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지난가을 포토그래퍼 조선희가 보내온 한 장의 사진이었다. 물질을 끝내고 막 땅에 당도한 듯한 해녀의 얼굴에는 깊이 팬 주름 속 두 눈만이 날카로이, 형형히 빛났다. 제 숨과 힘만으로 삶을 일궈낸 이의 강건함과 위엄이 그대로 전해지던 순간, 생의 뜨거운 한순간을 살아낸 여든의 강인한 여성들을 보았다.
“여자 혼자 힘으로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이 해녀들밖에 더 있나. 여자 혼자 살아나가기가 그때 그 시절에는 진짜 힘들었져. 4남매 다 키우고, 결혼까지 시켜서 지금 손손자까지 스물두 명이야. 나랑 바다가 다 한 거라.” _김옥자 해녀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 단독으로 하는 생계형 어업’. 지난해 11월, 유엔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에 ‘제주 해녀어업’을 등재했다. 수렵과 사냥의 시대부터 오래도록 남성의 서사로만 여겨졌던 노동 역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제값이 치러지지 않았던, 지워지고 잊힌 여성 노동 역사의 빈칸과 행간을 채우는 의미 있는 첫발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여성 잠수 전문가들, 해녀. 아무런 장비도 없이 오직 테왁(부표)과 비창(해산물 채취 도구)만을 든 채 바다에 뛰어든 이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제주도의 경제를 지탱했다. 제주 가모장의 뿌리에는 온전히 자신의 노동으로 생을 꾸려내고 일가를 이룬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존재,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여성 자립 공동체, 해녀가 있다.
처음 해녀의 집을 찾은 날은 1월 중순이었다. 서울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음에도 신양섭지해변에서는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왔다. 붉은색 누비 조끼를 입은 이곳의 대상군(해녀는 물질 경험과 숨의 길이, 잠수의 깊이 등 기량에 따라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뉜다. 그중 탁월한 기량과 풍부한 경험, 지혜와 덕성을 갖춘 해녀를 대상군이라 부른다.) 김옥자 해녀가 우리를 반기며 어서 들어오라 등을 두드렸다. 무엇 하나 허투루 놓인 것이 없는, 잠수 장비가 정갈히 정리된 해녀의 집에는 7명의 해녀들이 둥그렇게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약속이나 한 듯 지난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저마다 지나온 세월을 회고하는 동안 이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의 빛과 회한의 그림자가 어리고 걷히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단숨에 어떤 위엄이 서렸는데, 모든 대화는 “내 아무것 없이 물질 하나로 애들 공부시키고 결혼시켰어. 그건 다 내가, 바다가 해낸 거라”로 끝맺어졌다.
“나 나이 서른셋일 때 부산에서 버스 운전하던 신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어. 죽어분 거 모셔다가 공동묘지에 묻어놓고 내 여든여섯까지 살아싱게 물질을 안 배웠으면 나가 어떻게 살아싱가 싶어. 아기들 혼자 다 키우고 대학까지 보냈지. 여자 혼자 힘으로 이렇게 살아나가는 것이 해녀들밖에 더 있나. 지금은 손손자까지 스물두 명이야. 나랑 바다가 다 한 거라. 우리 손자는 졸업할 때 지네 엄마, 아빠보다 내 먼저 사각모자를 씌워줬어. 뿌듯하지. 이 혼자 벌어 가지고 살아온 거를 나가 어떨 때는 일기를 좀 쓰고 싶어.” _김옥자 해녀
“가난해지고 학교를 못 갔어. 열일곱 살 때부터 물질하고, 열아홉 살부터는 통영, 거제, 부산, 여수 등 육지로 돈 벌러 간 거라. 육지에서 해녀 벌이가 더 좋았거든. 그렇게 벌어 가지고 친정에 밭 사드리고, 친정 오라방도 결혼도 시키고, 빚 갚고, 애들 다 키우고, 집도 장만했지. 어려웠어. 아기 낳는 날까지 물질 나가고, 아기 낳고는 15일 만에 바당에 갔어. 그 얘기 하면 눈물 나. 눈물 나려 그래. 근데 지금은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해. 나는 내 사는 거 부끄러워서 숨어 살았는데 인제는 당당해. 내가 해녀를 해서 자식을 장하게 키웠어. 내 인생 헛되지 않았다는 걸 모든 사람이 다 알게 하고 싶어. 그전에 바닷가에서 다른 사람들이 사진 찍으면 되게 싫어할 건디 이제 당당하게 찍어. 아무려면 해녀가 아닌가, 해녀는 알려도 된다.” _김순화 해녀
