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들의 대화 body talk 바디 포지티브

body talk 바디 포지티브 아픈 몸 무대에 서다

조한진희

여성 · 평화 · 장애 운동 활동가,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책 <질병과 함께 춤을> <아픈 몸, 무대에 서다> 기획. “우리는 건강 세계의 시민권을 욕망하며 좌절하기보다는 건강을 재단당하지 않으며 질병 세계에서 동료 시민들과 어울려 살길 바란다.” 2만 명 이상 관객이 관람하고, 2021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후보에 오른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기획한 조한진희. 당시 무대에 올랐던 여섯 배우와 함께 질병과 장애의 이야기를 묶은 책 <아픈 몸, 무대에 서다>를 출간했다.

 

“우리는 생명체고, 우리 몸은 생로병사를 겪는다.
생-로-병-사가 살아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태어나는 것 이외에 나이 들고, 질병에 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비극으로 소비한다.
끊임없이 안티에이징을 강조하고, 질병에 걸린 것은 자기관리의 실패고,
영원히 젊고 건강한 몸으로 남아 있길 원한다.”

 

시민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를 기획하고 이후 기록을 남기고 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큰 틀에서 보면 질병권(잘 아플 권리) 운동의 일환이다. 질병권은 아무리 노력해도 건강을 회복할 수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건강을 회복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잘 아플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을 담고 있다. 그 첫걸음 중 하나가 아픈 이들이 자신의 질병 경험을 스스로 해석하는 질병 서사의 기록이었다. 흔히 몸이 아프면 치료에만 매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은 복잡한 존재다. 일반적으로 중증 질환을 진단받으면 처음에는 오진은 아닐까 희망을 품다가 결국은 인정하게 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이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 묻고 추적하게 되고. 생활 습관, 스트레스, 종교적 깨달음, 환경 등에 대한 가설을 세우며 질병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이해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다가 병이 장기화되면 질문은 다소 바뀐다. ‘왜 이런 병에 걸렸을까’에서 ‘나에게 이 질병 경험은 무엇인가’로.

‘질병 서사’의 기록을 통해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 질병 서사란 자신의 질병 경험을 자신의 시선으로 해석하는 거다. 최근 몇 년 사이 질병 서사에 변화가 생기고 있지만, 여전히 주류 질병 서사는 극복했다거나 삶의 선물(신을 만나거나,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은 계기)이라는 내용이 많다. 이런 서사 자체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문제가 있다. 긍정과 감사로 노력하면 질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식의 서사는 질병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맥락을 지우기 때문이다. 질병은 모든 생명체가 위협을 느끼는 사건이고, 사유하는 동물인 인간은 자신에게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해석하고 삶 속에서 위치 짓고 싶어 한다. 자신의 질병 경험을 해석한다는 것은 의료적 치료와 별도로 질병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그런 점에서 현재 주류 질병 서사를 바꿔놓는 것이 질병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철학과 관점을 변화시키는 유용한 방식이 될 것이라고 봤다.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주의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질병 경험이 개인화되고, 고통의 나열로만 보이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질병과 아픈 사람을 대하는 사회의 제도와 태도가 바뀌면 아픈 이들의 불행도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건강의 손상이 곧 삶의 손상인 건 아니니까. 그런 점에서 질병의 사회적 맥락이 잘 드러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 우리는 이를 ‘저항적 질병 서사’라고 부른다. 질환이 발생하고 치료되는 과정에는 젠더나 빈곤 등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가 압축적으로 녹아 있다. 이를테면 우리 연극의 배우이자 이 책에도 글을 쓴 다리아님은 난소낭종이 생긴 것에 대해 개인의 건강관리 소홀로 인식하고 자책했지만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왕복 4시간 장거리 출퇴근자라는 사실, 몸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고, 규칙적으로 운동하고,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여건이 없었음을 인식했다. 이는 일자리가 과도하게 서울에 집중된 현상, 비싼 집값이 질병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으로 확장됐다. 노동강도가 높고 야근이 이어지는 일상이 질병을 일으키는 구조라는 것을 인지하게 된 거다. 막연히 개인의 생활 습관을 문제 삼고 자기 비난을 하던 데에서 벗어나 질병에 대한 사회적 맥락을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무엇을 원인이자 문제로 삼느냐에 따라 대안은 달라진다고 본다.

