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아이

박서련

장편소설 <체공녀 강주룡> <마르타의 일> <더 셜리 클럽> <마법소녀 은퇴합니다>, 소설집 <호르몬이 그랬어>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단편소설 <코믹 헤븐에
어서 오세요>, 산문집 <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등이 있다. 제23회 한겨레문학상과 2021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뭘 사 가면 좋을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던킨은 너무 무난하려나? 노티드나 랜디스 정도는 사 가야 신경 좀 썼구나 하려나? 이제 와서 그런 생각해서 뭐 해, 줄 서서 살 여유도 없고 가는 길에 매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던킨보다 스벅이 나으려나? 스벅에서 산다고 치면 뭘 사 가야 좋담. 선생님들끼리 나눠 먹기 괜찮은 게 있으려나. 그냥 선생님 혼자 쓰시라고 기프트 카드를 드릴까? 요즘 선생님들 그런 거 받아도 되나? 영어 유치원 선생님들은 공무원 아니라서 그런 거 상관없나. 공무원은 고사하고 한국인도 아닌데.
나올 때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다. 웃으면서 한 10분, 10분은 너무 짧은가, 한 20분? 스몰 토크나 좀 나누러 가는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되뇌며 나온 참이었다. 물론 이쪽은 분명 용건이 있어 방문하는 거지만, 학부모가 잠깐 아이 얘기하러 들르는 게 별나고 유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잘못한 것도 없고.
스타벅스 앞에서 잠깐 머뭇대다 결국 그냥 길을 건넜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뭘 살지 정하지도 못한 채로 매장에 들어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8차선 도로 건너 짧은 상가 골목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야 하는지라 이미 아슬아슬한 참이었다. 외국인들은 시간 약속에 더 예민하다지? 학부모도 엄연히 고객인데 고작 1, 2분 늦는 걸로 무안 줄 것 같진 않지만. 상가 끝 언덕 시작 지점, 모퉁이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이 최후의 보루인 양 눈에 띄었다.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크게 저은 것은 겨우 주스병 세트를 사느라 늦느니 빈손으로 정시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트리플 아이(I), 임영수 인펀트 인스티튜트. 아들이 다니는 영어 유치원의 기둥형 간판은 언덕 초입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가운데에 있는 큰 I가 좌우를 장식한 i를 감싸 안은 듯한 로고는 세련된 한편 교육기관다운 신뢰감을 주는 디자인이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문자 I는 인스티튜트일까, 인펀트일까, 학원장 임영수일까? 언덕을 오르느라 청키 힐 구두 뒤꿈치가 헐떡거리고 곁땀이 스산히 배어나는 걸 느끼면서도 줄곧 그 위풍당당한 간판만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죠?”
들어가자 백화점 로비 데스크 직원처럼 입은 사람이 백화점 로비 데스크처럼 꾸며놓은 입구에 앉아 있었다. 입학 설명회 때와 아들을 처음 등원시킬 때 이미 보았지만 봐도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무슨 유치원에 리셉셔니스트가 다 있담. 종종걸음 쳐 올라오느라 껴안고 있다시피 했던 클러치 백을 한 손에 옮겨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저는 피터 엄마인데요. 오늘 클래스 티처 면담 신청했거든요.”
“자녀분 클래스가요?”
“프리스쿨(pre-school) 타이거 클래스요.”
“네, 잠시만요.”
로비 직원은 내게 미소 짓고 방송 마이크를 켰다.
“Mr. Tailor, you got a guest. Please go to the meeting room.”
영유는 역시 다르구나. 하물며 로비 직원까지 발음이 끝내주네. 로비 직원은 마이크를 끄고 3층 응접실로 가면 된다고 한국말로 안내했다. 얼떨떨하게 로비를 지나쳐 중앙 계단을 오르면서 몇 번이고 로비를 돌아보았다. 영유는 역시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아들을 트리플 아이에 보낸 건 기적적인 일이었다. 무려 3차에 걸친 관문을 뚫고 이루어낸 쾌거였으니까. 우선 입학 설명회 참석권을 따내는 게 1차, 입학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가 2차, 인터뷰에서 합격선에 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첨이 3차. 1차는 피 튀기는 예매 경쟁이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했고, 2차는 10년도 더 전에 치른 대학 입시 면접을 연상케 했으며, 3차는 아파트 청약처럼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아들이 트리플 아이에 입학하게 된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가수의 콘서트장에서 대학 합격 문자와 아파트 분양 성공 문자를 동시에 받으면 그렇게 기쁠까? 물론 우리 살림에는 원비가 다소 빠듯한 편이지만, 나도 남편도 조건이 빠지지는 않는 데다 아직 한창이어서 앞으로의 기대 수입이 더 높으니 과감해질 수 있었다. 우리야 그렇다 치고 다른 학부모들은 다 ‘사’자 돌림 직업이니, 우리 아들은 조건 좋은 집안 아이들과 아주 일찌감치 인맥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겸사겸사 나도 행사든 뭐든 부지런히 참석하며 얼굴도장을 찍고 잘나가는 학부모들과 연 좀 맺어놓으면 좋고… 그게 다 투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애초에는.
