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고 전통음악 Short film 황진아

거문고를 활용해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음악을 만든다. 전통 주법과 이를 색다르게 변형한 연주를 시도하고, 전자음악 요소를 도입하며 세상에 없던 거문고의 소리들을 담아낸 곡들을 들려주고 있다. 2019년에 첫 음반 <The Middle>을 공개했고, 올해 초에는 단편영화 모음집을 떠올리며 준비한 2집 <short film>을 선보였다.

황진아의 음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문고를 언제 처음 만났나? 초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사물놀이, 판소리, 한국무용을 배운 적이 있는데 당시 무대에 서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이를 계기로 국악중학교에 입학해 거문고와 인연을 맺었다. 거문고를 연주할 때 내 몸까지 전해지는 저음의 진동이 참 멋있더라.

당시에 배운 거문고가 창작자로 살아가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예상했나? 예상은 못 했지만 음악을 진지하게 배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부터 줄곧 꿈꿔온 일은 맞다. 어린 시절부터 내 삶 속에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직접 만들고 싶었다. 내가 익힌 악기들을 활용해 나만의 것을 창작하는 데 큰 재미를 느꼈다.

활동하면서 느낀 거문고의 장점이 있다면? 거문고는 연주하기 나름이다. 3옥타브에 이르는 음역대의 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웅장한 저음과 신경질적이거나 여린 고음을 모두 낼 수 있어 양면적인 매력이 있다. 술대로 치거나, 다른 악기의 활로 켜거나, 손으로 뜯는 등 연주에 사용하는 도구나 방식에 따라 색다른 소리를 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2집의 타이틀곡 ‘Short film’은 인위적으로 배음을 얻는 주법인 ‘하모닉스’로 멜로디를 연주한다.

2년 전부터 이 음반을 준비하면서 미디를 배웠다고 들었다. 원래 연주할 때 루프 스테이션을 자주 사용했다. 일정 구간을 녹음해 반복 재생하면서 그 위에 다른 소리들을 쌓아 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녹음되는 모든 소리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었고, 동일한 주파수 대역에 소리들이 뭉쳐 잘 들리지 않는 현상이 계속 생겼다. 보다 안정적인 음악을 들려주고 싶어 음향 공부와 함께 미디를 익히기 시작했다.

다양한 주법과 음악적 지식을 활용한 덕분에 풍요로운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새로운 소리를 발견하는 게 <Short film>의 목표 중 하나였다. 전자음악의 이펙트를 더해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를테면 잔향을 이용하는 리버브와 음들을 반대로 재생하는 리버스를 여러 번 반복했고, 음을 작은 단위로 나눠 재배치하는 그래뉼러를 활용했다. 음반을 듣다 보면 ‘이게 거문고 소리가 맞나?’ 싶은 음들이 있을 텐데, 대부분 내가 거문고로 만들어낸 것이다.

거문고 소리가 이토록 다양하다는 게 참 신기하다. 그런 소감을 들으면 짜릿하다.(웃음)

관객의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어떤 말인가? 1집 공개 이후에 열었던 첫 번째 단독 콘서트를 마친 뒤 SNS에서 후기들을 찾아봤다. 그중 “음악을 들으면서 나만 아는 어떤 장면이 펼쳐졌다”라는 말들이 마음에 와닿았다. 음악이 각자의 경험에 기반한 상상을 만들어내는 게 흥미롭더라. 듣는 사람이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기를 바라는 게 지금 내 음악의 큰 지표다. 이를 생각하며 만든 음반이 2집이다. 라이너 노트에 곡 소개를 자세하게 남기지 않은 것도 듣는 이마다 자신만의 상상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평소 곡 작업을 할 때도 소리를 시작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 어떤 장면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면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느낀다.

 

 

거문고 전통음악 Short film 황진아

2집에 담은 7곡 중 가장 구체적인 장면이 떠오른 곡은 무엇인가? ‘고독’이다. 다른 곡은 저마다 화려한 매력을 드러낸다면, ‘고독’은 거문고 특유의 소리에 집중했다. 전반적인 수정을 여러 번 거치며 갖가지 소리들을 넣었다가 결국 첫 번째 버전만을 남겼고, 믹스를 할 때도 내 숨소리가 크게 들리게끔 하는 식으로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살렸다. 이 곡을 들으면 나이가 아주 많은 이의 조용한 고독이 연상된다. 주름진 눈가와 탁한 눈빛을 지닌 노인이 노을 지는 벤치에 앉아 있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신나게 즐길 수 있는 ‘휘몰이’도 흥미롭다. 수록곡 중 거문고를 활용한 음악임을 알아차리기 제일 어려운 곡이 아닐까 싶다. IDM(Intelligent Dance Music) 장르의 전자음악이지만 출발점은 역시 거문고였다. 거문고 소리들을 넣고, 장구로 칠 법한 휘모리장단을 기반으로 드럼 사운드를 만들고, 여러 신스 사운드들을 더했다.

