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곁에서 살아가는 5명의 필자가 지금 가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전해왔다.
미술을 향유할 때 일어나는 일들, 작품을 능동적으로 감상하는 방법, 주목해야 할 아시아의 신진 작가까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예술적 화두들.

전시의 지평

writer 김성우(큐레이터, ‘프라이머리 프랙티스’ 파운더)

최근의 시장 약진은 그간 나름의 방식으로 수립되어 온 미술 생태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전의 미술계에서는 볼 수 없던 시장 중심의 열기와 함께 다양한 컬렉터 층이 양산되었고, 그들의 취향과 선호가 미술에 특정 경향을 부여하기도 했다. 삶 속에 더욱 깊이 들어온 온라인 플랫폼은 그렇게 주목받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재노출시킴으로써 미학적 평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영향력을 획득하게 했다. 때로는 그러한 경향성이 두려울 정도로 그들에게 쏠린 주목도와 관심은 미술의 중요한 동력 중 하나가 된 듯 보인다. 한편, 시장은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작품을 놓는다. 그것은 하나의 개별적인 오브제로서 컬렉터의 취향과 가치관을 대변해야 하며, 작가의 서사를 담지한 고유의 개별 상징으로 위치를 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기서 그간 놓쳤던 미술계 내부의 또 다른, 하지만 중요한 흐름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트 페어가 오브제로서의 작업이 지닌 장식성이 나 재화 가치를 지닌 사물로서 작품을 다룬다면, 본 지면에서는 ‘큐레이토리얼’이라는 이름 아래 창작의 조력자를 자처하는 큐레이터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서사, 문맥 등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한다. 이는 전시라는 시공의 형식이 어떻게 작품과 공조하여 문맥을 형성하는지, 어떻게 작품에 다층적 해석의 깊이를 더 하는지, 그리고 동시대 담론과의 접점에서 어떻게 예술의 지평을 확장하는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작품의 개별적 심미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며, ‘전시’라는 이름 아래 어떻게 지적 토론이 가능해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담론의 일부로써 동시대 미술의 가치가 갱신되어온 궤적을 살피는 일이다. 이로부터 동시대 미술의 역동적 진화를 살필 수 있게 된다.

1990년대 이후 큐레이팅은 동시대 시각예술의 주요한 화두로 부각되었다. 시각문화의 생산과 매개자로서 큐레이터의 역할이 주목받으면서 큐레이팅학에 대한 학문적 정립과 독자적 역사화가 서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어왔다. 동시대 예술 지형도에서 담론 생산 주체로서의 큐레이터, 그리고 그들의 큐레이토리얼 실천의 문제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슈가 되어가고 있다. 큐레이팅이란 시각예술의 발표, 즉 단순히 흥미로운 시각적 전시 형태로 작품을 선보이는 것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식의 운용 차원에서 작품과 함께 가동되는 것이며, 오늘날의 현상에 대해 시의적절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때로는 전시나 프로젝트와 같은 특정 시공간을 점유하는 이벤트에 대해 내외부적으로 점검을 하기도 하며, 동시대라는 범주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지금, 여 전시의 지평기’에서 해야 하는지에 대해 숙고하는 태도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는 곧 작업을 경유하여 오늘의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질문을 앞세워 공론의 장을 개설하는 일로 이어진다.

