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영화 김정인 황슬기 정소영
(왼쪽부터) <나이트 크루징>의 김정인 감독, <좋은 날>의 황슬기 감독, <맛있는 엔딩>의 정소영 감독.
맛있는 영화 나이트 크루징 김정인 감독
<나이트 크루징> 스틸컷
맛있는 영화 맛있는 엔딩 정소영 감독
<맛있는 엔딩> 스틸컷
맛있는 영화 좋은 날 황슬기 감독
<좋은 날> 스틸컷

 

<맛있는 영화>에는 음식을 매개로 다양한 삶의 단면을 담아낸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야심한 밤 집을 나선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친구와 함께 푸드 트럭을 찾아다니는 심야 식도락 방랑기 <나이트 크루징>, 오랜 연인의 이별에 얽힌 복잡한 감정을 떡볶이 한 그릇에 담아낸 <맛있는 엔딩>, 두 중년 여성이 각자의 딸을 만나기 위해 함께 서울로 향하는 하루를 담은 <좋은 날>. 신인 여성 감독들에게 더 다양한 무대를 제공하고자 배달 앱 배달의민족과 영화 제작사 아토(ATO)가 협업해 만든 프로젝트로 각각 김정인, 정소영, 황슬기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다. 세 감독이 만든 서로 다른 이야기는 묘한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아냈고, 관객의 삶에 닿아 긴 여운을 남겼다.

 

 

맛있는 영화 나이트 크루징 김정인 감독
베이지 컬러 블라우스, 블랙 쇼츠는 아위(AHWE). 블랙 롱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화를 만드는 건 수프를 끓이는 일과 같다.
다양한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어
맛이 우러나도록 오래오래 끓이는 거다.
지금 우리는 조용히 끓고 있는 시기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무엇인가 우러나고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면 된다.”
– 김정인 감독

 

<맛있는 영화>는 아토와 배달의민족이 협업해 만든 작품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가졌다. 처음 경험하는 작업 환경이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 김정인 처음 제안받은 기획 영화라 예산과 기획 의도에 부합하는 작품으로 보답하고 싶어 제작사와 투자사의 의견을 많이 의식했다. 그런데 제작사에서는 도리어 창작자의 자유를 존중하는 데 방점을 찍더라. 그 덕분에 울타리가 있는 운동장에서 뛰어놀듯 마음 맞는 스태프와 배우를 모아 촬영할 수 있었다. 정소영 배달의민족이 가진 색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들과 톤을 맞추는 데 신경 써야 하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무척 자유로웠다. 창작자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마련한 프로젝트라는 점이 여실히 느껴지는 현장이었다. 황슬기 오히려 성격이 서로 다른 두 회사가 만나 색다른 에너지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한다. 김정인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인건비를 제대로 지급할 수 있다는 점. 늘 지인 찬스와 열정 페이로 단편영화를 작업해왔는데,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마음의 빚을 덜 수 있었다.

이 프로젝트가 매력적으로 다가온 요인이 있을 것 같다. 황슬기 아토의 김지혜 대표에게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너무나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신인 감독에게는 새 작품을 만드는 게 무척 귀한 기회니까. 더군다나 여성 감독을 위한 무대를 넓히기 위해 구상한 기획이라니.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 꼭 참여하고 싶었다. 김정인 영화로 만들어지지 못한 시나리오를 책상에 쌓아두며 자괴감을 느낄 무렵, 이 프로젝트를 제안받았다. 이번 작업을 나 자신의 자격을 의심하는 습관을 버릴 기회로 삼았다. 세상이 내 자격을 의심해도 나만큼은 나를 믿어주자고 되뇌면서. 황슬기 감독이 말한 것처럼 이 프로젝트는 여성 창작자를 독려하자는 취지도 있어 참여하게 된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정소영 나 역시 수년 동안 장편 시나리오를 쓰고 있던 터라 많이 지쳐 있었다. 그 때문인지 현장에서 촬영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좋더라.(웃음) 다시 영화 찍는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리프레시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참여했다.