그렇게 이들은 테왁을, 가족을 짊어지고 사시사철 바다에 들어갔다. 함박눈이 펑펑 오는 날에도. “굶고 힘들어도 바당에 가면 공짜가 나오니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당에만 살아신디. 제주 엄마들이 다 그래. 다 강해. 혼자 자식들 키우는 엄마들이 최고로 많지, 제주도가. 옛날에는 제주 남자들은 배를 타서 그랬나 그렇게들 맹이 짧았어.” _이순덕 해녀
“나가 50년 전에 물질할 때는 고무 옷이 어디 있나. 그때는 광목천으로 만든 물속곳이라고 있어. 양말도 없이 눈이 펄펄 와도 그냥 물에 뛰어든 거라. 해녀들 물적삼에 속곳 입고 나오는 거(영화 <밀수>) 봤지? 물에 들어가서 한 30분 줍고 나와 불을 쪼는 기라. 그러다 또 들어가서 30분 해서 나오고. 하루에 세 번씩 물에 들어갔어.” _김옥자 해녀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지. 추운날 시린 물에 들어가서. 짐 나르는 오토바이가 어딨어. 다 등에 지어 가지고 걸어 다녔어. 요즘은 완전히 편해. 장비 다 있지. 옛날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야. 옛날 살아온 거 말하면 대가리가 다 아파. 정말이야.” _정순선 해녀
그렇게 속곳이 바닷물에 젖고 마르며 수십 년이 흘렀다. 서럽고 고단해도 혼자는 아니었다. 제주 해녀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꼽는 미덕이 협업 정신이다. 남보다 많이 취하려 경쟁하는 일이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음을 일찍부터 깨우친 것이다. 물질은 철저한 공동 작업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공동으로 위험에 대처한다. 조류에 휩쓸리는 위험한 순간마다 해녀에겐 해녀들이 있었다. 영광도, 위기도 함께 짊어지는 거다. 제주 해녀의 협업 정신은 과거 불턱 문화에서 시작됐다. 불턱은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대기실이자 휴게소였다. 둥글게 돌담을 에워싼 형태로 겨울에는 가운데 불을 피워 함께 몸을 덥혔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해녀 교육이 이뤄졌다. 경험 많은 선배 해녀는 생물이 많은 주요 물길을 공유하고, 물질 요령도 전수했다.
“바다는 둘이라도 있어야지. 절대 혼자만은 안 돼. 다른 일은 혼자 할 수 있는데 해녀는 혼자 절대 할 수가 없어.” – 이순덕 해녀
“동아리 정신이 없으면 그때는 못 해. 혼자는 절대 바다에 들어가면 안 돼. 예전에는 고래도 있었어. 어부들이 버려분 고기 낚는 정술에 발이라도 걸리면 나오질 못해. 그래도 벗이 있으면 이 사람이 무사 안 나왐시니 볼 수 있지.”_이순덕 해녀
바다에서 서로의 숨을, 안위를 살피며 함께 살아온 이들. 시린 바람을 맞으며 뛰어들 수 있었던 건 물속에서 50여 년을 함께 보낸 동료들 덕분이다. 불행을 견주기에는 너나없이 고만고만하게 살기 어려웠던 때에 네 아이, 내 아이 가릴 것 없이 함께 아 이를 기르며 생의 언덕을 함께 넘어왔다. 바다가 있었기에, 무엇보다 신의와 배려로 맺어진 동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녀 의 바다란 그런 곳이다. “저 친구들이 날 살리는 거예요. 이제 물질이 돈 버는 일만은 아니지. 친구가 있어서 좋아. 같이 살던 하르방은 하늘나라로 간 지 오래고, 아이들 다 키워 내보내니 이렇게 혼자 살아. 심심하면 여기 와서 커피 끓이고, 집에서 떡 쪄 가지고 와서 친구들이랑 먹으면서 그렇게 살아.”_정순선 해녀
혹독한 환경에서 한 몸처럼 운명을 함께한 데에는 공동체를 이끌어온 리더의 역량이 크다. 상군 중에서도 탁월한 기량과 지혜와 덕성을 갖춘 대상군, 오랜 시간 이들의 안전과 화합을 다져온 김옥자 해녀에게는 품넓은 아량과 단단한 심지가 어려 있었다. “모든 걸 남한테 베풀면서 살면 다 자기한테도 행복이 돌아오는 거라. 자기 몸도 중요하지만은 서로 배려하고. 이렇게 눈을 마주치면 우리가 오늘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야. 오늘이 지나도, 다음에도 안 잊어벼. 그것이 바로 사람이, 인생이 살아가는 거야.” _ 김옥자 해녀
해녀 공동체 안에서 기량 차이는 있지만 해녀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수심에서 저마다의 일을 한다. 생물을 건져 올리다 보면 삶의 지혜까지 따라왔다. 해녀의 일은 적당히 취하고 놓을 줄 아는 초연함, 단 한 번으로 욕심을 채우려 하지 않는 여유가 없다면 예측불가능한 바닷속에서 위험천만한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바다는 해녀들에게 회한을 씻어 내고 털고 일어나게 했다. 생의 구차한 일들로 부아가 치미는 날에 물속에 들어가면 엉킨 마음이 풀렸다.