우리 사회가 몸을 인식하고 대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스스로 내 정체성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했다. 당시 흡연을 했는데 여성은 임신할 몸이니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는 소리에 실소가 나오기도 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전시 강간에 대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여성의 몸을 통해 ‘민족’이 유지되거나 전쟁이 확장되는 방식에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우리의 몸이라는 게 차별과 억압이 흐르는 장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졸업 후 여성 단체인 여성민우회의 상근 활동을 시작으로 이후 평화운동이나 장애인권 운동으로 확장되는 사회운동을 해왔다. 2009년 팔레스타인 현장 활동 과정에서 건강이 나빠지면서 질병 이슈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아프고 나서 아픈 사람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프다는 몸 상태가 차별의 원인이 아니라 건강 중심 사회이기 때문에 차별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다.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몸과 관련한 무례한 시선과 발언을 자주 마주한다. 이런 무례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외모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사회다. 그걸 관심과 안부 인사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관심을 외모에 대한 평가로 전하는 문화가 바뀌고, 외모 이야기를 좀 덜하는 문화가 자리 잡히면 좋겠는데 쉽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살이 쪘다고 하면 “찔 만해서 쪘어”, 피부가 좋아졌다고 하면 “좋아질 만해서 좋아졌어”, “내 몸은 몸 이야기 하는 거 안 좋아하더라고”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 몸을 제삼자화해서 말하는 방식인데 매 순간 토론이나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으니 우회적이지만 명확하게 ‘그런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표현한다.

몸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들은 말이나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아픈 몸들을 만나면 건강 정보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증세에는 어떤 음식이, 운동이 좋다는 식이다.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에 말하는 것이겠지만, 아픈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리고 아픈 몸에게도 여러 정체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환자’라는 정체성만 강조되고,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의 정체성을 제한하는 행위일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면 좋겠다.

몸에 대한 인식은 미디어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디어가 몸을 다루는 잘못된 방식 중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 보는가? 문제적인 지점이 너무 많지만 두 가지만 꼽자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질병을 인물이 비극을 겪는 장치로 설정한다는 것이다. 혹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로 삼거나. 질병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몸을 극복의 대상으로, 질병이나 장애를 이겨야 하는 것으로 말한다. ‘몸의 극복’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몸을 둘러싼 이슈에서 ‘극복’은 대개 문제적이다. 차별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기 때문이다. 장애나 질병을 극복한다고 할 때, 그게 어떤 의미일까. 질병이나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차별하거나 배제하는 사회나 문화적 문제들을 고스란히 그대로 둔 채, 엄청난 노력으로 그걸 넘어선 사람들을 조명하지 않나. 노력한 개인은 박수 받아 마땅하지만 그런 서사들이 횡행할 때, 질병이나 장애의 문제가 ‘개인화’된다. 개인이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는 프레임이 형성되는 거다. 각자의 몸을 ‘극복’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더 필요한 일 아닐까. 어떤 질환은 개인이 아무리 노력하고 최첨단 의학이 개입해도 나아질 수 없다. 평생을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몸을 극복하라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자 형벌 같은 거다. 아프더라도 이 사회에서 차별이나 배제를 겪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와 장치가 필요하다. 극복되어야 할 것은 개인의 몸이 아니라 건강한 비장애인 중심의 사회다.

여성의 삶에 ‘보디 포지티브’라는 말이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 ‘몸의 긍정’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서 되찾아오고 싶은가?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라는 메시지는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그게 개인의 ‘정신 승리’로 가능한 건 아니라고 본다. 이 사회제도나 문화가 변화해야 한다. 우리는 생명체고, 우리 몸은 생로병사를 겪는다. 생-로-병-사가 살아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태어나는 것 이외에 나이 들고, 질병에 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비극으로 소비한다. 끊임없이 안티에이징을 강조하고, 질병에 걸린 것은 자기관리의 실패고, 영원히 젊고 건강한 몸으로 남아 있길 원한다. 이런 현실은 죽음이 건강이나 젊음과 대립하는 현상이 아니라 몸의 통합적 과정이어야 한다는 개념을 삭제한다. 정신 승리로서의 몸의 긍정이 아니라, ‘몸을 긍정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라고 요구하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미디어가 만드는 ‘단일한 표준의 미’의 개념에 저항해 다양한 몸들이 미디어에 등장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일 수 있다.

 

body talk 바디 포지티브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김소민

책 <이해하거나 오해하거나>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 저자. <한겨레>에서 13년간 기자로 일하고 국제 구호단체 ‘세이브더칠드런’에 몸담았던 김소민 작가의 신간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는 몸에 대한 협소한 시각이 어떻게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는지를 꿰뚫는 통찰로 빛나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한국은 ‘정상적인’ 몸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협소하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잔인한 사회다.
그러니 ‘정상’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모두 분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준이 말도 안 되는 거라도 거기에 맞춰 달리는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런 곳에선 ‘정상’에 속한 사람들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언제 기준 밖으로 떨어질지 모르니까.”

