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은숙 <불량한 오십>
마음에 먹구름이 가득한 날 자주 펼쳐보게 될 책을 만났다. 인생의 단맛과 짠맛을 두루 맛 보았을 저자의 묵직한 통찰과 산뜻한 유머가 담긴 에세이집이다. 가장 좋은 건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방향을 가리키거나, 해봐서 안다는 말로 훈수 두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도 읽고 나면 배우게 되고, 새로 마음 먹게 된다. “누가 뭐래도 우리 인생은 ‘지금 여기’의 총합이니까!” 같은 보석 같은 문장이 책 곳곳에 포진해있다. 나무나무출판사

그저 이 순간이 소중한 인생, 지난 일을 소환해 되새기지 않고 눈앞의 오늘에 집중하는 인생,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한 뒤 끝나고 나면 잊어버리는 인생, 그런 삶에는 후회나 자기 연민이 없어서 좋다. 가성비가 높아서 본전 생각도 나지 않는다. 자기 인생의 모든 순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외부 자극에 일일이 반응하는 삶은 피곤하다. 한번 익숙해지면 바뀌기 어려운 인간관계처럼 인생도 처음부터 길을 잘 들여야 한다. 신경 안 쓰면 저절로 풀릴 일도 남보다 잘하고 싶어 안달하다가는 오히려 삐끗하기 쉽다. 인생을 순하게 길들이는 최고의 방법은 ‘그냥’ 사는 것이다. — p.3, ‘프롤로그’ 중에서

 

2. 김연식 <지구를 항해하는 초록배에 탑니다>
본업은 선원, 부업은 초보 환경운동가, 또 다른 이름은 ‘한국인 최초 그린피스 항해사’인 저자 김연식. 그는 ‘삶을 흘려보내기보다 내가 원하는 일로 채워나가고 싶고, 무엇보다 지구에 작은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린피스 환경감시선에 올랐다. 지중해 플라스틱 섬에서 남극 빙하로, 남극 빙하에서 남미 아마존으로 이동하며 쓴 7년치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이로운 일에 대해 더듬더듬 떠올려보게 될 지 모른다.

킴, 이건 처음 보는 건데? 내가 봐도 한자는 아닌 것 같아.
이리 줘봐. 어! 어…. 아…. 이건… 이건… 코리안이야….
데이비드가 건넨 플라스틱 통 바닥에는 넘어져도 일어나는 우리나라 식품 기업의 이름이 흐릿하게 각인돼 있었다. 닳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 ‘각인’이다. 3L 정도 되는 하얀 통은 마요네즈를 담았음이 분명하다. 통은 버려진 지 꽤 오래된 모양이다. 표면이 거칠게 일어났고, 온통 이끼가 붙어 있어 미끈거렸다. 데이비드는 기록지 한쪽에 ‘한국 쓰레기’란을 추가하고 막대기 하나를 그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어 형광등 조각, 플라스틱 바가지 등 한글이 적힌 쓰레기가 줄줄이 나왔다. — p.134~135, ‘한국 쓰레기, 중국 쓰레기, 일본 쓰레기’ 중에서

 

3. 곽아람 <매 순간 흔들려도 매일 우아하게>
20여 편의 작품과 작품 속 20여 명의 여성 주인공을 소환해 ‘모멸에 품위로 응수’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소공녀>의 세라를 시작으로 <작은 아씨들>의 조, <폭풍의 언덕> 캐서린 등 소설 속 멋진 여자들은 물론 <비커밍>의 미셸 오바마나 <긴즈버그의 말>의 긴즈버그 등 삶 속에서 품위를 실천한 이들에 대한 헌사가 이어진다. 깊이 읽은 자에게 부여되는 침착한 통찰과 오래 본 자가 품는 인물에 대한 애정이 빛을 낸다.

야망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야심 차 보이는 여자. 40대에 접어든 나는 그런 여자였다. 욕망하기보다 욕망을 지우고 싶었다. 욕심과 질투로 마음에 옹이가 지는 게 싫었다. 그러면 결국 내가 상처받기 때문이다. 나는 우선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었다. 예기치 않은 일이 수시로 발생하고 늘 마감에 쫓기는 직업 특성상, 일을 해내기 위해 아득바득 달려들긴 하겠지만 사회적 성공 같은 걸 염두에 두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잘하고 싶은 마음을 갖는 거야 당연하겠지만 상찬받고 싶은 욕심은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어는점을 만들지 말 것.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밑바닥까지 추해지지 않을 것. 최대한 우아함과 품위를 유지할 것. 어릴 적 읽은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에게 나는 이런 걸 배웠다.— p.7, ‘시작하며’ 중에서

 

4. 이슬아 x 남궁인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다>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서 동명의 제목으로 연재 되었던 서간문을 엮은 책이다. 글이 공개되는 매주 수요일마다 SNS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그들의 글을 이제 단숨에 읽을 수 있게 된 거다. 성별도, 나이도, 살아온 방식도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흔한 오해’를 지나 ‘희귀한 이해’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조마조마하게 때로는 통쾌해 하며 지켜 볼 수 있다.

이 편지를 읽고 선생님이 저랑 절교할까봐 두렵습니다. 하지만 만약 답장을 주신다면 그때부터 우리는 더 좋은 우정의 세계에 진입할 것입니다. (…) 그럼 활시위를 당겨보세요. 과녁은 저입니다. 닷새 안에 답장이 없으면 절교하자는 뜻인 줄로 알겠습니다. —p.19, 21 이슬아, ‘멋지고 징그러운 남궁인 선생님께’ 중에서

작가님의 편지를 응급실에서 처음 읽었습니다. 가슴이 쿵쾅거렸고 호흡이 가빠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동공에 미동도 없으실 테지만”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제 눈동자는 흡사 월미도 디스코팡팡처럼 돌고 있었습니다. 의학용어로 안구진탕이라고 합니다. (…) 문득 남을 생각하다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서간문의 본질임을 직면합니다. 작가님은 적어도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입니다. 응급실에서 안구진탕에 시달리던 새벽 “나를 생각해주어 고맙습니다”라고 보낸 것은 그 까닭입니다. —p.23, 30 남궁인, ‘여러모로 징그러운 이슬아 작가님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