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하는 일에 애정을 품은 채, 배우의 세계를 둘러싼 움직임을 따르며.
그렇게 고아성은 영화와 함께 20년의 시간을 흘러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파반느>가 공개된 지 반년이 지났어요. 지금 이 작품을 떠올리면 어떤 감정이 앞서나요?
좀 서운해요.(웃음) 한 작품이 홀연히 떠나간다는 게 섭섭할 때가 많거든요.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졌으니 잘 보내줘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어요. 이별 중인 것 같습니다.
<파반느>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던 ‘미정’(고아성), ‘경록’(문상민), ‘요한’(변요한)이 서로의 빛이 되어주며 삶의 의미와 사랑의 본질을 알아가는 이야기죠. 음울한 인상의 백화점 직원 미정을 보며 고아성 배우가 7년 전 마리끌레르 인터뷰에서 했던 표현을 떠올렸어요. “영화에서 영화적으로 무척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들.”
2017년에 <파반느> 시나리오를 받았고 7년이 지 난 후 촬영이 시작되었으니 인터뷰 당시 이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러면서 아름다움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를 내린 상태였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쓴 게 아닐까 싶어요. 미정이 지닌 영화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노력했죠. 이종필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이 많이 도와 주셨어요.
이종필 감독님은 <파반느>에 대해 “이야기의 핵심은 결국 사랑의 자격이 과연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었다”라고 말씀하셨어요. 이 질문에 대한 고아성 배우의 답은 무엇인가요?
사랑의 자격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하는 준비만이 필요하죠.(웃음)
이 영화를 지나오며 사랑에 대해 새삼 실감한 것도 있나요?
현시대를 살아가면서 사랑이 경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 들 때문에 사랑이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고, 스스로를 돌아봐도 그렇더라고요. 그런데 <파반느>가 일상 속 대상에 깃든 작은 사랑을 일깨워줬어요. 불 켜진 가로등, 한밤중에 내리는 눈 같은 것들의 소중함을 느꼈죠.
일상에서 그 사랑을 크게 느낀 순간은 언제인가요?
아침에 마시는 커피를 좋아해요. 원두를 직접 프라이팬에 볶을 정도로 커피에 진심이라, 그 한 잔을 마시기 위해 눈을 금방 뜨는 편이에요. 잠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이미 행복해져 있죠.(웃음) 그게 곧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치의 삶을 시작하는 동력이 되어준다니 참사랑이네요.(웃음) <파반느>가 전하는 온기처럼 본인에게 빛이 되어주는 존재가 있다면요?
얼마 전 촬영을 마친 연상호 감독님의 새 영화 <예토>가 최근의 빛이었어요. 현장에 있을 때 ‘영화를 찍는다’는 감각이 새삼 느껴지는 거예요. 감독님과 맞추는 첫 호흡도, 다 함께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무척 즐거웠어요. 제 안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열정을 새롭게 발견한 듯해 놀랍기도 했고요.
<예토>는 인플루언서 자매가 캠핑을 떠난 뒤 의문스러운 종교 단체가 있던 터에서 동생이 사라지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고 알려져 있어요. 문근영, 김시아 배우도 함께했다고요.
‘여자 셋’이 저한테 왠지 모를 안정감을 준다는 걸 이번에 깨달았어요.(웃음)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과 <항거: 유관순 이야기>, 유튜브 콘텐츠 <도시여자대피소>도 세 여자가 이끌어가잖아요. 실제로 제가 세 자매 중 막내이기도 하고요. ‘이 삼각 구도에 평생 갇혀 있겠구나, 좋다’ 싶었어요.
장르가 미스터리 스릴러이고, 오컬트 요소도 있는 <예토>가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 같아요.
맞아요. 고민과 부담감이 컸지만, 끝내 해낸 순간의 쾌감이 엄청났어요. <예토>가 차기작이라는 사실에 자신감을 느끼기도해 요. 얼마 전 <경주기행>을 보면서 ‘(박)소담 언니가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를 찍고 얼마나 뿌듯했을까’ 싶었는데, 저한테는 <예토>가 그런 작품 이 되어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경주기행>도 세 자매가 나오네요.
그러네요. 말하자면 엄마까지 여자 넷이죠.(웃음)
그 외에 근래 인상 깊게 본 영화가 있나요? 시기에 따라 마음에 와닿는 영화의 결이 달라지곤 하는데, 요즘은 어떤 작품에 흥미를 느끼는지 궁금해요.
최근에는 자극적인 영화가 재미있더라고요.(웃음) 프리미어 GV에 함께 한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알파>도 인상 깊었어요. 배우들이 말 그대로 ‘시네마’를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주인공 ‘알파’ 역을 맡은 멜리사 보로스의 연기가 특히 돋보였어요.
