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이면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쳐내는 일.
나아가 그 목소리가 더 많은 삶 속에 파고들어 번져나가게 하는 것. 제78회 칸영화제에서 발견한 변화와 희망의 조각들.



그는 이번 수상으로 세계 3대 영화제 최고상을 석권한 최초의 아시아 감독이 되었다.

처음 찾아간 칸영화제는 기대만큼 활기가 넘쳤다. 세계 곳곳에서 온 감독과 배우, 관객, 영화 관계자로 하루 종일 북적이는 현장이 영화가 받는 사랑을 뜨겁게 표출하고 있었다. 칸에 왔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실감하게 한 건 거리 곳곳을 채운 올해의 포스터였다. 연인이 활짝 웃으며 서로를 끌어안은 모습. 1966년 황금종려상 수상작 <남과 여>에 담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포옹’ 장면이었다. 사랑으로 이어진 두 인물의 얼굴을 모두 보여주기 위해, 칸영화제는 포옹 장면을 각각 다른 앵글로 포착한 두 버전의 포스터를 공개했다. 그리고 이 말을 덧붙였다. “서로를 분리하고 단절하며 정복하려는 이 시대에 칸영화제는 통합을 원한다. 몸과 마음, 영혼을 하나로 모으고자 한다.”
공존과 연대를 지향하고, 진정성을 강조하는 포스터의 의미는 칸을 누비며 느낀 올해의 경향과도 맞닿아 있었다.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슈를 심사위원장으로 선정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레타 거윅에 이어 2년 연속으로 여성 심사위원장을 선임한 칸영화제는 줄리엣 비노슈가 기교를 추구하지 않고, 순간의 감정과 진실을 믿으며 활약해온 점에 주목했다. 시대와 호흡하는 행보를 이어온 그는 역대 여섯 번째 한국 출신 심사위원인 홍상수 감독 등과 함께 올해의 수상작을 가렸다.



영화계의 침체 속에서도 올해 칸영화제에는 장편영화 2천9백9편이 출품되며 역대 최다 기록을 세웠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22편 중 가장 먼저 만난 영화는 아리 애스터의 블랙코 미디 <에딩턴>. 호아킨 피닉스, 페드로 파스칼, 엠마 스톤을 비롯한 할리우드 배우들이 레드 카펫에 등장한 순간의 열기는 칸에 머무르던 기간 중 가장 강렬했다. 한편, 웨스 앤더슨 의 신작 <페니키안 스킴>은 거물 사업가가 거대한 프로젝트에 돌입하며 시작되는 이야기가 흥미를 자아냈다. 프리미어 상영 전, 한국 매체 단독으로 만난 배우 미아 트리플턴은 자신이 표현한 주인공의 딸 ‘리즐’에 대해 “그의 여정은 결국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는 힌트를 주기도 했다. 장 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를 만든 과정을 다룬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신작 <누벨바그>를 관람한 시간은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영화인이 발휘하는 열정을 가늠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저명한 감독의 작품보다 인상적인 건 다수의 상영작에서 느껴진 ‘사회적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가장 명징하게 담긴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잇 워스 저스트 언 액시던트>가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영예를 안았다. 감옥에서 자신을 고문했다고 믿는 남자와 맞닥뜨린 이란인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 작품은 실제 반정부 시위를 하다가 수감됐던 감독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정부의 탄압에 맞서며 영화제작과 해외여행 금지 처분을 받았던 감독에게 이번 수상은 15년 만에 참석한 국제영화제에서 얻은 성과였다. 자국의 자유를 위해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한 감독의 수상 소감은 영화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했다.
한편, 지난해 주요한 화두로 꼽힌 ‘여성 서사’는 올해도 돋보였다. 사회적 약자의 이야기를 꾸준히 다뤄온 다르덴 형제에게 각본상을 안긴 <영 마더스>는 보호 센터에 머무는 5명의 10대 미혼모를 조명하며 모성과 자매애, 여성으로서의 삶을 폭넓게 다뤘다. 림 랜지의 <다이, 마이 러브>는 내면의 악마와 싸우는 젊은 어머니의 복잡한 심리를 그렸는데, 극단적인 감정을 분출하는 제니퍼 로런스의 연기가 진한 인상을 남겼다. <티탄>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쥘리아 뒤쿠르노 감독은 신작 <알파>에서 사춘기의 혼란을 겪는 13세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상을 건네받은 그는 소감을 밝히며 칸영화제가 전하는 ‘통합’의 메시지에 힘을 실어주었다.


올해 가장 긴 기립박수를 받은 영화는 요아킴 트리에르의 <센티멘털 밸류>였다. 올해로 경쟁부문에 세 번째로 초청된 감독은 이번 신작을 통해 20분에 가까운 찬사를 받으며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쥐었다. 영화는 과거 명성을 누린 한 감독이 복귀작을 준비하며 소원해진 두 딸과 관계를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가족사와 예술혼을 섬세하게 엮어낸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겼고, ‘예술을 통한 치유’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뤘다는 호평을 받았다. 작품의 서사도, 이를 스크린으로 마주한 관객의 반응도 영화의 힘을 다시금 느끼게 했다.
동아시아 작품 중에서는 중국의 비간 감독이 연출한 <레저렉션>이 특별상을 수상했고, 일본에서는 하야카와 지에 감독의 <르누아르>를 비롯한 6편의 장편영화가 출품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장편영화가 12년 만에 한 편도 초대받지 못했다는 소식은 아쉬움을 더했다. 하지만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경>이 비평가주간 단편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허가영 감독의 <첫여름>은 ‘라 시네프’ 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의 위기’라는 말이 수면 위로 떠오른 가운데, 허가영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한국 영화는 아직 뜨겁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그 생기는 칸 현지에서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뤼미에르 대극장의 입장 줄에 서서 한국 영화에 대해 대화하는 젊은이들, 한국 마켓에 관심을 보이는 해외 영화 관계자와의 만남은 내년 칸에서 우리나라 작품을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하게 했다.
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이면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쳐내는 일. 나아가 그 목소리가 더 많은 삶 속에 파고들어 번져나가게 하는 것. 칸의 극장을 나설 때마다 감상을 활발히 나누는 관객들의 모습을 보며 영화의 굳건한 영향력을 체감할 수 있었다. 올해 황금종려상을 시상한 케이트 블란쳇의 말처럼 “영화와 예술은 도발적이며 어둠을 용서와 희망,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마음으로 확인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