“하이, 미시즈 킴. 피터의 클래스 티처 마이클입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으로부터 5분가량 지났을 때 아들의 담임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한국어 발음은 그런대로 유창하지만 미묘하게 공손하지 않은 태도와 함께였다. 얼굴을 보니 시간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어서 역시 뭐라도 사 들고 올걸 그랬나 싶었지만, 사 와도 별로 감사해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편 들었다.
“다름이 아니고, 어제 피터가 했다는 소꿉놀이 얘기를 하려고 왔어요.”
다짜고짜 본론을 들이밀었다. 나올 때만 해도 정말이지 캐주얼하게, 프렌들리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시시껄렁한 스몰 토크나 나눌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마이클은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다가 Oh, 하며 싱긋 웃었다.
“What’s that word in Korean, 아, 소통. 소통 능력과 상상력 발달에 pretend playing이 최고니까요.”
아동 발달에 대한 매우 기초적인 지식이었지만 영어로 말하니 왠지 더 그럴싸해 보였다. 그렇지, 여자애들은 화장 놀이를 하고, 남자애들은 소방차 붕붕 놀이를 하면서 역할 학습도 하고 정서도 발달시키지.
“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숨을 한껏 들이쉬고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남자애랑 남자애랑 커플을 시켰다면서요.”
“네. 피터랑 바비였죠, I guess.”
쏘 왓? 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나?
“마이클 선생님은 그런 문화가 익숙한 곳에서 오셔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한국은 아직 그렇지 않거든요. 더구나 아직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은 아동들에게 그런 식으로 성 소수자 역할을 맡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들에게 그 얘기를 듣고부터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지만 참고 참으며 고르고 고른 말, 집을 나서기 전 수십 수백 번 속으로 되뇌며 연습해온 말이었다. 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아들을 안고 이딴 곳에 더는 내 아이를 맡기지 않겠다며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원어민 교사가 한국 문화에 대해 잘 몰라 저지른 실수라 믿으며 마음을 가다듬은 거였다. 이번 일은 사소한 잡음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여기며 넘겨버리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내가, 우리 부부가 트리플 아이에 아들을 보내느라 들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마이클은 뉘우쳐야만 했다.
“Oh, it’s so awkward….”
마이클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시즈 킴, 그건 피터의 아이디어였어요.”
“네?”
“좋아하는 사람하고 커플이 되는 거라고, 티처로서 힌트는 줬지만, 피터가 제일 먼저 바비 손을 잡았죠.”
“뭐라고요?”
“Actually, 저는 피터가 칭찬을 deserve,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며 brilliant, 놀이의 규칙을 알고 자기 스타일로 놀겠다고 한 거죠.”
마이클은 끊임없이 지껄여댔고 대충 좋은 내용 같기는 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우리 애가 다른 애랑 게이 소꿉놀이를 하자고 했다는 사실이 머리와 가슴을 꽉 채워 다른 생각이나 기분은 비집고 솟아날 틈이 없었다. 내가 한참 말을 못 잇자 마이클이 또 지껄였다.
“Also, 인터뷰 때 글로벌 이슈, 특히 마이너리티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미시즈 킴.”
닥쳐, 인마. 셧 더 퍽 업, 이 새끼야. 네가 내 기분을 알아?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들이 게이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심정을 알아? 그렇게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으면서 다른 무슨 말이라도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렵사리 짜낸 말은 겨우 이랬다.
“선생님은 우리 애가 게이라고 생각하세요?”
마이클은 곤란해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You know,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이잖아요. Love and like의 차이도 아직… 잘 모를 겁니다.”
역시 그렇죠? 그런 거겠죠? 이번 일 하나로 우리 애가 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런 심정으로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마이클이 물었다.
“그러면 그 애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이가 되나요?”