저도 그랬어요.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어린 배우가 ‘몸을 석고처럼 굳게 만드는 혈액 매개 바이러스’를 다룬 영화 안에서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까 싶더라고요.
그거 아세요? 멜리사 보로스가 2005년생이라 어리지 않아요. 작품 속 인물은 열세 살이지만, 감독님이 ‘어린아이에게 이런 역할을 시킬 수 없다’면서 어려 보이는 성인 배우를 찾으셨대요. 영화를 보면서 알파가 참 안쓰러웠는데, 성인 배우가 연기해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어요.
고아성 배우의 시작점도 아역 활동이었죠. 마침 지난 3월 개봉한 앤솔러지 영화 <극장의 시간들>을 구성하는 단편인 윤가은 감독님의 <자연스럽게>에서 어린 배우들을 이끄는 ‘감독’ 역을 맡았어요.
특별한 경험이었죠. 어린 시절의 제가 떠오르더라고요. 영화에서 아역 배우들에게 하는 말이 과거의 저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어요.
아역 시절의 본인에게 한 가지 귀띔할 수 있다면, 무엇을 알려주고 싶어요?
혜성처럼 등장하는 아역 배우들이 가끔 있잖아요. 한 작품을 통해 화제가 된 이후 계속해서 연기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돌연 사라지거나 잊히는 친구들도 있어요. <렛 미 인>이나 <파라노이드 파크>의 어린 주인공처럼, 저도 한순간의 모습만 보여주고 다시는 볼 수 없는 배우가 될지 고민한 적이 있어요. 그 시절의 저에게 “오래 하게 될 테니 길게 보면 좋겠어”라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렀죠. 제 첫 영화인 <괴물>이 올해로 개봉 20주년이더라고요.
축하받아야 할 일이네요.
자축 파티를 하려고 작은 영화관을 빌려서 <괴물> 자체 상영을 했습니다.(웃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너무 보고 싶은 거예요. 여기저기 허락을 받으면서 파일을 구하고, 영사실에 연결하고… 영화 한 편을 상영하기까지 그토록 여러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처 음 알았어요. 영화와 관련한 일을 많이 해왔지만, 기술적인 부분은 잘 몰랐구나 싶었죠. 결국 해낸 덕분에 친언니들이랑 같이 관람했어요.
20년 전 본인을 스크린으로 다시 마주하니 어땠나요?
이제야 관객 입장에서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저를 보려고 했는데, 영화가 워낙 재미있으니까 스크린에 흠뻑 빠져버렸죠. 지금은 사라진 20년 전 한강 풍경도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영화가 지닌 기록의 의미를 또 한 번 느꼈어요.




그사이 영화를 둘러싼 많은 것이 달라졌죠. 주목할 점 중 하나로 ‘여성 서사의 다양성’을 꼽을 수 있어요. 고아성 배우의 필모그래피만 살펴봐도 주체적 여성이 여럿 있는데, 이러한 확장을 체감하나요?
그럼요. 여성 캐릭터에 부여되는 영혼이 여러 기점을 거쳐왔다고 봐요. 2000년대 초반까지는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속 여성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한동안 누아르 시기를 지나며 여성의 존재가 희미해지기도 했죠. 현재에 이르러 여성 캐릭터가 담아내는 인간상의 층위가 점점 풍부해지고 있어요. 안주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양한 여성을 무궁무진하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 캐릭터를 지향하는 배우로서 대담한 선택을 이어온 점도 돋보여요.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와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자영’ 등 이전과 결이 다른 여성을 표현하고,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서 여성 독립 유공자를 연기하는 책임까지 감당하는 식이었죠. 편안하거나 안전한 길보다는 본인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따라온 듯한데, 잘 개척해왔다고 느끼나요?
‘잘’인지는 모르 겠지만, 저 자신을 무방비 상태로 야생 구역에 주기적으로 내던지듯이 일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최근 연극에 도전해 <바냐 삼촌>을 무대에 올릴 때도 ‘카메라에 담기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는 연기 체계에 충격을 받았죠. 이런 식으로 익숙함을 한 번씩 뒤틀어줘야 앞으로 나아갈 동력이 생기는 것 같더라고요. 매체에 국한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게 배우의 본분 아닐까 싶어요.
매체의 경계를 넓혀가며 본인의 근간을 이루는 영화를 대하는 마음이 달라지기도 해요?
