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청춘이란 찰나에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책, 영화, 음악,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5인이 저마다의 생에서 건져 올린,
불완전하게 반짝이는 청춘의 조각들.

아이스에이지(Iceage)

Elias Ronnenfelt’s solo album <Heavy Glory>

2019년 여름이었다. 친구들과 찾은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은 기대 이상으로 즐겁고… 추웠다. 게다가 첫날과 달리 둘째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번 무대에 우리가 춤을 추지 않으면 그만 서울로 돌아가자 마음먹었고, 그런 우리 앞에 코펜하겐에서 온 낯선 밴드가 나타났다. 귀를 찌르는 듯한 거친 기타 소리로 시작된 그들의 음악은 아이스에이지라는 이름처럼 차갑고 매서웠다. 추운 날에 추운 음악이라니, 그런데 이상하게 좋았다. 점점 더 굵어지는 빗방울도, 미끄러운 무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은 거침없이 자신들의 음악을 쏟아냈다. 오히려 마치 이 상황이 자신들의 무대를 망치러 온 구원자라도 되는 양 반갑게 맞이했다. 심지어 보컬 엘리아스 벤데르 뢴넨펠트(Elias Bender Rønnenfelt)는 임시로 덮어둔 비닐을 온몸에 휘감는 퍼포먼스 아닌 퍼포먼스까지 보여줬다. 그렇게 어느샌가 나는 그들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날카롭고 위험하고(이기 팝 역시 이들에 대해 위험한 소리를 내는 그룹이라 평했다) 거칠 것 없는 이들의 음악과 태도에 완벽히 빠져든 날이었다. 그날 이후 내게 가장 매혹적인 청춘의 음악은 ‘아이스에이지’로 박제되어 있다.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

젊음의 특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꿈꾸고, 절망하고, 무너지고, 그럼에도 다시 갈망하는 것. 영화 <더 폴: 디렉터스 컷>을 보며, 이 영화를 만들고 절망하며 끝내 영화로운 순간을 맞이한 감독 타셈 싱의 이야기를 들으며 ‘젊음’을 떠올렸다.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삶과 죽음 사이에서 스턴트맨 ‘로이’와 소녀 ‘알렉산드리아’가 진정으로 꿈꾼 것은 무엇일까. 28년 동안 이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17년간 영화 속 장소를 찾아다닌 감독이 그토록 바라던 영화는 어떤 것일까. 2시간 남짓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환상, 나의 젊음, 나의 절망과 갈망… 이런 생각들을 품었다. 2008년 첫 개봉 당시 영화의 부제는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이었다. 17년 만에 다시 열린 그 환상의 문을 통해 잠시 어딘가로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김진아 감독의 영화와 그의 말

1992년, 윤금이 피살 사건으로 촉발된 시위에 참여하며 스무 살의 한 청년은 엄청난 부채감을 느꼈다. “저를 포함한 또래 여학생들을 고통스럽게 한 건 피해자의 시신 사진이 공개된 일이에요. 대의를 위해 한 여성 피해자가 다시 한번 희생당하는 상황이 용납되지 않았고, 언젠간 이 이야기를 윤리적인 방식으로 꺼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이후 긴 시간이 흘렀지만, 청년은 그 다짐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VR 작품인 미군 위안부 3부작 <동두천> <소요산> <아메리칸 타운>을 완성해냈다. 김진아 감독을 만난 건 이 중 두 번째 작품 <소요산>이 공개된 이후였다. 2022년이었으니, 시위에 참여한 청년이 중년이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대화하는 내내 어쩐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스무 살의 청년 김진아인 것만 같았다. 왜 세상에는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이 많은지 묻는, 그래서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라 생각한 걸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고 전복하려는 청년. 그와 나눈 대화를 복기하며 확신했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흘러도 그는 언제나 저항하는 청년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기개가 필요한 순간마다 그의 말을 떠올릴 것이다.

배우 오경화 젠더프리
ⓒ배준선

배우 오경화

“제가 진짜로… 그냥 들이받는 애거든요. 소처럼. 태몽도 소 꿈인데, 아무튼 들이받아요.” 이보다 가열차고 담대할 수 있을까 싶지만, “지금 생각하면 어휴, 다시는 못 할 것 같아요.(웃음)”라고 말하는 사람. 누군가는 티 내고 싶지 않아 애써 숨기는 어색함, 부끄러움, 자신 없음, 그렇지만 하고 싶은 그 모든 마음을 포장하지 않고 툭 꺼내 보이는 오경화 배우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진심으로 동생의 꿈을 끌어안고 응원해주던 정자 언니(그가 드라마 <정년이>에서 맡은 역할)처럼 배우 오경화의 다음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제가 바라는 세상은 편협하지 않은 세상이에요. ‘각자의 울타리에서 나와도 안 다쳐, 다 같이 잘 살 수 있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게 제가 작품을 통해 하고 싶은 소통인 것 같아요.” 이 찬란한 마음이 좋은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생동하길, 긴 팔과 다리를 시원하게 내저으며 나아가길 바라게 되었다. 근래에 마주한 가장 반짝이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