그건 마이클이 처음으로 영어를 전혀 섞지 않고 건넨 말이었는데도 어쩐지 난생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뭘 사 가면 좋을지 미처 생각을 못 했네. 던킨은 너무 무난하려나? 노티드나 랜디스 정도는 사 가야 신경 좀 썼구나 하려나? 이제 와서 그런 생각해서 뭐 해, 줄 서서 살 여유도 없고 가는 길에 매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던킨보다 스벅이 나으려나? 스벅에서 산다고 치면 뭘 사 가야 좋담. 선생님들끼리 나눠 먹기 괜찮은 게 있으려나. 그냥 선생님 혼자 쓰시라고 기프트 카드를 드릴까? 요즘 선생님들 그런 거 받아도 되나? 영어 유치원 선생님들은 공무원 아니라서 그런 거 상관없나. 공무원은 고사하고 한국인도 아닌데.
나올 때만 해도 가벼운 마음이었다. 웃으면서 한 10분, 10분은 너무 짧은가, 한 20분? 스몰 토크나 좀 나누러 가는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다고 되뇌며 나온 참이었다. 물론 이쪽은 분명 용건이 있어 방문하는 거지만, 학부모가 잠깐 아이 얘기하러 들르는 게 별나고 유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잘못한 것도 없고.
스타벅스 앞에서 잠깐 머뭇대다 결국 그냥 길을 건넜다.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뭘 살지 정하지도 못한 채로 매장에 들어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것 같았다. 8차선 도로 건너 짧은 상가 골목을 지나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야 하는지라 이미 아슬아슬한 참이었다. 외국인들은 시간 약속에 더 예민하다지? 학부모도 엄연히 고객인데 고작 1, 2분 늦는 걸로 무안 줄 것 같진 않지만. 상가 끝 언덕 시작 지점, 모퉁이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이 최후의 보루인 양 눈에 띄었다.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크게 저은 것은 겨우 주스병 세트를 사느라 늦느니 빈손으로 정시에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트리플 아이(I), 임영수 인펀트 인스티튜트. 아들이 다니는 영어 유치원의 기둥형 간판은 언덕 초입에서부터 눈에 띄었다. 가운데에 있는 큰 I가 좌우를 장식한 i를 감싸 안은 듯한 로고는 세련된 한편 교육기관다운 신뢰감을 주는 디자인이었다. 그런데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문자 I는 인스티튜트일까, 인펀트일까, 학원장 임영수일까? 언덕을 오르느라 청키 힐 구두 뒤꿈치가 헐떡거리고 곁땀이 스산히 배어나는 걸 느끼면서도 줄곧 그 위풍당당한 간판만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오셨죠?”
들어가자 백화점 로비 데스크 직원처럼 입은 사람이 백화점 로비 데스크처럼 꾸며놓은 입구에 앉아 있었다. 입학 설명회 때와 아들을 처음 등원시킬 때 이미 보았지만 봐도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무슨 유치원에 리셉셔니스트가 다 있담. 종종걸음 쳐 올라오느라 껴안고 있다시피 했던 클러치 백을 한 손에 옮겨 쥐고, 나머지 한 손으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저는 피터 엄마인데요. 오늘 클래스 티처 면담 신청했거든요.”
“자녀분 클래스가요?”
“프리스쿨(pre-school) 타이거 클래스요.”
“네, 잠시만요.”
로비 직원은 내게 미소 짓고 방송 마이크를 켰다.
“Mr. Tailor, you got a guest. Please go to the meeting room.”
영유는 역시 다르구나. 하물며 로비 직원까지 발음이 끝내주네. 로비 직원은 마이크를 끄고 3층 응접실로 가면 된다고 한국말로 안내했다. 얼떨떨하게 로비를 지나쳐 중앙 계단을 오르면서 몇 번이고 로비를 돌아보았다. 영유는 역시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
아들을 트리플 아이에 보낸 건 기적적인 일이었다. 무려 3차에 걸친 관문을 뚫고 이루어낸 쾌거였으니까. 우선 입학 설명회 참석권을 따내는 게 1차, 입학 설명회에 참석한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가 2차, 인터뷰에서 합격선에 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추첨이 3차. 1차는 피 튀기는 예매 경쟁이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했고, 2차는 10년도 더 전에 치른 대학 입시 면접을 연상케 했으며, 3차는 아파트 청약처럼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아들이 트리플 아이에 입학하게 된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내 가수의 콘서트장에서 대학 합격 문자와 아파트 분양 성공 문자를 동시에 받으면 그렇게 기쁠까? 물론 우리 살림에는 원비가 다소 빠듯한 편이지만, 나도 남편도 조건이 빠지지는 않는 데다 아직 한창이어서 앞으로의 기대 수입이 더 높으니 과감해질 수 있었다. 우리야 그렇다 치고 다른 학부모들은 다 ‘사’자 돌림 직업이니, 우리 아들은 조건 좋은 집안 아이들과 아주 일찌감치 인맥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겸사겸사 나도 행사든 뭐든 부지런히 참석하며 얼굴도장을 찍고 잘나가는 학부모들과 연 좀 맺어놓으면 좋고… 그게 다 투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애초에는.
