연기가 가능했던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해요?

첫 영화 현장이기도 했고, 저를 제외하면 현장의 스태프와 배우들이 대부분 이미 많은 작품을 경험한 베테랑이었어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솔직하게 이 순간에 임하는 것이겠구나 싶었죠. 이종필 감독님이 저를 캐스팅하신 이유도 그게 아닐까 싶었고요. 아무리 능숙하게 하려 한들 제 연기에 아성 누나(고아성)나 요한이 형(변요한)만큼 연륜이 담길 수는 없다는 걸 아니까, 매 장면마다 제가 느낀 걸 그저 솔직하게 표현하려 노력했어요.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선배들이 먼저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요.

촬영 당시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작품을 보고 난 후에 비로소 이해하게 된 감정이나 새롭게 다가온 장면도 있나요?

아성 누나와 요한이 형이 촬영하는 동안 진심으로 저를 응원해주고 있었다는 걸 느꼈어요. 어떤 장면이든 시선을 맞춰주고, 꼭 말로 하지 않아도 다정한 기운 같은 게 내내 느껴지더라고요. 솔직히 현장에서는 살필 겨를이 없어서 잘 몰랐거든요. 선배들도 그런 응원의 말이 저에게 오히려 부담으로 느껴질까 봐 일부러 표현을 아끼셨을 거예요. 선후배 관계를 떠나서 언제나 저를 같은 동료 배우로서 대해주신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이 모든 걸 뒤늦게 깨달은 거죠. 연인과 헤어지고 후회하는 사람처럼 ‘그땐 몰랐어, 이제야 알았어….’가 된 거예요.(웃음)

사전 제작 단계에서 이종필 감독과 단둘이 만나 시간을 자주 보냈다고 들었어요. 그 시간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요?

감독님은 문상민이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어 하셨어요. 주로 제가 감독님 작업실로 찾아가서 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하루는 제 집으로 감독님을 초대한 적이 있어요. 함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면서 유튜브로 고아성 누나가 부른 ‘왜 그래’ 무대도 보고(웃음) 당시에 재미있게 본 영화나 제가 출연한 작품도 보여드렸죠.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라 요즘 제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말 그대로 친구들과 할 법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자연스럽게 감독님과 가까워졌어요. 그때 저도 모르게 감독님을 “형” 하고 불렀는데, 감독님이 “형 해! 종필이 형이라고 불러봐!” 하시더라고요.(웃음) 그 시간이 굉장히 재미있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그때 나눈 대화 중에 여전히 마음에 남아 있는 말이 있어요?

감독님이 “나에게 경록은 문상민이야”라고 말해주신 적이 있어요. 촬영장 밖에서 도 저를 경록이라고 자주 부르셨거든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 작품을 준비해온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게 당시에 엄청난 용기가 됐어요. 그때 얻은 용기가 점점 자신감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그 자신감이 경록을 만들어준 것 같아요.

문득 이 작품이 문상민이라는 배우에게 수많은 처음을 안겨주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작품에 지금의 자신이기에 가능한 모습이 담겨 있다고 느끼기도 하나요?

지금의 제가 너무나 서툴고 투박한 사람이라 거침 없이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실제로 경록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저를 만나 한없이 투박해진 걸 수도 있는데(웃음), 그만큼 인물을 이해하는 데 정답은 없다는 생각으로 모든 과정에 임했어요. 촬영이 시작되면 “감독님, 다른 느낌으로 한 번 더 해볼까요?” 이런 말을 거의 하지 않았거든요. 대사를 여러 버전으로 준비해 가기보다 첫 테이크부터 제가 느낀 그대로 표현하려 했어요. 대본을 볼 때도 그날의 장면에서 중요한 감정과 키워드 정도만 숙지하고, 나머지는 전부 열어둔 채로 현장에 갔고요. 감독님도 그런 순간의 감정에 따른 연기를 기대하셨고, 그 과정에서 저를 전적으로 믿어주셨어요. 제 연기가 맞다거나 틀리다거나 하는 말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고요. “난 좋은데. 넌 어때?” 하면서 제 의견을 꼭 물어봐주셨어요.