‘뮤지엄헤드’에서 열린 전시 <모뉴멘탈(Monumental)>(2023) 전경. 뮤지엄헤드 제공
PHOTO 조준용

이는 서울에 위치한 독립 예술 공간 예시에서 보다 선명하게 살펴볼 수 있다. “다양한 매체가 전시를 대체하는 현재의 시공에서 물리적 현존으로서 전시와 큐레이팅에 집중한다”는 ‘뮤지엄헤드’는 “여전히 전시를 만들고, 돌파하고, 갱신한다”라고 스스로를 정의한다. 전시 <모뉴멘탈>(2023)을 기획한 권혁규 큐레이터는 ‘기념비’의 소환을 통해 현실 속 기념비를 둘러싼 숭배와 해체의 갈등, 미술사 속 (반)기념비의 형식적 경향성을 교차시킨다. 이를 위해 뉴 뮤지엄의 전시 <언모뉴멘탈>(2007)의 일부 특징을 참조하며 보다 넓은 역사와 사회 그리고 개인에게서 보이는 분열적 양상 위로 오늘날 미술의 형식과 매체, 기념비를 포개어 놓고 아홉 명의 작가와 함께 이를 둘러싼 한국 미술의 현재적 조건과 실천을 심문한다.

 <도면함> 전시 전경.

한편 ‘시청각’은 종종 전시의 방법론을 질문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공간 운영자인 현시원 큐레이터에게 ‘도면’은 흥미로운 주제다. 전시의 흐름과 조감으로 물리적인 위치를 그려낸 도면은 전시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기록이다. 그에게 도면은 ‘(비)가시적인, 순간적이거나 영속적인 아이디어가 종이 형태로 물질화된’ 것이다. 물리적인 전시와 도면 사이의 간극은 전시의 시작과 결과 사이, 전시의 실제적 경험과 도식화된 문서 사이에서 기록의 한계와 기록 위에 새로운 이미지적 가능성을 확보하는 매체다. 이러한 전제는 전시 <도면함>(2017)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도면은 ‘공간을 압축해서 보여주거나 제시하는 것’이 될 수 있으며, ‘전시를 아카이빙하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참여한 다섯 명의 작가는 ‘도면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서로 다른 형태의 작업으로 화답한다. 과거의 회고가 아닌 미래적 상상을 가능케 하는 가능성의 물질로서 도면이 기능할 수 있을지 등에 관한 질문과 응답의 과정은 곧 작가에게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며, 과정 속에서 흥미로운 발견을 끌어내 작업의 외연을 확장하고 이후 작업에 영향을 미친다.

<MANUAL> 전시 전경.

마지막으로 ‘프라이머리 프랙티스’는 동시대의 큐레이토리얼 실천(혹은 실험) 안에서 오늘날의 예술을 확장된 문맥으로 담아내고자 한다. 개관전 <MANUAL>(2022)은 눈과 뇌를 마비시키는 스펙터클 전략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신체의 감각과 주체적, 능동적 사유에 기반한 전시를 상상한다. 전시 제목은 ‘지시서(manual)’로 작동하는 전시를 ‘육체 (manual)’로 감각하며, 주어진 룰을 따르는 수동태가 아닌 스스로 분절된 이미지를 서사로 직조해야 하는 능동태로서의 관람객을 요구한다. 전시는 본질적으로 분절적인 이미지의 연쇄 속에서 (비)선형적 서사를 획득하는 시공으로, 세 명(팀)과 함께한 본 전시에서는 이미지들의 연동과 연쇄 속에서 관람객의 능동적 사유를 촉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전시에 놓인 작품을 개별적 오브제이자 타 작업을 돕는 장치로 다루며, 이 분절적 이미지들의 역동적 조합을 통해 모종의 서사를 상상하도록 한다.

몇 개의 예시로 모든 걸 담아낼 순 없지만, 이러한 실천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큐레이터가 가설하는 전시는 심미적 결과물이라기보다 현상을 촉발한 원리에 대한 비판적 질문과 그에 따른 지적 탐구를 수반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내적으로 선행됐던 질문은 외부─작가와 관람객─로 전이되는 순간부터 그 의미를 획득하며, 그로부터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그다음 질문에 의해 확장된다. 그러므로 큐레이터가 수행하는 질문의 과정, 그 큐레이토리얼의 실천이 만들어낸 잠시의 시공간, 전시에 기꺼이 동참한다면 보다 지적인 유희의 과정 속에서 의미는 또 다른 의미로 이어지고, 가치는 또 다른 가치를 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