“하이, 미시즈 킴. 피터의 클래스 티처 마이클입니다.”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으로부터 5분가량 지났을 때 아들의 담임이 응접실에 들어왔다. 한국어 발음은 그런대로 유창하지만 미묘하게 공손하지 않은 태도와 함께였다. 얼굴을 보니 시간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어서 역시 뭐라도 사 들고 올걸 그랬나 싶었지만, 사 와도 별로 감사해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한편 들었다.
“다름이 아니고, 어제 피터가 했다는 소꿉놀이 얘기를 하려고 왔어요.”
다짜고짜 본론을 들이밀었다. 나올 때만 해도 정말이지 캐주얼하게, 프렌들리하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시시껄렁한 스몰 토크나 나눌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마이클은 눈썹을 한껏 치켜올렸다가 Oh, 하며 싱긋 웃었다.
“What’s that word in Korean, 아, 소통. 소통 능력과 상상력 발달에 pretend playing이 최고니까요.”
아동 발달에 대한 매우 기초적인 지식이었지만 영어로 말하니 왠지 더 그럴싸해 보였다. 그렇지, 여자애들은 화장 놀이를 하고, 남자애들은 소방차 붕붕 놀이를 하면서 역할 학습도 하고 정서도 발달시키지.
“네, 아니, 그게 아니고요.”
숨을 한껏 들이쉬고서야 겨우 말할 수 있었다.
“남자애랑 남자애랑 커플을 시켰다면서요.”
“네. 피터랑 바비였죠, I guess.”
쏘 왓? 하는 듯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백인 남자의 얼굴을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나?
“마이클 선생님은 그런 문화가 익숙한 곳에서 오셔서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한국은 아직 그렇지 않거든요. 더구나 아직 정체성이 확실하지 않은 아동들에게 그런 식으로 성 소수자 역할을 맡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들에게 그 얘기를 듣고부터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지만 참고 참으며 고르고 고른 말, 집을 나서기 전 수십 수백 번 속으로 되뇌며 연습해온 말이었다. 심정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아들을 안고 이딴 곳에 더는 내 아이를 맡기지 않겠다며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원어민 교사가 한국 문화에 대해 잘 몰라 저지른 실수라 믿으며 마음을 가다듬은 거였다. 이번 일은 사소한 잡음이라고, 별일 아니라고 여기며 넘겨버리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내가, 우리 부부가 트리플 아이에 아들을 보내느라 들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마이클은 뉘우쳐야만 했다.
“Oh, it’s so awkward….”
마이클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시즈 킴, 그건 피터의 아이디어였어요.”
“네?”
“좋아하는 사람하고 커플이 되는 거라고, 티처로서 힌트는 줬지만, 피터가 제일 먼저 바비 손을 잡았죠.”
“뭐라고요?”
“Actually, 저는 피터가 칭찬을 deserve, 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창의적이고 적극적이며 brilliant, 놀이의 규칙을 알고 자기 스타일로 놀겠다고 한 거죠.”
마이클은 끊임없이 지껄여댔고 대충 좋은 내용 같기는 했지만, 귀에 제대로 들어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우리 애가 다른 애랑 게이 소꿉놀이를 하자고 했다는 사실이 머리와 가슴을 꽉 채워 다른 생각이나 기분은 비집고 솟아날 틈이 없었다. 내가 한참 말을 못 잇자 마이클이 또 지껄였다.
“Also, 인터뷰 때 글로벌 이슈, 특히 마이너리티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미시즈 킴.”
닥쳐, 인마. 셧 더 퍽 업, 이 새끼야. 네가 내 기분을 알아?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아들이 게이일지도 모르는 사람의 심정을 알아? 그렇게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으면서 다른 무슨 말이라도 떠올려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어렵사리 짜낸 말은 겨우 이랬다.
“선생님은 우리 애가 게이라고 생각하세요?”
마이클은 곤란해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You know,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이잖아요. Love and like의 차이도 아직… 잘 모를 겁니다.”
역시 그렇죠? 그런 거겠죠? 이번 일 하나로 우리 애가 게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거겠죠? 그런 심정으로 절박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마이클이 물었다.
“그러면 그 애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아이가 되나요?”
그건 마이클이 처음으로 영어를 전혀 섞지 않고 건넨 말이었는데도 어쩐지 난생처음 듣는 외국어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사람하고 커플이 되는 거라고, 티처로서 힌트는 줬지만, 피터가 제일 먼저 바비 손을 잡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