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곁에서 살아가는 5명의 필자가 지금 가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전해왔다. 미술을 향유할 때 일어나는 일들, 작품을 능동적으로 감상하는 방법, 주목해야 할 아시아의 신진 작가까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예술적 화두들.
아시아 신진 작가의 감각
writer 정필주(미술 평론가)
MZ세대 컬렉터가 미술 시장에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자 예술경영지원센터는 이들에 대한 보고서를 내기에 이르렀다. 보고서(<MZ세대 미술품 구매자 연구>, 2022)에 따르면, MZ세대 컬렉터는 풍요로운 문화 콘텐츠에 그 어느 때보다도 제한 없이 접근할 수 있다. 이는 새로운 방식이나 채널을 통한 경험 및 지식 습득에 망설이지 않는 MZ세대의 적극성과 맞물리며 지금까지의 예술 유통 체계 자체가 크게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디즈니 캐릭터 나 일본 만화 주인공이 등장하는 예술 작품들을 소개 하는 미술관 전시는 이제 서양 명화를 소개하는 전시 이상으로 자주 개최되고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의 ‘도라에몽’이나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의 ‘미키 마우스’가 대표하는 그 키치적, 키덜트적 감성은 망설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MZ세대 신진 작가들의 새로운 감성에 의해 대체될지도 모를 일이다. 좋은 작품을 추천 받기 위해 아트 어드바이저에게 전화하는 대신 자신이 팔로하던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의 작품 소개글에 ‘좋아요’를 누르며 리서치를 하는 데 익숙한 MZ 컬렉터의 ‘취향 추구 욕구’와 자신만의 감각을 시대적 감성에 발빠르게 접목하려는 신진 작가의 ‘자기표현 욕구’는 이제 상호 보완적 관계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감성으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1990년대생 아시아 신진 작가 5인의 작업 세계를 통해 이들의 감각이 나아가는 방향을 점검해본다.
홍콩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인 청팅팅(CHENG Ting Ting)은 1990년생으로 홍콩 갤러리 엑시트(EXIT)와 함께 글로벌 무대에서 활약 중이다. 아트 바젤 홍콩에 2019년, 2021년, 2023년 연속으로 참여할 정도로 그의 작업은 반응이 좋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작업의 모티프로 삼는다는 ‘회화적 101’의 기본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보이는 사물들을 막연히 재현하는 것에 만족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사물들이 기존에 속해 있던 공간적, 맥락적 질서를 흩트리고 대상을 원래의 위치, 즉 확립된 질서와 이에 대한 우리의 신념 그리고 믿음의 ‘기억 세계’로부터 추방시키는 독특한 방식을 쓴다. 엑시트 갤러리 관계자는 “청팅팅의 작품 속 사물들은 공간 맥락이 거의 없어서 진공 속에서 떠다니는 듯하다”고 했다. 기존 질서에서 이탈한 사물들이 점유한 진공의 ‘무질서’를 회화적 프레임에 담아낸 청팅팅이 앞으로 SNS와 탈중앙적 신념 체계를 ‘질서의 진공 상태’라 이름 붙인 이들의 ‘기억’을 어떻게 그려내게 될지 기대된다.
수파위치 위사펜(Supawich Weesapen)은 1997년 태국에서 태어난 작가로, 노바 컨템퍼러리(Nova Contemporary) 갤러리 등을 통해 활동한다. 작가는 자연현상, 미신, 에너지의 흐름 등에 관심을 가지며 이에 매겨지는 숭고함의 개념과 그 영적인 순간들을 화폭에 담아낸다. 고대의 상징과 전설, 예언들을 혜성과 같은 우주적 현상과 매칭시키기도 한다. 2021년에 동시대 신진 작가들의 대표적 등용문으로 꼽히는 스위스의 리스테 아트 페어에서 소개되었고, 2023년에는 싱가포르 미술관 ‘S.E.A. 포커스’에서 작업을 선보이는 등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려왔다. 올해 10월부터 열리는 2024 방콕 비엔날레에도 참여 작가로 이름을 올려 기대를 모으는 중이다.
