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국악은 나아간다.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을 넘어. 기대와 예상을 넘어선 소리를 들려주면서. 상자루, 노은실, 매간당. 세 이름이 그려가는 음악적 세계는 새로움을 끌어안으며 흥미롭게 증폭되고 있다.
언제나 초면인 것처럼
가야금 주위로 세 연주자가 둘러앉아 악기의 몸통을 두드리고, 현을 뜯고, 화음을 맞춘다. 거문고를 연주하는 도구인 술대는 해금과 만나 기성의 국악에서 볼 수 없던 독특한 음색을 낸다. 거문고를 다루는 유예진, 해금을 다루는 황재인, 25현 가야금을 다루는 김지연은 국악기를 연주하는 오래된 관습에서 벗어나고자 그 틀과 규칙을 더욱 철저히 파헤친다. 악기를 처음 만난 순간으로 돌아가 익숙한 관습을 하나씩 뜯어 살피는 매간당의 음악에 ‘정답 같은’ 연주란 없다. 그렇게 전통과 새로움 사이 어딘가에서, 국악이라는 장르로 손쉽게 규정지을 수 없는 매간당만의 독자적인 소리가 탄생한다.
먼저 ‘매간당’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묻고 싶다.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광 매간당 고택과 관련이 있나?
황재인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팀을 이끄는 유예진이 매간당 고택 주인의 손녀다.(웃음)
유예진 맞다.(웃음) 매간당 고택이 종갓집이다. 그 집 외손녀로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전통문화를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가 많았다. 본래 고택의 이름은 매화가 피는 집이라는 의미지만, 여기에 새로운 뜻을 더해 매혹할 매(魅), 즐길 간(衎), 무리 당(黨) 자를 써서 ‘관객을 매혹하고 즐겁게 만드는 무리’라는 뜻으로 쓰며 활동 중이다.
세 멤버가 어떤 계기로 함께하게 됐나?
유예진 팬데믹 당시 <스튜디오 매간당>이라는 이름으로 국악 커버 음악을 선보이는 유튜브 채널을 먼저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우리만의 색을 담은 음악을 창작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 함께할 멤버를 수소문했고, 그렇게 재인과 지연을 만나게 됐다. 흔히 국악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끼리 팀을 결성하는 경우가 많은데, 매간당은 팀의 정체성을 먼저 정해놓고 그에 어울리는 멤버를 찾아 팀을 이루게 됐다. 좀 독특한 방식이다.(웃음)
스카우트 형식이었던 건가?(웃음) 그만큼 팀 정체성에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을 것 같다.
유예진 전통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창작하는 팀을 만들고 싶었다. 전통이라는 단어 자체에 오랜 시간 전해 내려온 관습이란 뜻이 담겨 있지 않나. 오랜 시간 국악을 하며 익숙해진 관습에서 벗어나는 상상을 할 때 더 재미있고 참신한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황재인 당시 예진이 제안한 방향성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매간당이 추구하는 음악적 방향성은 ‘네오 트래디셔널’, 즉 가상의 전통음악이다. 새로움과 전통은 정반대 의미를 지니지만 매간당으로 활동하면서 둘 사이의 접점을 찾아가는 중이다.
제16회 21세기 한국음악프로젝트 대상 수상곡인 ‘초면인 세계에 눈뜨다’에서 국악을 하며 느낀 틀과 관습에 대한 고민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이 곡의 시작점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하다.
유예진 이 곡의 영문 이름이 ‘자메뷔(Jamais Vu)’인데, 이름 그대로 내가 직접 경험한 자메뷔 현상에서 출발했다. 평소처럼 연습을 하던 어느 날, 막힘없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내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가끔씩 익숙하던 것이 갑자기 낯설게 보이는 때가 있지 않나. (MBTI상으로) 망상을 즐기는 파워 ‘N’이라 소소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부모님이 처음 거문고를 사주셨을 때를 떠올렸다. 거문고의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도, 어떤 도구로 연주해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장난감처럼 아무렇게나 두드리고 놀던 그때 더 재미있고 틀에 갇히지 않은 소리가 나온 것 같은데, 만약 이후의 기억을 잃고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떤 음악을 만들게 될까? 이 질문에서부터 출발해 곡을 만들게 됐다.