 

책 <나의 아름답고 추한 몸에게>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전작 <가끔 사는 게 창피하다>를 쓸 때였다. 외모 콤플렉스에 대한 글이 가장 쓰기 어려웠다. 진짜 상처는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취업하고 나서 여드름에 시달렸는데 상처 되는 말을 많이 들었다. 다들 우스갯소리로 던지니 정색하기도 어려웠다. 정색하면 내가 그 놀림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걸 들키게 되지 않나. 10년이 지나 그때의 경험을 글로 쓰는데도 그 말들이 생생했다. 왜 상처를 상처라고 말도 못 할까. ‘아름다운 외모’ , ‘정상적인 몸’에 대한 압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통제 도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억압받는 사람이 자신을 혐오하게 되니까. 다른 계기는 2019년에 형제복지원, 선감원, 서산개척단 피해자들을 취재한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만 따져도 수십만 명이 장애인이라서, 행색이 초라해서, 부랑자라서 수용소로 보내지지 않았나. 한국은 ‘정상적인’ 몸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협소하다. 그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잔인한 사회다. 그러니 ‘정상’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모두 분투할 수밖에 없다. 그 기준이 말도 안 되는 거라도 거기에 맞춰 달리는 수밖에 없는 거다. 이런 곳에선 ‘정상’에 속한 사람들도 불안할 수밖에 없다. 언제 기준 밖으로 떨어질지 모르니까.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고, 보다 선명해진 생각이 있는가? 마사 너 스바움의 책 <혐오와 수치심>을 읽고 놀랐다. 혐오 앞에는 이런 낱말이 주로 붙는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유색인… 이 사람들이 뭘 잘못했겠는가. 악한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들이다. 너스바움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이고 유한한 존재인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은 자기 안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사회적으로 취약한 계층에 투사한다. 이 혐오는 비유와 이분법을 타고 자라난다. 아름다움은 선함, 남자다움은 용기가 되는 식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추함이 존재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약함을 껴안지 못하면 나 자신과 친구가 되지 못하는 선에서 끝나지 않겠구나. 타인을 바로 그 시선으로 분류하고 줄 세우겠구나(이미 그렇게 하고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 깨달음의 과정에서 주제가 차별로 더 깊고 넓어졌다. 모든 차별엔 비슷한 논리가 깔려 있는 거 같다. 근대 이후에는 이런 식이다. ‘이성이 최고의 가치다. 이 이성을 담보한 몸은 이런 몸이다(인간, 백인, 남성, 비장애인).’ 이렇게 정해놓고 줄을 세운다. 그 줄은 인간에서 끝나지 않는다. 수나우라 테일러는 책 <짐을 끄는 짐승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왜 수어를 할 줄 아는 침팬지 ‘부이’를 영장류 연구소로 부터 풀어달라는 여론은 들끓었지만, 그렇지 못한 침팬지들은 관심 밖에 방치되었나?’ 수나우라 테일러는 장애인과 동물의 차별 논리는 같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는 ‘이성을 담는 특별한 몸’이란 개념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에 따라 존재의 가치에 차등을 두는 거다. 애초에 이 논리의 전제 자체가 진리라는 근거는 아무 데도 없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몸에 대한 생각 중 가장 떨치고 싶었던, 마지막까지도 떨치기 어렵던 고정관념이나 틀린 생각이 있는가? ‘똑똑한 여자는 예쁜 여자를 못 이기고, 예쁜 여자는 팔자 좋은 여자를 못 이긴다.’ 40대인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자랐다. 부모가 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런 말들이 공기처럼 어디에나 떠돌았고 내 안에 스며들었다. 동의할 수 없는 이런 말들은 나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려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특히 연애가 깨질 때 이런 생각이 많이 든다. 예쁘지 않으면 사랑받지 못할 거고, (특히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여자의 인생은 끝이라는 공포가 있다. 공포와 연결된 생각은 떨치기가 어렵다. 이제 안다. 우리는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 사랑하는 게 중요하다. 사랑하는 인생은 절대 실패할 수 없다.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몸과 관련한 무례한 시선과 발언을 무방비로 맞닥뜨려야 할 때도 많다. 이런무례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아직 무례에 잘 대처하지 못하지만 롤 모델은 있다. 개그맨 김숙이다. 한 프로그램에서 누군가 무례한 말을 했을 때 김숙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어, 상처 주네”라고 반응 하더라. 그렇게 솔직하게 사실을 말하고 싶다. 악의를 가진 사람도 있지만 몰라서 그런 경우도 많으니까 담담하게 알려주는 거다. 경험상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상처받았다고 말하면 대개 미안해하더라. 화를 내면 상대는 본인의 행동을 돌아보기 전에 방어부터 하게 되는 거 같다. 연습하려 하는데 잘 안 된다.

몸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들은 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는가? 외모를 평가하고 비하하는 말이 문제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두려워하는 말이 있다. ‘늙어 보인다’다. 한국에서 그 말은 곧 생산성이 떨어지고 매력을 잃은 존재란 뜻이니까. 이 말을 두려워하면 자기를 미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반드시 늙을 테니까. 이미 늙어가고 있다. 노화에 대해 공포를 자극하고 마치 관리를 잘하면 늙지 않을 거처럼 선동하는 것은 결국 뭘 팔기 위한 목적이라고 본다.