세 감독이 만든 시나리오가 모여 하나의 영화가 되었다. 이러한 작업이 남긴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황슬기 영화를 만들 땐 대부분 각개전투로 작업을 이어왔다. 최종 완성본을 통해 다른 감독들의 작품을 처음 봤는데 세 이야기의 색이 뚜렷이 다르더라. 그런데 서로 충돌하지 않고 각각의 주제가 또렷한 선을 그리며 멋진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어 놀라웠다. 오래도록 여운이 남은 작업이다. 김정인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지난하다. 특히 개인 창작자로서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 보면 고립되기 쉬운데 이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동지를 만날 수 있어 좋았다. 촬영 스케줄을 공유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지애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웃음) 정소영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니 부담이 덜 된다는 점도 좋았고.(웃음)

이 프로젝트에는 음식과 사람이라는 소재가 있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어려웠던, 혹은 수월했던 지점이 있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 김정인 처음에는 음식 콘텐츠가 넘쳐나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를 소재로 한 영화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무엇일지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음식에 대한 판타지’를 출발점으로 삼으니 ‘사람 만나는 이야기’로 확장되더라. 일단 정해진 소재를 받아들이고 소화하면 그때부터는 새로운 이야기가 자연스레 보이는 것 같다. 황슬기 주제가 한정되니 집중해야 할 것이 분명해진 느낌도 있었다. 그렇다고 진행이 일사천리로 된 건 아니지만.(웃음)

 

 

맛있는 영화 맛있는 엔딩 정소영 감독
블랙 코튼 드레스, 네이비 재킷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 일에 경쟁은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러니 주위 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그저 자기에게 집중하는 자세만 있다면
건강하게 창작 활동을 지속할 수 있지 않을까?”
– 정소영 감독

 

<나이트 크루징> <맛있는 엔딩> <좋은 날>에는 각각 쌀국수, 떡볶이, 라면이 주요 음식으로 등장한다. 음식이 영화의 무게 추를 담당하는 만큼 신중히 골라야 했을 것 같다. 김정인 사실 음식 메뉴를 정하는 게 제일 어려웠다. 일단 내가 뭘 먹고 싶은지 모르겠더라. 그래서 먹고 싶은 걸 알아가는 여정을 그려봤다. 쌀국수는 밤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메뉴를 고민하다 떠올렸다. 야심한 밤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친구와 함께 먹는 쌀국수. 꽤 든든할 것 같지 않나? 정소영 떡볶이는 내가 매우 좋아하는 음식이라 별 고민 없이 바로 선택했다.(웃음) 캐주얼한 음식인 떡볶이와 오래된 연인의 이별은 서로 충돌하는 이미지에 가깝지만, 상반되는 두 소재가 부딪치면서 나오는 에너지를 기대했다. 황슬기 <좋은 날>을 구상할 무렵, 회의를 마치고 동료들과 저녁으로 한강 즉석 라면을 먹은 적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 맛봤는데 너무 맛있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주요 캐릭터는 중년 여성으로 구체화해둔 상태였는데, 그들에게도 이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면처럼 소박하고 흔한 음식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의 한 순간이 될 수 있음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좋은 날>은 <맛있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황슬기 중년 여성은 내 관심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나보다 앞서 살아온 그들이 인생에 대해 어떤 통찰을 가졌을지 궁금하고, 그 속에 숨은 삶의 해학을 발견하는 게 참 좋다. 늘 주변부로만 묘사되는 점이 아쉬워 그들을 주연으로 삼는 이야기에 갈증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고민이 끝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중년 여성의 삶에 집착할 것 같다.

