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집단 ‘푸른수염’을 이끄는 연출가이자 극작가 안정민을 만났다. <달걀의 일> <당곰이야기> <바리이야기> <뜻밖의 여자-탈 연습> 등을 통해 젠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고전소설과 신화를 새롭게 고쳐 여성의 역사를 다시 쓴다. 연극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는 시간만큼은 누구보다 자유롭고 싶다는 그에게 여성에 대해 물었다.

<달걀의 일> 이야기부터 나눠볼게요. 어떻게 만들게 된 연극인가요? 처음엔 단순히 여성을 피사체로 바라보는 일상의 언어를 고쳐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예를 들어 순수하다, 섹시하다, 아름답다 같은 표현이요. 그다음엔 여성을 잘못된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근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신화가 눈에 들어왔고, 이걸 새롭게 고쳐 쓰기로 했죠. 이것들을 고친 뒤엔 나의 이야기를 담아보자는 생각으로 방향성을 잡아가다 보니 <달걀의 일>이 되었어요.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은 건가요? 네. 저의 뿌리인 경상도로 돌아가 제가 겪은 일들과 만난 인물들을 극화했어요. 주인공 ‘성민채’의 할머니도 저의 할머니를 빗대어 만들어낸 인물이죠. 경상도에서 K-장녀로 살면서 엄청난 가스라이팅을 당하며 자랐지만 그땐 가스라이팅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극을 통해서라도 이를 깨부수고 싶었고 민채가 그 역할을 대신해주었어요. 민채의 고향집 앞 무덤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는데, 새 요괴가 여인으로 변해 동네 남자들을 홀린 후 심장을 꺼내 먹고 다닌다는 이야기예요. 고고학자가 된 민채는 마을 사람들이 아무 의심 없이 믿고 있던, 여성에게 폭력이 되는 신화를 고쳐 쓰고 여성이 주체가 되는 신화를 새롭게 발굴해내려 하죠.

마을에서 금기시하던 민채와 동창 사이에 있었던 유년의 일도 저의 경험에서 비롯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민채가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다루지 않은 것, 피해자로 그리지 않은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도 있었죠. 극을 만드는 과정에서 민채를 피해자로 보는 시각을 강요받은 것도 저의 경험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상황을 주체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도 피해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 자체가 여성의 가능성에 한계를 짓는 일이 아닌가 해요. 위로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런 것을 요구하는 것이 더 폭력적인 게 아닐까요? 텍스트의 정합성에 연연하기보다는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이 저를 연출가, 작가로 기억하기보다
도둑으로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시간을 훔쳐오는 사람.

여성들한테 제가 드리고 싶은 게 시간이거든요.”

 

극 중 민채는 할머니를 살해하게 돼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흔히 남성에게 아버지는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잖아요. 여성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여성에게 어머니는 극복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딸이 됨으로써 따르는 기쁨이 있고, 갖게 되는 유대감도 있죠. 하지만 여성은 언제나 착해야 하고,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등의 사회적 프레임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 작용했을 거예요. 오이디푸스 신화(친부 살해)적 요소를 더한 것도 이 때문이에요. 판타지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을 해볼 수 있는 장치잖아요. 하지만 오이디푸스 신화 같은 자극적인 판타지는 여성에게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여성의 그리고 저의 판타지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없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고, 실현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반드시 필요했어요. 민채가 잘못된 굴레를 씌우던 할머니를 살해한 건 구습을 끊어내기 위한 행동이죠.

제목에서 ‘달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민채가 구하려는 여신이 달걀에서 태어난 여신이기도 하고, 노래를 통해 여성들에게 힘을 불어넣으려는 그 여신의 사명을 드러내는 것이 민채의 역할이에요. 껍데기를 깨는 것이 사명이고, 그 껍데기를 깨는 일 자체가 우리 사회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의 전형적인 구조를 부수는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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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이프 블라우스, 블랙 트라우저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앵클 부츠는 에이엔(Eyien).