몸에 대한 인식은 미디어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디어가 몸을 다루는 여러 잘못된 방식 중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 보는가? 예전에 <JTBC 뉴스룸> 앵커 브리핑에서 손석희 앵커가 안경 쓸 권리에 대해 말한 적 있다. 꾸밈 노동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런데 정작 JTBC 뉴스에는 안경 쓴 여자, 뚱뚱한 여자, 나이 든 여자는 기자나 앵커로 나오지 않는다. 2017년 국가인권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7개 방송 종합 뉴스에서 여성 앵커는 10명 중 8명이 30대 이하, 남성 앵커는 10명 중 9명이 40대 이상이었다. 이 뉴스들은 매일 전 국민에게 ‘한국에서 남자에게 중요한 건 경력이고, 여자에게 중요한 건 젊음’이라는 걸 보여준다.

몸을 극복의 대상으로, 질병이나 장애를 이겨야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몸의 극복’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자기 관리’라는 말이 싫다. 관리는 특정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지 않나. 사람은 돌보는 존재이지, 관리하는 대상이 아니다. ‘몸의 극복’도 마찬가지다. 어떤 본질적인 자아가 있고 몸은 그 자아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만 보는 태도 같다. 어떤 특징을 ‘고통’으로 만드는 건 사회적 구조일 때가 많다. 가령 경사로가 없는 건물에는 장애인이 진입하기 어렵다. 이때 장애인의 진입을 방해하는 건 그의 몸인가? 경사로가 없는 건물인가? 그 ‘고통’을 해결해야 하는 건 개인이 아니라 사회인데 왜 자꾸 개인에게 극복하라고 할까. 누군가 내 몸을 극복하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되묻고 싶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body talk 바디 포지티브

body talk 바디 포지티브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신채윤

책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 저자. 열일곱 살의 나이에 1백만 명 중 2명꼴로 나타난다는, 원인을 알 수 없고 치료제도 없는 희귀 난치병 다카야스 동맥염(대동맥활증후군)을 앓게 된 신채윤 작가. 아픈 나도, 아픈 날도 본인이자 본인의 인생임을 깨닫고 병으로 인해 일상을 놓치지 않겠다고, 내가 나인 것을 잊지 않고 살겠노라 ‘결정’한다.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차분하면서도 힘 있는 문장으로 담아냈다.

 

“몸의 긍정’이라는 말을 정의하는 것은 내게 너무 어렵다.
떼놓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들 그럴 수 없으니,
그런 생각까지도 받아들이고 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몸이 미워지는 순간마다 어르고 달래서,
그래도 같이 갈 수 있다고 토닥이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꼭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니, 사랑이 온전히 내 마음에
들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몸을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책 <그림을 좋아하고 병이 있어>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19년 여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것 그리고 우리에 관해 계속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읽은 적 있다. 당시 계속 병원을 다니며 몸에 이상이 있다는 게 점점 윤곽이 잡혔는데, 그때 나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많은데 이렇게 아프기만 하다 죽는다면 나 자신에게 온전하고 열정적으로 시간을 쏟는 경험을 하지 못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아프면서도 내가 나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에 마음에 담아둔 문장, ‘살아남음으로써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떠올랐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나에 대해 말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나에 관한 기록은 곧 몸에 관한 기록이 됐다.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주의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 자신에게 갖는 태도에 주의를 기울였다. 독자들은 나의 시선으로 한 번 걸러진 나를 보게 되는 거니까,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최대한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책의 첫 장에도 나오지만, 처음에는 아픈 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집중했다. 다른 사람들이 병의 직접적인 원인이 나의 행동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지만, 자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힘들었으니까. 그런데 병에 걸린 것이 내 탓이 아님에도 병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는 내 탓을 하게 되더라. 병으로 인해 일상에서 놓치는 것이 많았고, 순간순간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다. ‘혹시 꾀병을 부리는 건 아닐까? 더 열심히 할 수 있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은 건 아닐까?’ 하고. 단순히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이런 생각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로 느껴진다. 그래서 병 전반에 대해 내 잘못이 아니라며 일반화하는 태도를 버렸다. 더 이상 그런 두루뭉술하고 자기방어적인 생각으로는 나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는 순간순간을 ‘살아내는’ 데에 집중했다. 때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감정을 느끼면 ‘왜 나는 지금 이런 감정이 드는지, 이 감정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실체를 알면 더 이상 어둠 속을 짚어가는 것 같은 막막한 두려움이 들지 않으니까. 독자들 역시 자신의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대해 ‘자책해서는 안 되는 것’, ‘우울해해서는 안 되는 것’, ‘힘들어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규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순간에 들어맞을 수 있는 것, 내 모든 상태를 설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언어는 없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몸에 대한 생각 중 가장 떨치고 싶었던, 마지막까지도 떨치기 어렵던 고정관념이나 틀린 생각이 있는가? 체형에 관한 생각이었다.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돌봐준 할머니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시는 분이셨는데, 어릴 때부터 “너는 콧대만 조금 높으면 예쁠 테니 커서 성형을 해라”, “밤에 먹으면 살이 찌니 조절해라” 하는 말을 듣고 자랐다. 할머니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분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마른 몸이 예쁘기 때문에’ TV 프로그램에 나온 ‘위가 작아지는 운동’을 하고 식사량을 줄이기도 했다. 저체중에 빈혈을 달고 살았다. 약을 복용한 뒤로 부작용으로 몸이 많이 부었는데 내가 유지해오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몸의 변화가 낯설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신경이 쓰였다. 붓기 전에는 나름대로 내 외형이 마음에 들었는데, 이후로는 내가 더 이상 내 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상처가 됐다.

