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변화라는 예견된 미래 앞에서, 인간은 기술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삶을 모색해 나갈 수 있을까? 올해 키아프 서울 특별전 <키아프 온사이트: 보이지 않는 전환점>이 주목하는 화두다. 가상현실부터 인공지능, 게임 엔진과 타임랩스에 이르기까지 첨단 기술을 접목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7팀의 작가가 제안하는 미래적 대안과 인간 본질에 대한 사유가 2024 <키아프 온사이트>에 담겨 있다.

JIN Dallae & PARK Woohyuk
진달래&박우혁

사회의 규범과 질서, 약속과 기준에 대한 의문을 주제로 활동해온 예술 공동체. 현실 세계의 장면들을 일정한 패턴으로 재구성해 설치, 영상, 그래픽, 사운드, 퍼포먼스 등 다양한 매체를 기반으로 전시 공간에 구현한다.

JIN Dallae & PARK Woohyuk, ‘The Black Moon and the Rabbits’, Installation, sound, performance, 2024

키아프 서울에서 선보이는 작품 ‘검은 달과 토끼들’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작품 제작의 단초가 되어준 화두는 무엇이었나?

우리는 예술 공동체로 활동하며 일상 속에서 쉽게 지나치는 평범한 순간들을 관찰하고 재구성하며 사회의 면면을 포착하고자 했다. ‘검은 달과 토끼들’은 언뜻 인간이 처한 현실이 시시각각 다양하게 변화하는 듯하지만, 삶의 단면을 쪼개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동일한 행위와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했다. 이에 기계적인 행위를 반복하는 퍼포먼스를 통해 이러한 현실의 장면들을 중첩해 표현하고자 했다.

오랜 시간 현실 사회의 규칙과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작품을 선보여왔다. 설치와 퍼포먼스라는 매체를 통해 이 주제 의식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했나?

작품에서는 열 명의 퍼포머가 경사가 있는 구조물로 공을 굴려 올리거나 2인이 한 조가 되어 공을 주고받는 등 단순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한다. 이때 크기가 서로 다른 8개의 공은 사회의 요구 아래 만들어진 성과나 욕망을 상징하고, 이 공을 움직이는 방식에 일정한 패턴을 부여하면서 사회를 작동시키는 힘의 존재를 부각시키려 했다. 이를 통해 사회가 정해둔 규칙과 질서에 지배되어 매일 똑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환기하고 개인의 노동이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

기술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새롭게 고찰하는 데 초점을 맞춘 특별전의 주제 아래, 해당 작품을 통해 가장 중점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4차 산업혁명까지 산업의 형태가 지속적으로 바뀌고 인간의 활동 영역이 땅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인류의 역할은 점차 분업화되고 당장의 먹고사는 행위와는 관련이 없는 활동을 반복하고 있다. 인류가 이뤄온 거시적인 성과에 가려져 그것을 위해 노력해온 개인의 존재감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한 동력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존재이지 않나.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 새로운 기술 저변에 자리한 기초적인 기술이자 가장 전통적인 매체인 몸의 행위에 주목했다. 이는 기술이 현대미술에 직접적으로 활용되는 시대에 ‘기술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집중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키아프 서울을 찾은 관객이 당신들의 작품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길 바라나?

‘검은 달과 토끼들’ 속에서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행위와 소리가 주는 미묘한 어긋남의 감각을 온몸으로 느꼈으면 좋겠다. 그 반복되는 장면이 모여 세상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각자의 현실에 비추어 깨닫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 F.Glowinski

Kat Austen
캇 오스틴

과학적 데이터를 활용해 조각, 뉴미디어, 퍼포먼스, 참여형 작업을 아우르는 작품을 선보인다. 소리를 주재료로 자신과 타인,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데 중점을 둔다.

Kat Austen, ‘Empty Fields’, Sound, movement performance, 15min, 2024
©Jess Sutton

키아프 서울에서 선보이는 퍼포먼스 작품 ‘Empty Fields’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어떤 질문이나 화두에서 출발한 작품인가?

나는 여러 작업에 걸쳐 자연과 인간, 디지털 요소가 결합해 새로운 형태의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 하이브리드 생태계를 탐구해왔다. 올해 키아프 서울 특별전에서 소개하는 ‘Empty Fields’ 역시 사운드와 신체 퍼포먼스를 활용해 황야라는 공간을 인간과 사이보그, 인공지능이 혼재된 하이브리드 공간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작업의 시작점에서 영단어 ‘wilderness’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 나타나는 의미의 차이에 주목했고, 그 결과 버려진 땅과 집,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면서 고요해진 들판, 국경 지역 등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한국의 여러 장소에서 생생한 현장음을 채집해 작품의 주요소로 활용했다.

한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해 현장음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지역을 고르는 특정한 기준이 있었나?

서울, 광주, 부산 등 여러 도시에서 채집한 인공적인 소리와 제주도 한라산과 전남 청산도 등의 시골 지역에서 얻은 자연의 소리를 엮어 활용했다. 이를 위해 지난 2년 간 인간의 흔적이 남지 않은 황야를 찾아다녔다. 그중 농업용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처럼 인간 활동이 자연에 만들어낸 환경에서 소리를 채집한 경우도 있는데, 이처럼 인간과 풍경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나타내주는 특색 있는 장소를 중점적으로 모색했다.

