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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주한 미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여성의 시신 사진을 마주한 날의 충격과 고통, 이로 인한 부채감. 20년 넘게 영화를 만들면서 이 사건을, 그때의 마음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김진아 감독. 선정적으로 보지 않도록, 피해자의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고 싶었다는 그는 비로소 가상현실(VR)이라는 새 방식을 찾았다. 정형화된 피해자가 아니라 한 인간이 감내했을 외로움과 고통에 다가가기 위해 김진아 감독은 먼 길을 돌아 미군 위안부 3부작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군 위안부 3부작인 VR 작품 중 두 편인 <동두천>과 <소요산>이 공개되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이미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상영하고, 작품상을 수상하며 유의미한 족적을 남기는 중이지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특별전이 열리는 건 의미가 또 다를 것 같습니다.

그럼요, 각별하죠. 1999년에 대학원 졸업 작품으로 만든 단편영화 <빈집>을 처음 상영한 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였어요. 이후에 <그 집 앞>이라는 첫 장편영화로 상도 탔고, <동두천>도 여기서 처음 상영했어요. 제 개인적인 사연을 차치하더라도 이번 특별전은 유의미해요. 이건 한국 여성에 대한 이야기니까요. 미군을 상대로 한 성 노동은 지금도 존재하고, 불과 20여 년 전까지 한국 여성들이 그 일을 했어요.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국의 젊은 여성들과 나눠볼 자리가 생긴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죠. 감사한 일이고요.

 

영화 상영 외에도 여러 프로그램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온몸으로 감각하기 위한 방식으로요.

우선 <동두천>과 <소요산>을 상영할 예정이에요. VR 작품이니 일반 상영관이 아닌 다른 공간에서 진행할 거예요. 또 영화제에 직접 오지 않더라도 작품에서 그려진 공간을 증강현실(AR)과 확장 현실(XR) 버전으로 탐험할 수 있는 앱을 개발했어요. 스페셜 토크도 있어요. 두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와 젠더 폭력의 재현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가능하게 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싶어요.

 

3부작은 ‘미군 위안부’라는 한 가지 주제로 연결됩니다. 시리즈의 시작점은 <동두천>의 이야기인 윤금이 피살 사건(동두천 기지촌에서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윤금이 씨가 주한 미군 소속 이병에게 살해당한 사건)이죠?

맞습니다. 그 사건이 1992년에 일어났는데, 저는 그때 대학교 1학년이었어요. 전국적으로 굉장히 크게 퍼진 시위에 저 역시 참가했었고요. 그 덕분에 모종의 성과를 거두었죠. 기지촌에서 일어난 범죄의 가해자를 한국 법정에 세웠거든요. 그럼에도 저를 포함한 또래 여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한 건, 피해자의 시신 사진이 공개된 일이에요. 그에 대한 부채감이 엄청났죠. 대의를 위해 한 여성 피해자가 다시 한번 희생당하는 상황이 용납되지 않았고, 언젠간 이 이야기를 윤리적인 방식으로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때를 기다린 건가요? 1992년에 품은 이야기를 이 시점에서 꺼낸 이유가 뭔가요?

기다렸다가 어느 날 꺼내게 된 건 아니고, 계속 방식을 고민한 거죠. 폭력을 이야기 한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될 수 있으니까요. 사실 시도는 여러 번 했어요. 극영화 감독이 되면서 자연스레 이 이야기를 극영화로 만들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가지고 제작사들과 접촉도 했는데, 상업 영화의 관습 안에서 일어나는 또 다른 젠더 폭력을 넘어설 수 없더라고요. 수사하는 남성 형사와 남성 피의자가 주인공이고, 여성은 피해자로만 박제되는 현실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답을 찾을 수 없어 시도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한 거죠. 그러다 2016년에 VR을 처음 접했고, 이 매체로는 이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역설적인 말인데 그 가능성을 본 거죠.

 

그런 이유에서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메인 코드를 ‘몸의 부재’로 잡은 건가요? 몸을 보여주지 않고 젠더 폭력을 언급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요.

이 영화의 시작이 시신 사진 유포의 부당함과 이를 보며 느낀 부채감이기 때문에 피해자의 이미지를 착취하거나 사건을 선정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런 이유로 제작 과정에서 세운 원칙이나 규율도 있었나요?

