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의 힘

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면 영화라는 매체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며, 이러한 역할을 통해 대중의 다양성 의식 역시 한 뼘 더 넓어진다. 비프메세나상은 이 역할에 가장 충실한 상이다. 와이드 앵글 경쟁 부문에 초청된 한국과 아시아의 다큐멘터리를 대상으로, 가장 독특한 비전을 지닌 두 편의 작품에 수여되는데 2008년 <워낭소리>와 소다 가즈히로 감독의 <멘탈>로 시작해 22편의 영화가 그 영예를 안았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
왕십리 김종분
부산국제영화제 BIFF 다큐멘터리 206: 사라지지 않는
206: 사라지지 않는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선 총 10편의 다큐멘터리가 후보에 올랐는데, 아시아와 한국, 베테랑과 신인, 여성과 남성이 균형 있는 비중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한국 다큐 5편을 살펴보면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띈다. 1999년 <여성장애인 김진옥씨의 결혼이야기>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진열 감독. 그가 올해 부산에서 선보이는 <왕십리 김종분>은 두 여성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1991년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목숨을 잃은 고 김귀정 열사 그리고 그의 어머니이자 왕십리에서 50년 넘게 노점을 하고 있는 김종분 여사. 김귀정 30주기를 맞이하는 올해, 이 다큐는 잊어서는 안 될 역사를 환기시킨다. 10년 전부터 연출자와 촬영감독으로서 다큐멘터리와 인연을 맺은 허철녕 감독 역시 과거를 되돌아본다. 6.25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이 이뤄졌던 곳들을 발굴하는 시민 단체들의 여정에 동참한 작품 <206: 사라지지 않는>은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의 상처를 드러내는 작품이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다큐멘터리 피아노 프리즘
피아노 프리즘

3명의 한국 다큐멘터리스트가 올해 와이드 앵글을 통해 자신의 첫 장편 다큐를 선보인다. 이동윤 감독의 <10월의 이름들>은 부마항쟁을 다룬 작품으로 <국제신문>에 연재된 기획 기사를 모티프로 제작되었다. 40여년 전, 민주화 투쟁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이 풍부한 영상 자료와 함께 현재의 관객들 앞에 펼쳐진다. 앞서 소개한 세 편이 역사의 무게를 다큐의 미학으로 지탱하고 있다면, 오세연 감독의 <성덕>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독특한 시선이다. 아이돌의 팬이었던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성덕>은 자신이 열광했던 스타가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된 현실 앞에서 ‘팬덤’이 지닌 복잡 미묘한 현상을 파고든다. 이는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정치적 영역까지 확대되는, 어쩌면 우리 사회의 혼란상과 직결되는 뒤틀린 신드롬일지도 모른다. 오재형 감독의 첫 장편 다큐 <피아노 프리즘>은 어느 전방위적 아티스트의 신선한 기록이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후 실험적 영상의 단편과 피아노 퍼포먼스를 시도했으며 두 권의 책을 낸 저술가이기도 한 그는 신작에서영상과 연주를 결합한 오디오 비주얼 퍼포먼스에 도전한다. 신선한 소재와 독창적 스타일이 결합된 작품이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다큐멘터리 자화상: 47KM 마을의 동화
<자화상: 47KM 마을의 동화>

아시아 다큐는 중화권의 약진이 눈에 띈다. 장멩치 감독의 <자화상: 47KM 마을의 동화>는 ‘자화상 시리즈’ 중 아홉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고향 마을의 정겹고 아름다운 나날들을 감독이 직접 찍고 편집한 소박한 영상이다. 2015년 <가정부 니아>로 선재상을 수상한 후 꾸준히 부산을 방문한 대만의 라우 켁 후앗 감독은 올해 <야생 토마토의 맛>을 통해 대만의 아픈 과거인 2·28 사건을 재조명한다. <라이프 오브 파이>(2012) 촬영부에서 일했던 대만 시요룬 감독의 <크로싱 엔드>는 살인죄로 10년 넘게 감옥에 있던 두 청년의 무고함이 밝혀지면서 재심을 요구하는 시민 단체의 시위가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다큐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다큐멘터리 여성 전용 객차에서
여성 전용 객차에서
부산국제영화제 BIFF 다큐멘터리 언네임어블 댄스
언네임어블 댄스

2018년 단편 <창밖의 배>로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인도 영화감독 레바나 리즈 존은 <여성 전용 객차에서>로 다시 한국을 찾는다. 뭄바이 지역 기차의 여성 전용 객차를 바라보는 관찰자적 다큐멘터리를 통해 인도 사회에서 여성이 지닌 사회적 위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친숙한 이름, 이누도 잇신의 <언네임어블 댄스>가 관객과 만난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메종 드 히미코>(2005) 같은 극영화로 잘 알려진 그가 다큐의 앵글에 담아낸 노장 춤꾼 다나카 민의 경이로운 예술 세계를 만날 기회다. writer 김형석(영화평론가)

