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형

2017년 EP <곡예>로 데뷔했고 2020년 첫 정규 앨범 <사치>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깊고 너른 사유가 담긴 가사를 내뱉는다. 여러 장르를 넘나드는 편곡과 예측불허의 댄스까지. ‘포크뮤지션’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무경계 싱어송라이터.

 

one second (with 김수영)

모든 시간 속에서
이렇게 마주본다면
바라는 일도 보채는 일도
하나도 없을 텐데
모든 시간들에게
널 뺏기지 않는다면
그럼 그리워하는 일도
더 이상은 없을 텐데

 

시간은 자주 모래와 비견돼왔다. 잡을 수 없는 성질이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동진에 가끔 가는데, 그때마다 모래를 한 움큼씩 쥐어본다. 곱디고운 모래는 금세 손아귀를 빠져나가 바닷바람을 타고 다른 모래 곁으로 간다. 실패할 줄 알면서도 한 번쯤 모래를 잡아보겠다는 열망은 쉬 꺾이지 않는다.

모래와 시간의 유사성을 일찌감치 알아차린 사람들은 모래시계라는 위대한 물건을 발명한다. 잡을 수는 없으니, 모래와 시간을 모두 작은 유리병 속에 가둬버리려고 한 것일까. 모래는 이런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작은 터널을 스리슬쩍 빠져나가 이내 사람들에게 초조감을 안긴다. 조금씩 줄어드는 모래와 시간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허무하고 애처로운 일이다. 속절없이 쌓여가는 모래 앞에서 흔들림 없이 강인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one second(with 김수영)’를 만들 때 멈춰버린 모래시계를 생각했다. 여기서 ‘고장 난’이 아니라 ‘멈춰버린’이라고 표현하는 건 적어도 내게는 중요했다. 쓰러져 있거나 뒤틀려 있는 것이 아니라 꼿꼿이 선 채로 멈춰버린 시간을 선언하는 모래시계의 고혹적인 모습을 음악 속에서 시종일관 드러내고자 했다. 재미난 사실은 음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발생하고 또 감상할 수 있는 장르이기 때문에, 지속해서 멈춰버린 시간을 이야기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일정량의 어색함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본격적으로 어색할 수 있었던 건 노래에 등장하는 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각자의 시간을 각자가 있는 곳에서 따로 보냈다면 딱히 시간을 멈출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면서 비롯되는데, 각자의 시간이 우리라는 이름 앞에서 마구 뒤엉키면서 둘은 동시에 더 이상 자연의 순리대로 시간을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긴 것이다.

두 사람은 그렇다고 악다구니를 쓰지 않는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억지가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서로를 보다 각별히 생각하는 것으로 자연의 법칙을 가뿐히 위배한다. 지금 앞에 놓여 있는 타인의 세계를 깊고 넓게 헤아리고, 작은 숨소리까지 경청하는 일은 그토록 완고했던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행위다. 자신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서로를 기꺼이 초대해 한데 어우러져 뛰어노는 일은, 내가 알고 있는 한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럼 두 사람의 모래시계가 멈춘 시간은 언제일까? 바로 지금인 현재뿐이다. 그리움이 일렁이는 과거와 약속이 도래하는 미래는 그들에게 심정적으로 멀게만 느껴지는 곳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관심 밖의 시간이다. 음악에서 시간을 주제로 이야기할 때는 과거와 미래가 그 대상인 경우가 많았다. 음악을 만드는 입장에서 아마도 음악이 품고 있는 낭만성이 현재보다는 과거 혹은 미래와 더욱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다. 나 역시 다채로운 음악을 통해 머나먼 시간 여행을 다녀온 여행객 중 한 명이니 말이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과거와 미래를 누비는 일은 음악이 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일 중 하나다. 아직 타임머신이 현실에 등장하지 않은 까닭은 과학과 기술이 그만큼 발전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여전히 음악이 그 자리를 쉽게 내어주지 않기 때문이지 않을까. 음악이 내뿜는 오색찬란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현재를 잊고 살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는 음악의 자리에 위치하지 못한 채, 위로의 대상으로만 남아야 하는 것일까. ‘one second(with 김수영)’에 등장하는 두 사람처럼 다분히 현재적인 사람들을 위해 현재를 담은 음악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이 시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 현재에 미련이 많은 사람들, 미련을 사랑이라 말해도 손색없을 사람들, 이들에게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보자는 제안은 적절하지도 않거니와, 그저 공허한 소음으로만 들릴 것이다. 이제 음악의 자리에서 현재를 나누게 된 두 사람은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두 사람에게 시간의 단위는 조금 더 촘촘하고 미세해질 필요가 있다. 만일 노래 제목이 ‘one hour’이거나 ‘one minute’이었다면 그들이 보내는 시간의 떨림을 오롯이 대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1초는 그 만남을 포착할 수 있는 최소 단위다. 꿀벌은 1초에 2백 번에 가까운 날갯짓을 한다고 한다. 두 사람의 감정이 그 이상으로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은 당사자인 두 사람도, 이를 엿듣는 우리도 모두 알고 있다. 설령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 순간에도 한 사람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음을, 서로가 있는 쪽으로 몸이 조금씩 기울고 있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