<동두천> 제작 당시에 윤금이 씨가 살던 방을 재현하고 싶어서 찾아갔는데, 놀랍게도 그 건물이 아직 있더라고요. 당연히 사건의 흔적은 없었지만, 실재하는 장소를 담아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당시 거주하는 분들이 자신들의 거주지가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작품의 촬영장으로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어요. 그 의사를 존중해 포기 했고요. 이렇듯 저뿐 아니라 참여한 이들이 다 같이 어떤 게 윤리적인 선택일지 매번 고민을 거듭했어요. <소요산>도 마찬가지예요. <소요산>은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성병에 감염되었다고 추정되는 위안부 여성들을 고립시키고 치료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설립한 감옥인 ‘낙검자 수용소’ 안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이야기인데, 이를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민한 부분이 건물의 재현이었어요. 이 건물 역시 지금도 존재하는데, 훼손 정도가 심한 게 문제였어요. 노숙자가 생활한 흔적, 유튜버가 촬영한 후 버리고 간 쓰레기, 그 외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폐기물이 가득했는데, 이걸 치우는 게 옳은 일인가 싶더라고요. 결국 세운 원칙이 ‘본래 이 건물의 일부였던 것은 유리 조각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나중에 이곳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이 가지고 들어온 것만 치우기로 한 건데, 그게 말이 쉽지 너무 어렵더라고요. 깨진 타일 하나 치우지 않았거든요. 모두 잘 이해해줘서 가능한 일이었어요.

 

작품의 완성도만큼이나 만드는 과정에서 윤리적 기준을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애는 많이 썼어요.(웃음) 따지고 들면 끝이 없죠. 이런 영화를 만드는 것 자체의 정당성을 따질 수도 있을 거고요. 다만 최선을 다해 노력한 건 사실이에요.

 

이야기 구성에서 꼭 표현하고자 한 건 어떤 부분인가요?

<동두천>은 윤금이 씨가 살아 있던 마지막 순간, 그 몇 분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어요. 홀로 죽어가면서 느꼈을, 결국은 외로움이겠죠, 그 마음을 따라가도록 시간과 공간을 구성했어요. 반대로 <소요산>은 한 명이 아닌 수용소에 갇힌 모든 이들이 겪었을 감정을 잘 표현하고 싶었어요. 처음 수용소에 갔을 때 눈에 띈 게 벽에 쓰인 일과표였어요. 7시 기상, 8시 조식, 10시 치료 등. 이 일과표에 따르며 감내해야 했던 매일의 고통을 살피고자 한 거죠.

 

 

VR은 극영화를 만들 때와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을 텐데요. 작업하면서 새롭게 배운 지점도 있었겠죠?

엄청 많았죠. 오래전부터 VR을 접하고 실험해온 케이스가 아니라, 오로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공부한 터라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어요. 몰라서 재미있는 일도 많았죠. 로케이션 헌팅을 가서 마음에 드는 부분을 찍은 후에 제가 ‘이제 뒤쪽도 한 번 더 찍죠’라고 하면, ‘감독님, 방금 찍으셨는데요’ 하는 거예요. 카메라가 360도로 찍으니까요.(웃음) 그제야 ‘아, 맞다 그렇지’ 하고. 이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했어요. 장면을 구성하는 방식도 완전히 달랐어요. 일반 영화라면 넓은 구도로 찍고 클로즈업도 찍은 후에 편집하면 되는데, VR 작품에선 관객이 이 부분을 어떻게 보게 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하거든요.

 

완전히 달리 감각해야 하는 작업이었겠어요.

맞아요. 그런 부분이 힘들어서 영화감독들이 시도하다가 많이들 도망가는데, 다행히 저는 처음에는 어지러워하다가 금방 적응했어요. 대학교 때 연극 연출을 많이 했거든요. 실험극 중에 텅 빈 공간에 관객이 가운데에 모여 있고,
배우들은 어디선가 툭툭 나와서 자기 할 말을 하고 들어 가는 형태가 있는데, 그거랑 비슷한 거라고 이해하니 좀 쉽게 느껴지더라고요.

 

한 인터뷰에서 VR 매체의 미학적 기조가 관음이 아닌 체험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그렇지만 이는 윤리적 기준이 높은 연출자이기에 가능한 관점이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는 VR을 관음적 체험의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니까요.

사실 매체라는 건 그냥 중립적인 거죠. 그 자체에 옳고 그른 건 없어요. 처음에 VR이라는 매체가 나왔을 때 굉장히 많은 사람이 우려했어요. 매번 새로운 매체가 나오면 포르노 폭력 쪽으로 가니까요. 실제로 초기에는 약간 폭력적인 VR도 많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이해한 매체 특성상 관음이 쉽진 않아요. VR 기기를 쓰는 순간 몸이 없어지잖아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굉장히 상처 입기 쉬운 상태가 된 상황에서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는 방식인데요. 그 상태에서 어떤 가해를 하거나 관음적으로 무언가를 바라보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에요. 가상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권력관계는 사라지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까지 영상 매체에서 잘 구현해내지 못했던,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약자들을 대변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던 거죠.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하며 이미 꽤 많은 반응을 접했을 텐데요. 인종과 성별에 따라 반응이 상이하다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도표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반응이 인종별, 국가별로 나뉘더라고요. 계급화는 그다지 안 된 것 같고요. 한국 여성이 제일 무서워하고, 하나도 무서워하지 않는 건 백인 남성이었어요. 반응이 워낙 극명하게 갈리니까 이건 그냥 젠더 폭력이 아니라 후기 식민주의나 자본주의 세상의 모순으로 일어난 폭력이고, 이를 대하는 태도가 잠재의식 안에 뿌리 박혀 있다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이 들었어요.