몸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들은 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는가? 어떤 분들은 내게 나을 수 있다며 희망을 주려고 한다.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내가 갖고자 하는 희망은 아픈 채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반드시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다는 희망 말이다. 그대신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물어봐줬으면 좋겠다. 내가 받고 싶은 관심은 그런 거다.

몸을 극복의 대상으로, 질병이나 장애를 이겨야 하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몸의 극복’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병을, 장애를 ‘이겨내면’ 병과 장애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나? 병과 장애를 겪는 시간 동안 쌓인 상처와 생각들은 눈 녹듯 사라져 없어지나? 장애를 극복하고 병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방송에서도 자주 볼 수 있고, 흥미를 돋우는 미담이기도 하다. 하지만 ‘물리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도 적고, 피나는 노력을 한다 해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기지 않아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매 순간은 아니더라도 자주 행복했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그런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몸의 극복’이라고 바꿔 말하고 싶다.

여성의 삶 안에 ‘보디 포지티브’라는 말이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 ‘몸의 긍정’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서 되찾아오고 싶은가? 아픈 나를 사랑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지금도 그렇다. 매일 시도하지만 매일 실패한다. ‘아름다운’ 모습에 대한 내 기준이 있지만 아픈 모습은 아니니까. 건강하지 않은 모습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앓고 있는 다카야스 동맥염은 바이러스에 의한 것은 아니다. 병 자체가 내 몸이라는 이야기다. 병을 앓고 있는 혈관이 내 몸의 일부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내 몸의 일부이기에, 때로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별주부전> 속 토끼의 간처럼(제 간을 떼어놓고 다닌 건 아니지만) 심장과 혈관을 떼어놓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토끼는 ‘간만 없었어도 자라에게 잡혀갈 일은 없었을 텐데, 용왕이 노리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고 자기 간을 미워하지 않았을까? 없는 척해도 사실 달고 다닐 수밖에 없는 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비록 자신에게 없다고는 말했지만 그것은 간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수긍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긍정’이라는 말을 정의하는 것은 내게 너무 어렵다. 떼놓고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한들 그럴 수 없으니 그런 생각까지도 받아들이고 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몸이 미워지는 순간마다 어르고 달래서, 그래도 같이 갈 수 있다고 토닥이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꼭 사랑하지 않더라도, 아니, 사랑이 온전히 내 마음에 들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몸을 긍정할 수 있지 않을까.

 

body talk 바디 포지티브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백정연

책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 저자, 사회적 기업 ‘소소한소통’ 대표. 장애인 가족과 함께 살고 장애인 동료와 함께 일하는 저자가 책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을 통해 장애인권의 중요성이나 장애 감수성의 필요성보다는 집과, 직장, 개인적 공간에서 장애인이 어떤 일상을 보내는지 세심히 풀어냈다. 99%에 가까운 장애인이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2020년 장애실태조사) 현실에서 그간 매체에서는 깊이 들여다보지 못한 장애인의 진짜 삶, 그들과 일상을 보내는 세세한 방법을 담았다.

 

“무례한 시선과 발언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지,
편견에서 출발한 것인지 확인한다.
무지라면 간단하다. 알려주면 된다.
당신의 시선과 발언은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문제는 편견이다. 편견,
특히 나와 다른 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쉬이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몸을 가진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고,
더 가까이하며 삶을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

 

책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장애를 가진 남편과 결혼 후 나 혼자 마주하는 사회와 남편과 함께하는 사회가 극명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장애인이 마주하는 차별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화와 억울한 마음이 복받쳐 많이 울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수에 속한다는 이유로 불편한 시선이나 차별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옳은 것인지 돌아보고, 사회를 새로운 생각과 마음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 생각, 그 마음을 <장애인과 함께 사는 법>에 담았다.

책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알게 되고, 보다 선명해진 생각이 있는가? 장애인의 삶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해도 책이라는 형물로 담으려니 생각보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리며 글로 풀어가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책을 집필하면서 나 또한 차별과 불편을 감내하고 그에 맞춰 사는 삶에 익숙해졌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익숙해진 나머지 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것을 모르는지,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내고 글로 정리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책을 완성하고 나니 사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에 대해 잘 모르고 무관심한 채 사는 사람들이 이 책을 만나길 기대한다.