여러 작품에 걸쳐 생태계의 상호 연결성을 강조해왔다. 작품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꾸준히 탐구해온 동기가 궁금하다.

우리가 직면한 생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은 내 작업을 이어나가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기후 위기나 생물 다양성 위기는 인간과 생태계가 단절되어 있고 착취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다. 자연과 인간이 맺는 관계에 천착해 지속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내가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공존’이다. 자연, 그리고 타인과의 상호 의존성을 인식해야 진정한 의미의 지속 가능성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예술은 이 점에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본다.

작품 제작 과정에서 인공지능과 데이터 분야에서 떠오르는 쟁점 중 어떤 면에 주목하고자 했나?

데이터에 관해서는 인간이 초래하고 있는 환경위기를 증명할 데이터가 부족한 게 아니라 이에 대한 깊이 있고 구체화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게 내 오랜 생각이다. 이 때문에 작업에서 수치 데이터를 활용하기보다 현장 녹음처럼 덜 체계화된 데이터를 활용해 주제에 대한 구체화된 지식을 제공하려는 편이다. ‘Empty Fields’에서는 이런 접근 방식에 새롭게 떠오르는 AI의 미학을 반영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게 해주는 AI의 잠재력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키아프 서울을 찾은 관객이 당신의 작품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길 바라나? 관객이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동원해 전시장에서 들려오는 다층적인 소리에 몰입해주길 바란다. 작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자연 풍경과 가상 환경을 경험하며 무엇을 느꼈는지 관객 스스로 복기해보며 자연과 우리가 맺는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폭넓은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한다.

Choi Wonjung
최원정

20여 년간 문화적 혼종성과 이질성을 주제로 연구를 지속해왔다. 문화인류학, 지정학 연구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인류의 기원과 이주라는 주제를 드로잉, 설치, 조각에 두루 담아낸다.

키아프 서울에서 선보이는 설치 작품 ‘뿌리 II’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어떤 질문이나 화두에서 출발한 작품인가?

오랜 시간 외국에서 작업을 이어오며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Where are you from?)”였다. 인사말처럼 건네는 질문이지만 그 안에는 이미 인종과 언어, 문화 면에서 다른 정체성을 지닌 타자에 대한 배타적 시선이 담겨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자 내 DNA 검사 결과를 기반으로 동명의 리서치 기반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올해 키아프 서울에서는 그 일환으로 제작한 뿌리 형태의 대규모 설치 작품인 ‘뿌리 II’를 선보인다.

당신의 유전적 정보를 어떻게 작품 안에 활용하고자 했나?

6세대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유전자 패턴과 내 DNA 정보를 비교해보니, 조상 중에 92%는 동북아시아, 7%는 남중국해 지역에서 이주했으며 나는 거의 100%에 근접한 확률로 아시아인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이는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분투하던 내 개인적인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결과였지만, 오랜 시간 천착해온 문화적 혼종성이란 주제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됐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점에서는 원시 시대 조각가들과 나는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에, 이후 이들의 예술성을 어떻게 발전시켜 현대의 조각 작품에 적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뿌리 II’를 만들어나갔다. 이 작품에는 거대한 뿌리 형상 안에 3D 모델링으로 제작한 조각 30여 점이 들어 있다. 이는 외국에서 작가이자 노매드로서, 또 이방인으로서 살아온 나 자신의 혼종적인 정체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뿌리 형태 속에 배치된 조각품을 제작했다. 이러한 기술 활용이 평소 인류의 진화 과정이란 주제에 천착해온 당신의 작품 세계와는 어떻게 닿아 있나?

나는 동시대의 시공간을 다루기보다 과거의 요소를 현재로 소환해 새로운 주제를 발견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다. 요즘 들어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한 현대 예술이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기술의 힘을 빌려 구석기 시대에 살던 예술가와의 접점을 찾고자 했다. 작품 속 조각들은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와 ‘라이온 맨’과 같은 구석기 시대 원시 조각품의 형태에서 영감 받은 결과물로, 두 피사체가 혼인을 했다는 가정 속에서 5세대에 이르는 족보를 그려보면서 다양한 인물군을 만들어갔다. 원시 조각품은 주로 동물의 뼈나 돌을 주재료로 쓰지만 이 작품에서는 현대를 대표하는 재료인 플라스틱과 데이터만으로도 대량 복제가 가능한 3D 프린팅 기술을 활용해 동시대적 해석을 더했다.

기술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는 요즘, 인간의 본질을 새롭게 인식하려는 시도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기술 덕에 그 어느 때보다도 국경이 희미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배타주의와 지역주의, 난민과 이주 문제는 세계적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인류의 기원과 이동성을 탐구해오면서 인류의 발전은 공존과 문화 혼종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내 신념은 더욱 확고해졌고,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통해 공존을 위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본다.

키아프 서울을 찾은 관객이 당신의 작품에서 어떤 것을 발견하길 바라나?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라는 질문은 비단 작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누구에게나 폭넓은 공감대를 띠고 있는 예술적 화두라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내가 던지는 이 질문에 관객들이 건넬 저마다의 대답,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될 우리 사회의 담화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