김정인, 정소영, 황슬기 감독에게는 영화 현장에서 다년간 스태프로 일한 경험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지금껏 영화를 계속 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 김정인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변하지만 영화는 특정 시공간에서 변치 않는 무언가를 이야기한다. 이런 영화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시대성과 보편성을 지닌 유의미한 장면을 만드는 데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성취도 크다. 황슬기 뻔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결국 같이 일하는 동료들인 것 같다. 일의 고충을 아는 사람도, 어떤 성과를 거뒀을 때 그게 얼마나 값진 건지 알아주는 사람도 그들이니까. 정소영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큰 일임은 분명하다. 돌이켜보면 틈틈이 이어온 개인 작업 덕분에 지금까지 해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내 영화를 만듦으로써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에너지를 얻었던 거지.

내 영화를 만드는 것 또한 갖은 소모를 동반하는 일일 텐데, 그 시간을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영화에 대한 애정과 욕심이 크다는 말로 들린다. 정소영 그런 것 같다. 그때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온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일했으니까.

 

 

맛있는 영화 좋은 날 황슬기 감독
브라운 컬러 레더 코트는 코스(COS). 화이트 셔츠는 코이반트(COIVANT). 아이보리 컬러 팬츠와 앵클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결국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영화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일의 고충을 아는 사람도,
어떤 성과를 거뒀을 때
그게 얼마나 값진 건지
알아주는 사람도 그들이니까.”
– 황슬기 감독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극장이 큰 위기를 맞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정소영 극장은 사라졌지만 다른 플랫폼이 많이 생겨났다. 신기한 건 금세 또 다른 플랫폼에 맞춰 콘텐츠들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영화로 준비하던 작품을 드라마로 바꿔 제작하는 경우도 많은 걸로 안다. 영화인들의 기획력과 생존 능력에 새삼 놀라는 중이다.(웃음) 김정인 영화가 극장을 떠나 다양한 플랫폼으로 거처를 옮기는 상황은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기가 기존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벗어나 다양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길 바란다. 황슬기 코로나19가 큰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어쩌면 서서히 변화의 시점이 가까워 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만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흡인력은 절대적이기에 완전히 사라져버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이러한 환경 변화에 더욱 촉각을 곤두세우고 예민하게 반응해내는 것이다.

창작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황슬기 코어 근육?(웃음) 당연히 체력이다. 오래 앉아서 쓰기 위해서도, 배우들과 집중해서 얘기하기 위해서도 체력은 꼭 필요하다. 김정인 시나리오를 쓸 땐 발이 닿지 않는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심정이다. 수심을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무서워 항상 해안가에서 놀고 있다. 나에겐 기꺼이 바다로 풍덩 빠져 작업할 용기가 가장 필요할 것 같다. 정소영 이 일에 경쟁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주위 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그저 자기에게 집중하는 자세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동경하는 여성 창작자가 있나? 김정인 아이유. 세상에 예민한 촉수를 뻗은 채 자신의 색을 잃지 않고 내면의 진짜 이야기를 들려주는 솔직한 아티스트다. 그녀를 보며 한 사람의 성장은 참으로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정소영 영화감독 캐서린 비글로(Kathryn Bigelow). <허트 로커> <제로 다크 서티> 등 파워풀한 장르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다. 이렇게 장르적 성향이 뚜렷한 여성 감독은 흔치 않다. 내가 장르영화에 욕심이 있어서 더욱 동경하는 것 같기도 하다. 황슬기 한 명만 꼽기가 참 어려운데, 일단 윤가은 감독. 친한 언니이자 친구고 동료이자 선배인 소중한 사람이다. 임순례 감독님도 깊이 존경한다. 중∙고등학생 때 감독님 영화를 보고 나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지금도 감독님 영화를 보면 여전히 설렌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는 동료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나? 정소영 살아남자. 20대 초반에 이 일을 시작했는데 어느덧 30대 후반을 지나고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뭉클한 동료애를 느낀다. 다들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계속 얼굴을 보고 지냈으면 좋겠다. 김정인 나 역시 같은 마음을 갖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건 수프를 끓이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재료를 준비하고 다듬어 맛이 우러나도록 오래오래 끓이는 거지. 지금 우리는 조용히 끓고 있는 시기다. 그러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무엇인가 우러나고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살아나가자! 황슬기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거다. 잘하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사실 나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