글을 쓰며 주의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나는 장애인을 잘 안다, 나는 장애인 전문가다’라는 태도나 맥락이 책에 담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장애인’을 완벽하게 아는 전문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가진 장애는 그 사람의 일부분이기에 ‘장애’를 아는 것과 ‘장애인’을 아는 것은 다르다. 이와 동시에 최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책을 쓰는 일은 개인적인 일상을 세상으로 내보이는 일이고, 그 일상에는 남편의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포함되었다. 다행히 남편도 장애 이슈를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기 때문에 책에 남편의 화장실 이야기까지 쓸 수 있었다. 장애인의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비장애인 독자와 장애를 가진 사람의 거리를 더 좁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 사회가 몸을 인식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있나? 대학생 때 봉사 활동을 하며 장애인을 처음 만났다.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통해 멀리서 잠깐 보거나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같은 공간에 긴 시간 머물며 함께 보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 또래 사람들이 나와 완전히 다르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많이 놀랐다. 그 사람들을 마주했던 나의 모습과 당시 느낀 감정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진처럼 잔상으로 남아 있을 정도다. 그때 장애, 다른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유와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사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는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의 세부 진로를 장애인 복지로 정한 계기가 됐다.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몸과 관련한 무례한 시선과 발언을 무방비로 맞닥뜨려야 할 때도 많다. 이런 무례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무례한 시선과 발언이 무지에서 비롯된 것인지, 편견에서 출발한 것인지 확인한다. 무지라면 간단하다. 알려주면 된다. 당신의 시선과 발언은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문제는 편견이다. 편견, 특히 나와 다른 몸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은 쉬이 깨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몸을 가진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나고, 더 가까이하며 삶을 공유하며 살아야 한다.

몸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들은 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뭔가? 장애를 가진 사람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착하다,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내 책에도 썼다. ‘천사 같은 색시’. 장애에 대한 편견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이 말은 정말 듣고 싶지 않다. 마음이 불편한 동시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의 편견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깨뜨려야 할지 아득하게 느껴진다. 남편의 장애는 우리 부부의 결혼 생활에 그 어떤 형태의 불행이나 불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장애로 인한 불편은 사회가 장애를 고려하지 않는 환경과 태도를 보일 때 실감한다. 우리는 모두 타인이나 타인의 삶을 평가하기 전에 내가 가진 편견이 잘못된 평가로 이어지며 스스로를 선량한 차별주의자로 만들지는 않는지, 스스로를 검열해야 한다.

몸과 관련한 사회 이슈 중 최근 가장 관심 있게 보고 있는 사건이나 화두가 있다면 무엇인가? 장애인 이동권 문제다. 이동권은 기본권인데, 화두가 되는 것이 씁쓸하다. 장애인 이동권 운동을 보는 다수 비장애인의 태도에 실망했고, 한편으론 그런 다수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두렵다. 그런 비장애인들에게 “당신은 살면서, 당신이 바라는 곳에 원하는 방법으로 갈 수 없어 불편을 겪은 적이 있는가?” 하고 진지하게 묻고 싶다. 같은 목적지에 가더라도 남편과 함께 이동할 때는 내가 혼자 이동할 때보다 시간이 몇 배나 들고, 선택할 수 있는 교통수단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이런 삶이 장애를 가진 개인의 책임이고 몫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 삶을 살아보라 나눠 주고 싶다. 우리 사회가 종종 농담처럼 던지는 “집집마다 장애인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지 않고도 소수의 기본권이 모두의 기본권으로 편입되는, 성숙한 사회가 되면 좋겠다.

몸에 대한 인식은 미디어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미디어가 몸을 다루는 잘못된 여러 방식 중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미디어가 다루거나 미디어에 노출되는 몸이 다채롭거나 입체적이지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률적인 미의 기준으로 노출되는 몸이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인식될 수 있다. 가끔 미용실에 가면 패션지를 꼭 보는데 오래 보지 못하고 이내 덮는다. 몇 권을 펼쳐 봐도 모두 다른 패션지인데 같은 책으로 느껴질 정도로 비슷한 몸을 가진 사람이 등장한다. 미디어에 다양한 몸을 가진 사람이 등장할 수 있도록 미디어를 다루는 사람들의 생각이 변해야 한다.