 

부채감으로 시작된 이 작품이 마지막 이야기를 앞두고 있습니다. 긴 시간 짊어졌던 마음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졌나요?

부채감이 덜어지진 않은 것 같아요. 연구를 하면 할수록 어떻게 이렇게까지 닫혀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지거든요. 단순히 피의자의 잘못이다, 혹은 미군의 문제다 하며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면 조금 더 공론화됐을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거든요. 한국 사회의 잘못도 있어요. 심지어 당시 군부독재 치하에선 성매매를 장려하는 정책도 있었으니까요. 게다가 미군 기지촌 여성은 우리가 가졌던 관념이나 신념을 뒤흔드는 존재인 것 같아요. 성적 서비스의 정의도, 이것이 성매매냐 성 노동이냐 성 노예제냐 따져야 하는 너무나 불편한 논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꺼려지는 거고요. 무엇보다 아직도 기지촌이 존재하기에 이런 얘기를 꺼내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에요.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블랙 수트 셋업 준지(Juun.J), 슈즈 스튜어트 와이츠먼(Stuart Weitzman), 안에 입은 크롭트 톱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1990년대 후반부터 극영화, 다큐멘터리, VR 등 다양한 매체를 오가며 쌓은 필모그래피를 살피며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그때마다 불의에 저항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점이죠.

돌이켜보니 시각적 이미지를 가지고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재현의 문제에 천착해온 것 같아요. 초기 작품에선 영상이라는 매체 안에서 여성의 몸이 재현되는 방식에 저항감을 가져서 스스로 내 몸을 실험 도구로 삼아가면서 퍼포먼스 비디오아트를 했고, 그게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예요. <그 집 앞>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만들어진 전형적 여성상에 대한 반발로 여성의 욕망을 보여주고자 했고, 좀 더 국지적으로 나아가 서구가 본 동양 남성의 재현에 대한 저항으로 만든 영화가 <두번째 사랑>이에요. 궁극적으로 말하면 그런 거겠죠. 전통적 영화 제작 방식에선 어쨌든 찍는 사람은 권력자란 말이에요. 피사체가 되는 이는 목소리가 없고, 돈이 없는, 사회적 약자, 대부분 여성이고요. 그게 미술사까지 합친다면 수천 년간 지속된 컨벤션인데 이에 대한 불만을 동력으로 삼아 작업을 이어간 것 같아요. 그때그때 처한 환경에 따라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라 생각한 걸 저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전복하고 싶었던 것이
작업물로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억압과 폭력, 불의에 저항하는 태도는 타고난 성향일까요?

왜 그럴까요? 물론 본래 가지고 있는 성향이기도 하고, 또 학생운동이 빈번히 일어나는 시절을 겪으면서 어릴 때부터 부당한 권력에 맞서야 한다는 의식화가 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어릴 때는 그야말로 매일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세상에는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을까, 왜 이런 불합리한 일들이 일어날까? 그런데 나는 멀쩡하게 밥 먹고 학교 다니고. 이런 상황에 죄책감이 들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가 죄책감을 가진다는 것은 네가 양심이 있다는 것이니 바람직한 거고, 또 이런 혜택을 받는 데 정당성이 부여되는 유일한 순간은 그 특혜를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울 때 생기는 거라 말씀해주셨어요. 대학교에서 만난 선배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고요. 그러니까 저의 이런 저항감과 이에 따른 행동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대한 세금을 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세월이 흘러 지금은 아버지와 그때의 선배들처럼 고민하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면서 동시에 영화과 교수로 재직 중이죠.

그때 배운 것들을 조금 더 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제가 가르치는 수업은 사회변혁을 위한 미디어(Media for social change)같은 것을 많이 다뤄요. 지난 학기에는 동양인 혐오 범죄를 증강현실로 시각화하는 수업을 하기도 했고요. 이 과정에서 결국 아버지가 해주셨던 것과 같은 말을 하게 돼요. 여기에 저의 모토를 꼭 덧붙이죠. 쓸데없이 오만하게 굴지 않는 것이요. 내가 대단한 일을 한다는 황당한 착각을 할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 좋은 일을 하는 건 나만이 아니고, 내가 하는 방식만이 옳은 건 아니라는 생각을 놓치지 말아야 해요. 궁극적으로는 겸허한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저 역시 그러려고 노력하고요.

 

이 사회의 숱한 불의와 폭력이 모두 사라진다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요?

그런 유토피아가 온다면요? 이건 저의 욕망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데, 그래도 영화는 만들 것 같은데요. 그러면 진짜 제가 좋아하는 행복한 것들이 나오지 않을까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게 텃밭을 가꾸는 일인데. 자연을 관찰하는 과정을 찍어볼 것 같아요. 무지개에 대한 영화, 새가 낳은 알이 부화해 나온 새끼가 커서 날아가는 과정을 좇는 다큐멘터리, 흙과 지렁이를 찍은 VR. 생각만 해도 좋네요.

방금 텃밭 얘기 할 때 무척 행복해 보였어요.

하하. 티가 났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