레이어드 톱 Recto, 팬츠 LMOOD.

“경록을 통해 스물다섯의 문상민을 본 것 같다”라고 말하기도 했죠. 지금의 문상민은 경록과 어떤 점이 가장 닮았다고 생각해요?

내면에 혼란이 많다는 점이요. 저는 잘 헷갈리는 사람이거든요. 마음이 여러 갈래로 요동쳐요. 친형이 늘 하는 말인데 ‘팔랑귀’라는 표현이 딱 맞아요.(웃음)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고 자기 선택에 확신이 있는 것 같아도, 안에서는 늘 혼란과 고민의 연속이에요. 그걸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도 비슷한 것 같고요.

스스로의 선택에 확신이 없을 때는 무엇에 기대는 편인가요?

잘 헷갈리는 만큼 누군가의 말을 듣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제 고집이 없다는 건 거짓말 같고, 나름대로 기준이나 중심은 있지만 주변에서 저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들을 새겨듣고 그에 맞춰 변화하려고 노력해요. 그런 말들 없이는 제가 늘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계속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방향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파반느>에는 각자의 현실 속에서 흔들리는 청춘의 모습이 담겨 있죠. 청춘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엇이 떠올라요?

제게 청춘이라는 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손상되지 않는, 끝내 닳지 않는 무언가 같아요. 이를 테면 각자가 가진 표정처럼요. 사람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분 좋을 때, 슬플 때, 뚱할 때 표정이 다 다르잖아요. 그런데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그 사람만의 고유한 표정이 보이기 시작해요. 나이 들어가면서 외모가 달라질 수는 있어도 그런 표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제 아기 때 사진을 보면 웃는 얼굴이 지금이랑 똑같거든요. 그래서 먼 훗날에 제 청춘을 떠올리면 웃는 표정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아요.

한 인터뷰에서 지금의 자신을 “빛이 날 듯 말 듯한” 모습이라고 표현한 게 기억에 남아요. 문상민 배우에게 ‘빛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스포트라이트라는 건 한 번에 강하게 주목받는 거잖아요. 채도도 밝기도 전부 강한 빛이요. 그런데 지금 제 모습을 떠올리면 그보다는 흐릿하고 투명한 빛에 가까운 것 같아요. 한순간 ‘반짝’해서 모두가 저를 바라보는 빛이라기보다는, 아직은 무언가에 가려져 있어서 일부만 드러나 있는 모습이 그려져요. 배우로서 이제 막 출발선에 서 있고 조금씩 빛을 받는 중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이 빛이 계속 커지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확 밝아졌다가 금방 어두워질 수도 있겠죠. 그런데 어둠을 작품의 공백이라고 생각하면, 그 안에 있는 동안 스스로를 어떻게 채워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봐요.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는 순간도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어요.

출발선에 선 기분은 어때요?

울긋불긋해요. 일정하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여러 빛이 뒤섞여 있는 느낌이에요. 작품이 사랑받으면 엄청 기쁘고 좋다가도,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가 싶어서 금세 마음을 가다듬어요. 늘 다음에 대해 생각하고요. 돌이켜보면 데뷔 이후로 앞만 보고 빠르게 달려온 것 같거든요. 물론 그렇게 달려왔기 때문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지만, 요즘은 치열한 마음가짐을 속으로 간직하되 한 번씩 뒤도 돌아보면서 더 여유 있고 침착하게 가보자고 되뇌고 있어요.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경록은 결국 한 권의 소설을 완성 하죠. 나라는 책이 있다면, 첫 문장을 어떻게 시작하고 싶어요?

“넌 대체 뭐니?” 이런 질문으로 시작할 것 같아요. 저를 낳아주신 엄마도 아직 저를 잘 모르세요. 항상 “상민아, 너는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니? 내 얘기 듣고 있긴 하니?” 하시는데.(웃음) 이 질문에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갯벌 같아요. 갯벌에 들어가면 발이 푹 빠져서 잘 못 움직이잖아요. 그래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저와 비슷한 것 같아요. 느리더라도 힘겹게 한 걸음씩 떼려는 모습이요. 그게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