몸을 극복의 대상으로, 질병이나 장애를 이겨야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몸의 극복’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애에 대한 편견이나 의학적 관점에서 비롯되었기에 ‘장애를 극복한다’는 표현은 오류다. 몸의 극복도 장애의 극복과 다르지 않다. 몸이 어떠해야 한다는 고정관점과 편견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떠한 상태로 극복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몸의 극복’이라는 말을 새롭게 바꾸기보다 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변화는 늘 더디고 그 과정은 지난하다. 다르고 다양한 몸들에 지금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더디고 그 과정이 지난한 변화는 우리를 지치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진다.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어떠한 형태로든 존재해왔고, 그들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조금은 강제적이고 힘 있는 변화의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그중 하나가 차별금지법이다.

 

body talk 바디 포지티브 몸이 말이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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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이다울

책 <몸이 말이 될 때> 공동 저자. 크론병과 섬유근육통증후군이라는 희귀 질환을 겪고 있는 1990년대생 작가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서간집 <몸이 말이 될 때>. 자신의 몸을 설명하고 다른 몸에 대해 듣는 과정이 편지라는 형식을 빌려 더 생생히 다가온다. 공통적으로 만성 질환을 겪는 두 작가의 생각과 경험이 비슷하고도 동시에 크게 다르다는 것을 목격하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더 날카롭고, 더 정교한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아주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몸의 언어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시적인 동병상련 대신 아름다운 문장들이 닿을 수 없는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내게 힘이 된 건 ‘임파워링’보다는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날것의 감각들이다.”

 

책 <몸이 말이 될 때>를 시작하며 두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 기대했는가? 안희제 일상의 많은 부분을 질병과 떼어놓을 수 없게 된 우리의 삶을 통해 질병이 그저 비극이 아니라 소소한 즐거움부터 좌절까지 모두 담고 있는 ‘삶’이라는 사실을 함께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 기대했다. 편지가 쌓일수록 처음 기획에서는 엇나갔지만, 기대는 충족되고도 남았다. 이다울 기획 단계에서는 서로가 합의한 ‘질병’이라는 키워드 내에서 질병권이나 장애학,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원고가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막상 첫 번째 편지를 쓰다 보니 이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어떤 당위를 위해 정해진 길로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다. 그 때문인지 둘 다 조금씩 목차에서 벗어났고 그 덕에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글을 쓰며 주의한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 반면에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는 것을 경계하고, 자기 검열하지 않으려고 한 부분도 있나? 이다울 추천사를 써주신 정희진 님의 문장대로 통증에 대해 쓰는 것은 ‘호소와 억울함’을 동반한다. 나의 글이 그 두 가지만을 표현하게 될까 두려웠다. 동시에 아픈 몸에 관한 이야기는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질병이야말로 너무나 만연한 것이기에, 흥미로운 주제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앞으로는 통증을 좀 더 세세히 관찰해 그에 부치는 송가를 써보고 싶다. 안희제 무해한 문장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어떤 때는 우리의 고통이나 좌절, 행복을 표현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주의한 건 ‘안전한 글쓰기’였던 것 같다. 질병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때로 자신을 일면 해치더라도 얻어야만 하는 어떤 인간다움이나 해방과 관련되는 듯하다. 자신의 삶을 질병을 중심으로 들여다보는 일은 자주 힘들고 지친다. 나 이외의 아픈 사람들이 겪는 경험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어떻게 ‘질병’이란 것에 대해 이렇게까지 쓸 수 있나 걱정될 때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생기는 연결들이 분명 있다. 안전한 말들로 공감이나 이해를 유도하기보다 솔직한 말들로 더 많은 사람, 더 많은 이야기와 만나고 싶었다.

우리 사회가 몸을 인식하는 방식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나? 이다울 만성 통증 질환의 출현이다. 계속 아프니 병원에 자주 가게 되었고, 병원에서 마주하는 일들을 우리 사회가 몸을 인식하는 태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지하철역 입구의 거대한 문을 잘 열지 못하거나, 노약자석에 앉은 뒤 주위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릴 때마다 건강 약자의 삶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적으로 학습된 몸에 대한 생각 중 가장 떨치고 싶었던, 마지막까지도 떨치기 어렵던 고정관념과 틀린 생각이 있는가? 안희제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무섭다. 우스갯소리인데 누군가 내게 그러더라.’약하고 느린 삶을 어떤 환자보다도 강하고 빠르게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비효율을 못 견디는 편이라 ‘내 몸은 항상 무엇인가를 생산해야 한다, 무언가를 읽거나 쓰거나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이런 생산성에 대한 강박은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더 강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취업해서 ‘1인분’의 역할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떠오를 때면 더욱 그렇다. 생산성이 경제활동 여부와 그 정도로 정의되는 ‘정상적인’ 생애 주기와 관련되다 보니, ‘20대 후반 남성’이 갖추어야 할 생산적인 몸을 자꾸 생각하게 된다고 할까.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나의 몸이 아니라, 사회가 특정한 연령대와 성별에 요구하는 몸을 기준으로 삼는 사고방식을 가장 떨쳐내고 싶다.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몸과 관련한 무례한 시선과 발언을 무방비로 맞닥뜨려야 할 때도 많다. 이런 무례에 어떻게 대처하는가? 안희제 세상에 화낼 일이 많다 보니, 화를 좀 줄이며 대처할 방법을 고민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무례한 시선이나 발언을 마주했을 때, 그걸 연구 대상처럼 여긴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 화가 아니라 호기심이 생긴다. ‘왜 저런 형태의 말들이 반복될까? 저 사람의 표정과 말투가 나에게 전달하는 건 사회의 어떤 모습일까? 이를 어떻게 나에게 유용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을까?’ 등을 생각하다 보면 스트레스도 덜 받고, 때로는 재밌기도 하더라.
몸과 관련해 가장 많이 들은 말,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다울 ‘젊은 사람’으로 시작하는 말들은 대체로 불길하다.