황재인 매간당의 곡을 작업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게 서사를 만드는 일이다. 이 곡은 판소리처럼 사람 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국악 안에서 새로운 음향을 탐구해가는 과정, 음악과 악기 자체를 중심 서사로 삼고 있다. 그간 이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곡들은 주로 전통 멜로디를 토대로 재창작하거나 전통 장단을 그대로 이용하는 등 대중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만한 요소를 활용한 경우가 많은데, 매간당은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셈이다.
재미있는 가정이지만, 오랜 시간 배우고 익힌 악기를 새롭게 탐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를 위해 세 멤버가 함께 어떤 시간을 보냈나?
유예진 이미 수십 년 동안 악기를 연주하는 정해진 방식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묘안이, 다른 악기를 다루는 멤버나 국악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친구들에게 거문고를 던져주고 관 찰해보는 거였다.(웃음)
황재인 당시 연습실에 악기를 두고 각자 오가며 작업했는데, 그때마다 서로의 악기를 조금씩 건드려보곤 했다. 하루는 예진이 해금을 가져가더니 거문고를 연주하는 술대로 이리저리 두들겨보다가 왼손으로 줄의 장력을 바꾸면서 술대로 해금의 원산(해금 울림통에 얹힌 나무 복판에 솟은 작은 산) 아래 부분을 때렸다. 그때 해금에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통통 튀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다른 멤버가 새롭게 발견해준 주법을 하나씩 곡에 포함하게 됐다.
유예진 개인적으로 활이라는 연주 도구를 탐구한 순간이 가장 흥미로웠다. 활은 어떤 악기에 활용하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음색을 연출할 수 있는 도구다. 곡 작업을 하면서 거문고를 술대 대신 활로 연주해보는데, 아쟁이나 해금으로도 낼 수 없는 대단히 오묘하고 복합적인 소리가 났다. 로파이 음향효과 같기도, 감겨 있던 테이프가 풀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악기들을 새롭게 탐구하며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나올 때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찾던 소리야!” 하며 기뻐한 기억이 있다.
25현 가야금 주위로 세 멤버가 둘러앉아 악기의 몸통을 두드리고, 현을 뜯고, 화음을 맞추는 ‘Fragile’의 독특한 연주 방식 역시 국악기를 낯설게 바라보려는 시도 끝에 탄생한 건가?
유예진 그렇다. 언젠가 기타 한 대를 연주자 5명이 함께 연주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한쪽에서는 기타 몸통을 두드리며 타악기 효과를 내고, 다른 연주자는 베이스 음을 규칙적으로 뜯으며 노래를 부르는데, 한 대의 기타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고 매우 화려하고 풍성한 소리가 났다. 이 형식을 국악기에 어떻게 적용해볼지 고심하던 차에 지연이 연주하는 25현 가야금이 적합한 악기란 생각이 들었다.
김지연 25현 가야금은 일반적으로 쓰이는 12현 가야금 두 대를 붙인 것처럼 폭이 넓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각자 가야금을 연주하는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사실 가야금 연주자들은 이 곡에서 시도한 방식이 악기를 상하게 할까 봐, 혹은 전통 주법과 다른 방식이라 달갑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두 멤버에게 가야금 다루는 법을 알려주면서 전공자의 시선으로는 생각해내기 어려운 색다른 주법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정답에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연주하던 때와는 차원이 다르게 즐거운 경험이었고, 가야금이란 악기가 지닌 가능성을 실험해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매간당의 음악을 접한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 연주 도구나 장단, 주법 면에서 기존 국악과 달라 낯설게 느끼는 이들도 있었을 듯하다.
황재인 재즈나 록, 영화음악처럼 생각지도 못한 장르를 떠올리는 관객들이 있었다. 매간당의 음악이 누구나 편히 기댈 수 있는 스타일은 아니라 생각하는데, 듣는 이들이 우리 음악에서 각자에게 익숙한 장르를 떠올리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면을 찾아준 게 아닐까 싶다.