그렇진 않아요. 물론 제가 활동하는 동안 영화라는 매체 자체는 많이 바뀌었어요. 촬영 방식이 필름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겪었고, 어느새 OTT가 새로운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고, 언젠가 AI 영화 시대가 올지도 모르죠. 그 흐름을 늘 인지하며 살아오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분투하며 적응해왔으니 영화가 겪어갈 변모가 그다지 두렵지는 않아요. 또 이런 변화는 영화 산업을 거시적으로 바라볼 때 체감되는 것이지 사실 배우가 하는 일은 비슷해요. ‘어떻게 해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자연스러운 연기란 무엇일까?’ 같은 화두는 여전하고, 혼자가 아니라 동료들과 맞닿으며 작업한다는 점도 그대로니까요. 그 순리를 이제 알았어요. 그래서 굉장히 안정적으로 작업하고 있고, 이 안정감을 더 누리고 싶어요.
경력이 쌓일수록 능숙하게 해낼 수 있는 일이 있겠지만, 그만큼 익숙한 방식에 기대기도 쉽잖아요. 답습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편인가요?
노력하지만, 때로는 마법처럼 알게 모르게 풀리기도 하더라고요. <파반느>의 미정을 통해서도 그 경험을 했어요. 7년의 준비 기간 동안 ‘이렇게 해야겠다’며 정해둔 것이 많았는데, 막상 실현할 날이 다가오니 마치 제가 미정이 된 듯 자연스레 고립을 자처하는 거예요. 연기는 내가 연구하고 표현하는 일이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발현되는 부분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그 이끌림을 묵묵히 받아들이고 겸손한 자세로 따라갔죠. 결국 답습을 의식하지 않는 게 답습하지 않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요.
평소 사람에 대한 관심이 큰 덕분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연기 비결로 ‘사람을 향한 애정’을 꼽기도 했어요.
그렇죠. 오늘처럼 처음 만나는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각자의 고유한 에너지와 아우라를 잘 느끼는 편이에요. 관찰보다는 감각에 가까운데, 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애정이 화수분처럼 무한해서 든든하더라고요. 이 마음이 있는 한 계속 일할 수 있겠다 싶어서요. 사람을 표현할 수 있어 이 일을 좋아하고, 그게 영원히 질리지 않을 저의 난제입니다.(웃음)
타인이 아닌 본인을 대할 땐 어떤가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을 탐구하며 표현하다 보면, 스스로를 지켜가는 데 소홀할 수도 있을 텐데요.
저를 돌보는 일이 뒤처질 때도 있지만, 그 간극을 메우려고 부단히 노력해요. 뒤늦게나마 채워가는 기쁨도 있더라고요. 최근 런던에서 오랜만에 우측 운전을 했는데, 첫날엔 어색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유려하게 차를 몰고 있는 제 모습이 뿌듯하더라고요. 이런 사소한 순간들을 통해 인간 고아성의 삶을 문득 챙기는 것 같아요.
독서 또한 고아성 배우가 삶을 챙기는 방식 중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요. 요즘 붙들고 있는 문장이 있나요?
은희경 작가님의 신간 <시간의 감촉>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인간은 처음에는 먹을 것을 구하는 사냥꾼이었다가 그것을 먹기 전 집안 어딘가에 놓아둠으로써 예술가가 된다.” 자신이 속한 환경을 살피는 데서 예술이 피어난다는 거죠. 어쩌면 제가 하는 연기도 인간이란 존재가 출현했을 때부터 시작된 원시적인 일일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그 생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배우로서 지금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다고 보나요?
한동안 영화관이 침체기를 겪었잖아요. 모두가 체감했을 테고, 저 또한 극장을 찾는 횟수가 줄어 두려움을 느꼈어요. 지금은 그 시간을 잘 건너왔다 싶어요. 한국 영화사의 한 순간을 함께 겪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영화뿐 아니라 책이나 라디오도 마찬가지인 듯해요. 지난해부터 진행 중인 <라디오 북클럽 고아성입니다>를 통해 라디오와 관련한 일을 하는 분들을 만나면, ‘좀비 세대가 와도 라디오는 작동한다’는 자부심이 느껴지더라고요. 이렇듯 오래된 매체는 위기를 겪어가며 살아남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매체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영화를 아끼는 이들이 모여드는 부산국제영화제가 곧 시작됩니다. 어떤 마음으로 올해의 영화 축제를 기다리고 있나요?
이번에 올해의 배우상 심사위원으 로 함께하게 되었어요. ‘비전-한국’ 섹션에 선정된 작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여성 배우를 선정하고, ‘비전의 밤’ 시상식에서 직접 상 을 전할 예정이에요. 어떤 얼굴들을 만날지 기대가 큽니다. 가장 특별한 부산국제영화제가 펼쳐지지 않을까 싶어요.


“사람을 표현할 수 있어 이 일을 좋아하고
그게 영원히 질리지 않을 저의 난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