“나는 하군이에요. 거짓말 없이 하군. 평생을 했지만 물질을 잘 못 해요. 깊은 데 못 들어가. 그래도 바다는 그게 진짜 고마워. 빈손으로는 안 나오게 해. 남들보다 적게 하는 거지. 빈 망아리(억새풀로 짠 그물망) 들고 나오지는 아니하게 하니까 크게 걱 정 안 합니다. 오늘 파도가 세서 못 하는구나. 많이 잡고야 싶은데 그런가 보다 하지. 아무런 미련이 없어.” _ 오춘옥 해녀
“‘오늘 안 주면 내일은 준다’ 하는 거야. ‘오늘은 이 구멍에 문어가 없어도 내일 가면 있을 수 있다’ 해. 그렇게 바다를 벗 삼아 하는 거라. 바닷속에서 웃는 순간도 많아. 문어가 나를 보고 먹을 치면서 달아나. 그걸 보면서 자도 나름 살려고 달아나는구나 하고 웃어. 바다에 안 다녔으면 못 살았지. 시어머니, 남편 때문에 속상할 때도 바다는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다녔어. 그렇게 고되도 바다에 들어가면 마음이 풀려, 마음이 시원해. 모든 게 용서가 되지. 바다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_김순화 해녀
“바다에 안 다녔으면 못 살았지. 시어머니, 남편 때문에 속상할 때도 바다는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다녔어. 바다에 들어가면 마음이 풀려, 마음이 시원해. 모든 게 용서가 되지. 바다가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_ 김순화 해녀
지난해 제주특별자치도가 발표한 ‘도내 해녀 현황’에 따르면 현재 활동하는 해녀 중 70대 이상 고령 해녀가 65%를 차지한다. 해녀 4명 중 1명은 80세 이상이다. 우리가 만난 7명의 해녀 중 2명이 80대였다. 자녀들과 나누는 안부 전화의 마지막 대화는 늘 “이제는 물에 그만 들어가시라”로 끝난다. 쉬는 날 병원에 가면 늘 듣는 말이기도 하다. 헤아리는 마음은 알지만, 그럼에도 결단이 서지 않는다.
“열세 살 나이에 물질을 배워 가지고 지금 여든여섯 살이니까 내가 몇 년 물질을 해시니? 처음 물에 들면 끝까지, 제일 나중에 나오는 것이 나여. 근데 의사가 손자들 계속 볼라면 물질을 이제 끝내라고 하지. 이 바다가 나 터전인디 놓기 아쉬운 거라. 우리가 글은 못 배웠지만 해녀의 물을 배웠고, 고생해서 해왔기 때문에 해녀에 대해서라면은 이제 나가 모르는 거 없이 다 알아. 몇 년 허면은 내가 이거 놓으까. 다음 한 해만 더해서 놓으까? 바다에 가도 벵이 나고, 안 가도 벵이 나.” _김옥자 해녀
“(물질을) 아니하고는 살 수 없죠. 하루만 안 가면 몸이 쑤셔. 돈이 없어서 그러는 것도 아닌데 희한해요. 오늘은 비도 오고 머리도 아프니 가지 말지 하고 안 가면 그날은 괜히 시간도 안 가. 우리 집에서 바로 바다가 보이는데 방에 안 있고 나와 가지고 바다 보는 거예요. 바다에 사람이 어디가 있나. 저기 테왁 뜬 거는 누구다, 저 테왁은 무시거 잡고 있다 하고 봐요.” _현수옥 해녀
지난 한 해 동안 제주 바다에서 물질하던 해녀가 2백11명 줄었다. 이로써 현직 제주 해녀는 3천 명 초반대까지 감소했다.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각종 지원책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제주 해녀라는 유산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 되었다. 다음 세대에 대한 고민 속에 김은주 해녀는 이제 막 물질 4년 차가 됐다. 