양위닝(Yang Yu-Ning)은 대만 출신 작가로 1990년생이며, 대만 갤러리 마인드 셋 아트 센터(Mind Set Art Center)의 전속 작가다. 그는 먹을 사용해 주변 사물을 표현하는데, 한 번의 붓질이 마르기 전 그 다음 붓질을 하는 방식을 사용해 작업한다. 그의 먹그림은 환하게 건조된, 마치 빛이 오래 머무른 듯한‘면’과 빛의 부재가 깊게 스며든 ‘어둠’으로 나뉜다. 이를 통해 작품 속 대상들은 명징한 존재감을 자아낼 뿐만 아니라, 감상자가 갖고 있는 기억 속 존재의 ‘이름’을 떠올리도록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능동성을 갖게 된다.
올해 1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아트 페어 ‘아트 싱가포르(ART SG)’에서 선보인 작업이 싱가포르 사립 미술관에 5만 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판매되어 화제에 오르기도 한 마르코스 쿠에(Marcos Kueh)는 1995년생 말레이시아 작가다. 그는 쿠알라룸푸르의 ‘더 백 룸(The Back Room)’ 갤러리를 통해 아트 싱가포르에 참여했는데, 박람회장 중앙부를 차지한 걸 개그림 형태의 대형 태피스트리 작업이 스펙터클함 으로 눈길을 끌었다. 작가는 그래픽디자인 및 광고업 계에서 일한 경력을 살려 말레이시아 특유의 혼종적 문화 질서를 작업에 유감없이 드러내왔다. 말레이시 아와 보르네오의 신화를 비롯한 전통적 요소와 거리 의 광고 이미지, 브랜드 로고 등 현대적 요소를 한 화 면에 우아하게 결합한다. 이질적 역사와 문화를 한 화면에서 공존시킨 그의 작업은 관객이 걸음을 멈춰 말레이시아와 서구, 전통과 근대성 사이에서 한 번 더 고민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물론, 작가의 강점은 ‘교훈’이나 ‘교화’에 머물기보다 혼종적 사회에 뿌리내리는 데 망설임이 없는 이들과의 세대적 유대감 그 자체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작가는 현재 네덜란드에 거주하며 중국-말레이시아계 보르네오인으로 서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데, 이러한 혼종성을 피부색이나 언어 이전의 ‘뿌리’로 인식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다. 작가는 올해 9월 8일부터 바르셀로나 등지에서 열리는 ‘마니페스토 비엔날레’에 도 참여하며, 부산 해운대에 위치한 KF 아세안문화원의 기획 전시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에서도 그의 작업을 만나볼 수 있다.
1991년 일본에서 태어난 히로카 야마시타(Hiroka YAMASHITA)는 타카 이시(Taka Ishii) 갤러리와 블룸(BLUM) 갤러리 등을 통해 활동한다. 그의 작업이 지닌 특이점은 ‘공감각성’에서 찾을 수 있는데, 미술평론가 노에미 스몰릭(Noemi Smolik)은 이에 대해 2022년 <뉴욕타임즈> 기사에 “관람객은 그림 속 바람을 느끼고, 안개의 무게를 느낀다”라고 적었다. 그림을 보려 하지만 동시에 보는 행위 자체에 함몰되어 있는 관람객의 ‘눈을 속이는’ 그의 작업은 시각을 넘어서 공감각적 행위로 관람객을 이끈다. “(나는 풍경을 그리지만) 우리가 풍경을 보는 시선보다 풍경이 우리를 보는 시선에 관심이 있다”라고 작가 스스로 밝히기도 했듯, 주체와 객체를 바꿔치기하며 신선하게 시점을 넘나드는 그의 그림은 보이면서도 만질 수 있는, 그리고 보면서도 만져지는 그림으로 이어진다.
이상의 아시아 작가 5인은 로컬에서 어느 정도 일궈낸 활동을 디딤돌 삼아 현재 세계 무대로 도약 중이며, 필자 또한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이 작업에서 주창하는 감각의 세계가 현재의 주류를 대체할 새로운 물결로 등장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적어도 이들을 소개해온 갤러리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미술계에서 앞으로 부상하게 될 새로운 감각이 향할 조류의 방향을 점쳐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