최근 몸과 관련한 사회 이슈 중 가장 관심 있게 보는 사건이나 화두가 있다면 무엇인가? 이다울 이번 책에서도 이야기 나눈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에 인공 보철 등을 이용해 장애를 패션화한 패럴림픽 육상 선수 에이미 멀린스(Amiee Mullins)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아프거나 장애가 있는 것을 최대한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누군가는 반대로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며 패션화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나 역시 <마리끌레르>에서 등의 부항 자국을 드러내며 화보 촬영을 한 적이 있다. 아름다운 결과물에 즐거웠다. 그에 더해 이 작업 또한 질병을 패션화한 예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안희제 정치인이나 그 가족의 몸에 관한 문제에 관심이 많다. 모 국회의원의 아들이 군대에서 질병을 사유로 휴가와 외출을 과도하게 많이 나갔다는 기사들을 볼 때, 장애인을 대하는 특정 정치인의 권위적인 태도를 볼때 특히 그렇다. 사회의 권력층이 질병을 배제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을 때는 저렇게 가져다 써먹는다는 사실이 괘씸하고. 이런 이슈들이 질병에 대한 사회적 배제를 더욱 공고히 한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질병을 횡령하는 사회와 몸을 의심하는 사회가 적대적 공생 관계에 있다고 느낀다. 결국 그 사이에서 수많은 아픈 몸들은 더욱 움츠러들지 않나.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한다. 몸에 대해 해명하지 않으면서 잘못을 인정하는 방법, 몸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사건을 파헤치는 방법에 대해. 의심과 해명을 좀 더 건조한 질문과 설명으로 대체하려면 우리에게는 어떤 인식론과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한 걸까? 이 지점을 많은 사람들과 같이 고민하고 싶다.

몸을 극복의 대상으로, 질병이나 장애를 이겨야 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몸의 극복’이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안희제 몸의 극복! 그건 과연 어떻게 하는 걸까? 아픈 사람들이 아니라 건강한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과연 몸을 극복하고 있는가?’ 몸의 극복은 몸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다양한 종류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요구를 충족하는 일일 텐데, 그러다 보면 사람이 단명한다. 극복은 언제나 몸을 사회에 맞추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애초에 기준을 각자의 몸에 두면 ‘극복’에 대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은 각자의 몸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사회와 우리가 협력해 성실하게 재생산하고 있는 건강 중심 주의다. 자신의 몸을 거스르며 살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몸에 대한 존중을 우선시하며 살았으면 한다.
여성의 삶에 ‘보디 포지티브’라는 말이 유행처럼 자리 잡았다. ‘몸의 긍정’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되찾아오고 싶은가? 이다울 어떤 현상이 유행한다고 해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는 보디 포지티브 유행의 덕을 봤다. 많은 여성이 그 구호 덕에 편해지지 않았을까? 정서적인 측면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다양한 체형에 맞는 편안한 속옷이 시장에 많아지는 게 참 반가웠다. 하지만 가끔은 ‘있는 그대로의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내가 수행하고자 하는 역할이 다양해서 그런 것 같다. 내가 겪고 있는 질병은 누군가의 인정과 긍정이 필요하다. ‘매일 아파도 괜찮다’는 식의 마케팅 언어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다만 고통을 신이 주신 선물 등으로 여기는 식의 긍정은 곤란하다. 도인이나 초인이 아니라면 어려울 테니 말이다.

변화는 늘 더디고 그 과정은 지난하다. 다르고 다양한 몸들에 지금 무엇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안희제 더 날카롭고, 더 정교한 이야기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아주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몸의 언어가 더욱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시적인 동병상련 대신 아름다운 문장들이 닿을 수 없는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내게 힘이 된 건 ‘임파워링’보다는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날것의 감각들이다. 질병에 대한 이야기조차 예쁘게 정돈해 내놓기를 요구하는 사회에서, 아직 누구도 제대로 답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과 감각을 부정하지 않고 직시하는 일. 사회에, 그리고 다르고 다양한 몸을 가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런 실천이라고 믿는다. 자긍심이 아니라 수치심이 바꾸고 만들어갈 사회를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