느지막이 바다에 들어간 건 바다가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평생 물질을 해온 엄마 이순덕 해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야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해녀들이 물건을 해 나오면 물건을 옮겨주는, 물마중 할 사람이 필요해요. 다른 해녀 삼촌들은 남편이나 자식이 와서 도와주는데 우리 엄마는 남편도 없고, 자식들은 다 멀리 있으니까 내가 한 번씩 물마중을 나갔어요. 소라가 특히 무거운데 ‘우리 엄마는 평생 이걸 혼자 짊어졌겠구나’ 싶더라고요. 처음에는 이 힘든 거 왜 하냐고 말리셨어요. 근데 지금은 진작 시킬걸 하지. (웃음)” _김은주 해녀
“해녀들이 엄마 닮아서 잘한다 칭찬도 해주고 나도 좋아. 조금 있으면 나보다 더 잡을 것 같아. 같이 물에 들면 나는 딸 어디 숨 쉬는 거 하고 쳐다보고, 딸은 또 나 쳐다보고. 어디서 많이 잡아신가, 안 잡아신가 하며 다니고 있는데… 앞으로 벌이가 어떵살지.” 해녀의 내일에 대한 염려는 자연스럽게 바다로 이어졌다. “물건이 없어. 전복은 하나 없고 해삼하고 소라, 봄 나면 미역으로 벌어 사는디. 전에는 한번 물에 들어가면 소라를 100kg, 200kg씩 잡아신디, 지금은 30kg, 40kg이야. 물건만 있으면 딸 물질 배우기를 잘했구나 할 건데 물건이 없어서.” _이순덕 해녀 “근데 재미는 있지.” _김은주 해녀
힘든 시절을 바다와 함께 건너오며 회한과 서러움 같은 감정은 이제 다 내려앉았다. 이날 나눈 개인의 세세한 가정사는 지면에 옮기지 않았다. 강건히 살아낸 이들의 곡진한 사연에 어떤 말도 보태지 못하고 마스크가 흠뻑 젖을 만큼 그저 함께 울기만 했다. 그 젖은 이야기 끝에는 불순물이 다 사라지고 결정처럼 단 하나의 마음만 존재했다. 바다가 키워낸 것을 가장 자연스럽고 숭고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이들에게 남은 것은 바다에 대한 고마움뿐이다. 그들에게 바다는 곤궁한 삶이 밀어낸 세상의 끝이 아니다. 그들은 바다가 선택한, 바다가 껴안은 유일한 인간이었다.
“바다에 엄청 고맙지. 바다가 없었으면 내 인생을… 나를 살게 한 게 바다지. 그전에는 학교 못 간 거 되게 부끄럽고 후회했는데 ‘이제는 아, 내 태어날 때부터 해녀로 태어났다. 남이 공부 많이 해서 교수가 되고 뭐 하는 것같이, 나도 해녀의 대학생이다,(웃음) 그렇게 생각해. 남한테 부끄럽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삶이 행복해. 내 인생 잘 살았구나. 이미자의 ‘내 삶의 이유 있음은’ 이 노래가 너무 가슴에 닿아서라.” _김순화 해녀
바다에서 커진 이들의 호방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헤어지는 인사가 길어지며 손 가까이에 있는 음료수와 간식을 가득 싸주기 시작했다. “큰큰한 집에 나 혼자 살아. 이제 여기 와서 방 없으면 우리 집에 와서 막 자도 돼. 정말이야. 길가에 있는 집이니까. 숙소 빌릴 필요 없어. 우리 집에 와서 다 자랜해. 나 얼마든지 잘 또 해줄 거니까. _정순선 해녀
“이거 인터뷰 헐려고 너네들 수고했지만 우리 해녀를 알리기 위해 신경 써줘서 고맙다. 한 번 보고 두 번째 보니까 손자 같구먼. 니네도이 내가 할망스럽고 반갑지? 매년 또 와봐라. 바당에 다 같이 들어가자. 할머니 오래 찾아다니면 언젠가는 물에 들어갈 거다.” _김옥자 해녀
“이렇게 눈을 마주치면 우리가 오늘 하루로 끝나는 것이 아니야. 오늘이 지나도, 다음에도 안 잊어벼. 그것이 바로 사람이, 인생이 살아가는 거야. ”_ 김옥자 해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