과감한 음악적 시도를 해나가는 와중에 놓치지 않으려는 전통음악의 특성이 있나? 없다. 오히려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전통을 지키겠다고 마음먹기보다는 영역을 구분 짓지 않고 작업했을 때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전통음악의 요소들이 있고, 난 그것들과 잘 어울리는 일들을 하려 한다.

한 인터뷰에서 ‘전통의 상태에 있는 음악’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인상 깊었다. 국악은 특정한 시대와 그때의 사람들만 즐기는 음악이 아니다. 종묘제례악, 판소리, 가곡도 모두 국악이지 않나. 그런데 전통음악을 배운 뮤지션들이 현대에 새롭게 선보이는 음악만 시대의 흐름으로부터 단절된 ‘창작 국악’이라 칭하고, 일제강점기 이전에 향유하던 우리 음악은 지켜가야 하는 당위로 여긴다. 내가 과거의 전통만을 연주하기보다는 ‘전통의 상태’에 있는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점을 더 많은 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현대적인 국악이란 무엇일까? 오늘날의 삶과 닮은 국악. 음악은 인간 가까이에 있다. 옛 음악들을 살펴보면 낮에 농사를 지으면서 듣거나 고요한 밤에 부르기 좋은 곡이 많다. 하지만 오늘날의 환경은 그때와 다르다. 그런데 이를 반영하지 않은 국악 공연들이 여전히 열리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와 같은 상황을 강요하는, 박물관을 떠올리게 하는 무대가 제일 싫다. 현대의 관객을 끌어오려는 노력이 담긴 국악 공연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거문고로 창작을 하기에 생긴 걱정도 있을 거라 짐작한다. 거문고로 음악을 만들 때 외면할 수 없는 무거움이 있다.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거문고가 아닌 음악을 할 수는 없다. 가끔 거문고 본연의 소리를 잃어버릴 때가 있는데, 의도가 있을 경우에는 괜찮지만 새로운 소리에 지나치게 심취한다면 근원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 균형점을 굉장히 세밀하게 신경 쓰며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거문고 연주자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내가 대변하게 되는 일들이 있고, 그래서 자부심과 책임감을 모두 느낀다. 거문고의 정체성을 최대한 가지고 가는 동시에 대중적일 수 있는 음악에 대해 많이 고민한다. 내 대중성의 범위는 K-팝을 주로 소개하는 음악 방송은 아니더라도 <유희열의 스케치북>에는 출연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일상적으로 듣기에는 적합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음악을 접하려 하는 대중에게는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은 어떤 음악이라고 생각하나? 공감의 영역에 있는 음악. 발라드가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이유는 내 이야기 같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내 음악도 공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뮤지션, 대중, 그 사이에 놓인 미디어 모두 다양한 음악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음악을 시작했던 초반과 지금, 무대에 오를 때 같은 마음이 드나? 무대에 서는 건 여전히 재미있다. 6월 말에 판소리 소리꾼 김보림, 드러머 서수진과 결성한 팀 ‘밤 새’의 정규 음반을 발매하는데 7월 중 이들과 함께 공연을 연다. 초겨울쯤엔 미디어 아트와 실감 음향이 어우러진 단독 콘서트를 열 계획이고, 2023년엔 미국 투어가 예정되어 있다.

바쁘게 활동을 이어가는 이유는 그로부터 얻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인가? 사실 잠깐 즐겁고 오래 힘들다.(웃음) 어쩌면 출산과 비슷한 일이 아닐까? 긴 시간 동안 앓으면서 만들고, 완성한 후에도 아픔이 있지만 한 곡 한 곡 애정이 간다. 그동안 만든 곡들을 직접 들어봤을 때 ‘이게 황진아의 음악이다’라는 느낌이 들면 참 뿌듯하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완성한 결과물을 좋아해주는 이들을 생각하며, 내 음악에 대한 자신감과 사랑을 품고 부단히 창작해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