 

빛나는 아시아 영화들 

오늘날 아시아 영화는 빛나는 성과를 보이며 세계 영화계의 주목을 한 몸에 받고, 또 높이 평가된다. 하지만 꽤 오랫동안 아시아 영화는 유럽 영화, 영어권 영화와 비교해 ‘변방’과 ‘주변’의 영화로 치부됐고 세계 영화 무대에서 제대로 소개될 기회조차 얻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 역사 속에서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를 적극적으로 발견하고 발굴하며 아시아 영화의 중요한 플랫폼이자 ‘허브’로 자리매김해왔다. 이 작업의 초석을 다진 이가 고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다.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영화제는 2017년 ‘지석상’을 신설했고 올해로 네 번째를 맞았다. 지석상은 그해 가장 주목할 아시아 중견 감독의 신작에 주어지는 상이다. 아시아 영화감독들의 신작 및 화제작을 소개하는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의 창’ 부문 7편 가운데 두 편을 선정해 각각 1만 달러의 상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아시아 중견 감독 젠산 펀치
<젠산 펀치>
부산국제영화제 BIFF 아시아 중견 감독 24
24

후보작의 면면이 그야말로 화려하다. 아시아 영화의 빛나는 이름들로 꽉꽉 채워졌다. 먼저 <도살>(2009)로 필리핀 영화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은 바 있는 필리핀의 대표적인 감독 브리얀테 멘도자의 신작 <젠산 펀치>(2021)다. 일본 배우 쇼겐과 함께 작업한 이번 영화는 장애가 있는 권투 선수가 정식 선수 자격증을 얻기 위해 사회의 온갖 차별에 맞선다는 내용으로 실화에 바탕을 뒀다. 단편 작업부터 꾸준히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됐던 싱가포르의 로이스톤 탄 감독의 <24>(2021)도 반갑다. 그는 영화를 방편 삼아 싱가포르 사회의 경직성과 불안을 그려왔고 환대받지 못하는 주변부 인생을 조명해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모순으로 가득한 세계를 냉철히 바라보지만, 그속에도 생의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카모메 식당>(2006), <안경>(2007),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 등으로 한국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일본의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의 신작 <강변의 무코리타>(2021)도 후보작이다. 감옥에서 막 출소한 젊은이가 한적한 어촌 마을에 정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너무 무겁지도, 마냥 가볍지도 않게 그린다. 감독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출의 묘가 이번에도 돋보인다. <부타>(2011), <석류 과수원>(2017) 등을 만든 일가 나자프의 흑백영화 <수흐라의 아들들>(2021)은 또 어떤가. 공산주의의 서슬 퍼런 그늘에 있는 집단농장에서 일하는 ‘수흐라’와 아들들의 힘겨운 하루하루와 버티기가 역사적 상흔이 돼 스크린에 펼쳐진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아시아 중견 감독 레이피스트
레이피스트
부산국제영화제 BIFF 아시아 중견 감독 흥정
흥정
부산국제영화제 BIFF 아시아 중견 감독 떠도는 남자
떠도는 남자

70대 중반을 넘긴 인도의 감독이자 배우 아파르나 센은 나이가 무색할 만큼 열정적으로 작업하며 건재를 알려왔다. 열여섯 번째 연출작 <레이피스트>(2021)는 사형 제도에 반대해온 열혈 운동가 교수 부부가 한 사건에 휘말리며 나락에 떨어진다는 내용이다. 인도 사회의 젠더, 계급 갈등과 법적, 제도적 모순을 날카롭게 짚어낸 작품이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찾는 중국의 왕기 감독의 신작 <흥정>(2021)은 급변하는 중국 사회의 현실과 그속에서 분투하는 어느 가족의 생생한 이야기다. <텔레비전>(2012)으로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에 선정된 적 있는 방글라데시 뉴웨이브의 대표 주자 모스토파 파루키의 신작 <떠도는 남자>(2021)도 만날 수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인종, 종교, 국적에 따른 차별과 혐오, 그로 인한 범죄를 세밀하고 유려하게 포착해낸다. 인도 영화음악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좋을 A. R. 라흐만이 음악감독으로 합류해 작품의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7편의 영화를 통해 아시아 영화의 현재를, 역동하고 살아 움직이며 꿈틀대는 아시아의 이야기를 만나길 기대한다. writer 정지혜(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