유예진 매간당의 모든 곡은 국악기로만 연주하는데도 관객마다 해석이 다른 걸 볼 때면 참 흥미롭다. ‘Fragile’이 힙합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웃음)
김지연 연초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공연하며 접 한 해외 관객의 반응도 기억에 남는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악기가 그저 신기하게 느껴졌는데, 막상 공연을 보고 나니 외국의 전통음악이라고 해서 그저 낯설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고 하더라. 악기가 만들어내는 원초적 소리나 왈츠의 리듬을 우리 장단에 녹여낸 점을 흥미롭게 느낀 듯했다.
국내외 관객의 다양한 반응을 살피면서, 매간당의 음악이 듣는 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가닿길 바라는지 고민해보기도 했나?
황재인 사실 어려서부터 국악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한국 관객이 오히려 더 국악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 우리 음악이 국악이라는 이름 아래 소비되지 않길 바란다. 국악이 듣고 싶을 때가 아니라, 재미있고 신선한 음악이 듣고 싶을 때 매간당의 음악을 찾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유예진 동감한다. 옛것을 보존하고 계승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면서도, 국악을 동시대를 넘어선 음악으로 만들고 싶다는 사명감을 느끼기도 한다. 누구나 경험하지 못한 시간, 옛것에 환상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평생 국악인으로 살아 온 우리의 상상력을 활용해 사람들이 환상으로만 가진 전통의 이미지를 친절하게 풀어 보여주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라 본다.
문득 세 멤버가 감각하는 국악의 아름다움은 무엇이기에 계속해서 전통음악이란 세계가 지닌 가능성에 집중하게 되는지 묻고 싶다.
황재인 국악만이 가진 날것의 매력이 있다. 같은 곡을 오랜 시간에 걸쳐 연습할 때 ‘깊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차이가 우러나는데, 그 차이를 경험할 때 전통 선율만이 지닌 진솔함을 느낀다. 그 진솔함 덕에 음악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힘도 더 선명해진다.
그 미세한 깊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한다고 보나?
유예진 국악은 수십 년에 걸쳐 하나의 곡을 완벽하게 익히는 훈련을 받는다. 10년 전의 연주와 지금의 연주에서 느껴지는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비단 음악 자체만이 아니라, 한 곡을 반복해 수련하면서 인간적으로도 성장한다. 그 때문인지 국악을 해나가는 일이 마치 정신 수양의 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웃음)
김지연 정신 수양이 딱 맞는 말이다.(웃음) 나이가 들면서 ‘삶이란 게 이런 거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지 않나. 국악을 하다 보면 이 깨달음이 연주에도 저절로 담기는 것 같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 예전과 달라지면서 음악도 발맞춰 변화하는 거다.
유예진 그런데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봐야만 알아차릴 수 있다.
김지연 한때는 ‘잘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던 것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윽’ 하게 되는 거다.(웃음)
오랜 시간 국악에 머무른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지점일 듯하다. 마지막으로, 국악 안팎에서 매간당이 만들어갈 음악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유예진 최근 관심을 가진 주제는 고려와 조선의 기녀들이 추던 권번춤이다. 통상 궁중무용은 역사적 기록에 따라 정해진 춤을 추지만, 권번춤에는 정답이 없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착안해 전통 무용의 반주 음악이 따르던 틀을 벗어나, 매간당의 심오한 정체성을 더해 아름다우면서도 서늘한 인상을 주는 권번춤 음악을 만들어볼 계획이다.
김지연 여전히 전통음악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요소가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오랜 시간 국악인으로 살아왔기에 국악을 더 분석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고 보고, 앞으로도 국악이 지닌 흥미로운 요소를 발굴해 우리 음악에 녹여낼 생각이다.
황재인 이 여정에 국악의 관습을 의식하고 그것을 의도적으로 깬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하기보다는, 하고자 하는 음악을 그저 지금껏 우리가 다뤄온 국악기로 만들어갈 뿐이라는 열린 자세로 매간당의 세계관을 다져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