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와해되고 기존의 질서가 허물어지는 것. 내장과도 같은, 날것의 말에서 해방과 자유를 마주하는 일.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문학 세계 안에서 가능한 것들.

“리스펙토르의 책은 어떤 말로 설명하더라도 설명된 그것의 바깥에 있는 것 같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르 소개하기 전, 배수아 작가의 말을 빌려 미리 변명하고 싶다. 그를 적확히 소개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글 안에서 나는 자주 미끄러진다. 아니, 미끄러지는 것을 넘어 그 위에 발을 붙이고 서 있지도 못한다. 이리저리 파열되어 떠돌아다니는 언어들, 그 강렬한 매혹 앞에서 그저 말을 잃고 부유할 뿐이다.
“당신의 온몸으로 나를 들어라”(<아구아 비바> 중)



20세기 브라질 문학의 중심인물로 꼽히는 여성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배수아 작가의 번역으로 <달걀과 닭>이 한국에 소개된 이후, <G.H에 따른 수난>, <야생의 심장 가까이>, <별의 시간> 등의 소설이 출간되었고, 그렇게 리스펙토르는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매혹시켰다. 그의 문학을 소개할 때 흔히 쓰이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주의할 것. 리스펙토르는 문학이 아니다. 주술이다.” 여기서 추측할 수 있듯 그의 글은 명확한 논리나 서사구조에 기대지 않는다. ‘나 없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혹은 그렇게 진정한 ‘나’로 나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중얼거릴 뿐이다.
“이 언어는 여성이다”

“자신과의 분리, 과잉된 개인을 벗어던지는 일은 상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실하지만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존재함을 의미한다. 피부를 벗겨내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통증도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조금씩 한 겹 한 겹 개성의 특질들을 발라내는 것이다. 나를 특징짓는 것은 결국 타인들에게 일차적으로 보이는 내 모습이며 내가 피상적으로 인식하는 나이다. 바퀴벌레가 모든 바퀴벌레의 바퀴벌레임을 깨달은 그 순간처럼, 나는 내 안에서 모든 여자의 여자를 발견하기를 원한다.” (<G.H에 따른 수난>)
배수아 작가는 <G.H에 따른 수난>을 번역하며 ‘이 언어는 여성이다’라고 말했다. <G.H에 따른 수난>은 한 여성의 의식이 무너지고,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조차 의심하게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사건을 묘사하거나 서사를 구축하지 않은 채, 화자의 의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여성은 오래전부터 침묵, 즉 자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과 자연스럽고 내밀하게 연관돼 있”었다고 말했다. 동시에 시몬 드 보부아르는 말한다.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라고. 자기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갈 수 있는 능력에 반해, 나의 존재와 무관하게 쉽게 타자화된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단절과 결핍 더 나아가 고통을 겪기도 한다. 명명되고 불려지는 것. 인식되고 고착화되는 것. 가끔은 그 모든 것이 내가 아닐까 믿게 되는 것. 이 모든 것 너머로 리스펙토르가 언어 자체를 의심하고 존재의 본질을 깊숙이 파고들 때, 우리는 해방을 경험할 수 있다. 시선과 규범. 역할과 젠더. 나를 설명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이 순간 나는 무엇인가? 어둡고 습한 새벽에 건조하게 메아리치는 타자기다”(<아구아 비바> 중)

늦은 밤, 타자기 앞에서 하염없이 자신을, 자신을 둘러싼 것을, 하나의 세계를 토해내는 여자를 생각한다. ‘글쓰기는 저주’라고 쓴 이후 ‘글쓰기는 저주이긴 하나 구원하는 저주’라고 다시 말했던, 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를 말이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산문 <세상의 발견>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는 짧은 순간 보이기 위해 만들어진 사물처럼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그것을 나르시시즘이라 부르겠지만, 나는 ‘존재하는 기쁨’이라 부르겠다. 외형에서 내면의 울림을 찾는 기쁨. 물론 나 자신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나는 다만 존재한다.” 그가 생애를 바쳐 쓴 글 안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 리스펙토르가 뿜어내는 그 기묘한 에너지 안에서, 언어의 잔해 속에서 마음껏 길을 잃고 헤매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