 

그렇다면 <당곰이야기>도 신화를 고쳐 쓰는 작업에서 시작된 것인가요? 궁극적으로 삼신할머니 이야기로 알려진 당금애기 신화를 고쳐 쓰기 위한 일이에요. 저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칠 장을 만들기 위해서 시작한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계속 남성과 비교하는 게 조금 얄팍하긴 하지만(웃음) 연극이나 신화에서 제가 되고 싶은 인물은 모두 남성이더라고요. 신화와 영웅들을 볼 때 나와 닮은 얼굴이 없다는 것은 스토리 창작자로서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일이에요.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에 ‘<햄릿>을 좋아해요. 하지만 오필리아 부분은 싫어하고….’ 이런 식으로 늘 완전한 형태 그대로 사랑할 이야기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고쳐 쓰기로 했어요. 제가 섬기고 싶은 여성의 이야기가 필요해 <당곰이야기>가 탄생했고 이어 <달걀의 일>도 쓸 수 있었어요.

계속해서 신화나 고전소설 등을 모티프로 차용하는 이유는 뭔가요? 사람들이 저를 연출가, 작가로 기억하기보다 도둑으로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시간을 훔쳐오는 사람. 여성들한테 제가 드리고 싶은 게 시간이거든요.

<당곰이야기> 이야기를 이어가보죠. 독특하게 민요, 판소리, 힙합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함께 사용했어요. 우리나라의 전통은 겸손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아요. 완전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지 못하면 가지고 놀기 힘들게 되어 있잖아요. 전통을 즐기고 깊이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 문화유산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다루고 싶은 욕망이 커요.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스러운’ 방식으로만 다루지 않고 여러 가지를 시도하기 때문에 그 수명이 길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전통을 계속 가지고 놀고 싶어요.

<뜻밖의 여자 탈 연습>도 전통적인 것에서 영감을 받은 건가요? 계기는 조금 달라요. <당곰이야기>와 <달걀의 일>을 제작하면서 여성의 입장에만 치우친 것 같았어요. 젠더플루이드(성별이 유동적으로 전환되는 젠더)로서 다양한 젠더를 다루고 싶었어요. 때마침 <젠더 트러블>과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이성애 제도에 대한 전복적 시선>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젠더가 가면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우리에게는 한국의 ‘탈’이 있으니 탈을 ‘젠더’에 대입해 탈 연습으로 표현해보았어요.

 

 

창작집단 푸른 수염을 통해 여성의 이야기를 꾸준히 연극으로 만들고 있어요. 여성 서사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처음부터 여성 서사를 쓴 건 아니에요. 처음 여성의 이야기를 다뤄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방인의 만찬-난민연습> 작업을 할 때였죠. 남성 배우 위주로 구성한 극이라 그 사이에서 당시 어린 작가이자 연출가로서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죠. 그러다 보니 ‘나는 무엇인가?’, ‘나를 어떻게 챙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여성의 이야기가 간절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아졌어요. 그렇게 여성 서사를 담은 극을 만들기 시작했죠. 푸른수염이라는 극단 이름도 푸른 수염 신화를 고쳐 쓰면서 만들게 되었어요. 여성 서사만 다루는 집단은 아니지만 여성의 아이덴티티를 중시하고 이에 대해 공유하고 싶어요. 다른 여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제가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지만 저는 여성으로서 빼앗긴 시간을 다시 찾길 원하거든요.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영화에도 도전하고 싶어요. 연극은 그 자리에 머문 관객에게만 보여주지만 영화는 기록으로 남아 진짜 시간이 될 수 있으니까.

여성을 둘러싼 사회적 현실을 이야기로 풀어내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뭔가요? 창작하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아요. 기존의 것을 활용하며 쓰는 것, 완전히 처음 쓰는 이야기라 생각하고 상상하며 쓰는 것. 저는 후자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작업해요. 여성이라서 받는 고통과 강요가 없는 것처럼 살아보기, 연극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나 예술 속에서 완전히 새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다른 이들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기. 여성 서사를 표현할 때 특히 힘든 부분이 여성에게 강요하는 억압에 위축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연극을 하는 두 시간은 자유롭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요. 그래야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더욱 용감해질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