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은 한 사람의 마음속 어둠을, 삶의 그늘을 밝혀주는 힘이 있다.
캔버스에 스며든 광채, 음악의 반짝이는 선율, 영화와 책에 담긴 눈부신 서사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각자의 일상에서 그러모은 빛의 아름다운 면면.

스기모토 히로시 SUGIMOTO HIROSHI

스기모토 히로시 SUGIMOTO HIROSHI
Hiroshi Sugimoto, ‘U.A. Playhouse, New York’, Gelatin silver print, 1978.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lery Koyanagi

어떤 사진을 마주할 때면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던 바로 그 순간을 단번에 상상해보게 된다.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에서 스기모토 히로시의 연작 ‘극장들(Theaters)’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랬다. 아무도 찾지 않는 허름한 극장 안,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얀 섬광. 작가는 어느 날 문득 한 편의 영화를 한 장의 사진으로 촬영한다는 가정을 해본다.
이를 실험하기 위해 1976년부터 유럽과 미국의 오래된 극장들을 찾아가 같은 방식, 같은 구도로 영화가 상영되는 전 과정을 장노출로 기록했다. 영화가 시작될 때 셔터를 열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셔터를 닫았다. 초당 24 프레임.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되고 끝나는 동안 스크린을 스쳐간 프레임의 수는 10만 장을 거뜬히 넘긴다. 그렇게 수많은 장면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이 이토록 명료하고도 새하얀 빛이라니. 이야기의 총합은 결국 한 줄기 빛으로 응축될 수 있다는 걸, 그 빛에서 무수한 이야기가 새롭게 태어나고 우리는 그 안에서 각자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는 걸 사진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안유진 피처 에디터

마이클 리키오 밍 히 호 MICHAEL RIKIO MING HEE HO

마이클 리키오 밍 히 호 MICHAEL RIKIO MING HEE HO
Michael Rikio Ming Hee Ho, ‘and the sum of its parts’, Acrylic on cotton canvas panel, 33.5×28cm, 2025.
Courtesy of the Artist and sangheeut

지난 4월의 아트부산, 크고 화려한 작품으로 기세를 떨치는 많은 갤러리 사이에서 상히읗 갤러리가 마련한 솔로 부스는 어쩐지 담소했다. 가로세로 30cm 내외의 작은 작품들이 부유하듯 듬성듬성 놓인 이 부스는 존재를 외치기보다 조용하게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듯한 태도로 자리하고 있었고, 나는 그 은은한 존재감에 이끌려 작가 마이클 리키오 밍 히 호의 그림들을 살피게 됐다. 어디든 다른 곳에 있고 싶은 막연한 갈망을 담은 이상화된 풍경 위에 늦은 밤 보내지 못한 문자메시지, 끝내 전해지지 않은 편지, 너무 작게 속삭여 아무도 듣지 못한 작가의 문장이 더해진 작품들은 보이는 시이자 읽히는 그림이었다. 불안정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슬픔과 환멸을 조심스럽게 감싸안는 작가의 방식은 작지만 깊은 빛을 품고 있었다. 이에 매료되어 한참을 들여다보았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전시의 제목을 알게 됐다. <내가 모는 차의 이름은 다정함. 너는 그 옆자리에 있고, 우리는 천천히 길을 달리며 엽서를 보내고 사랑의 편지를 쓸 거야>. 강예솔 피처 수석 에디터

루카스 아루다 LUCAS ARRUDA

3년 전, 바젤 바이엘러 재단 미술관에서 루카스 아루다의 그림을 처음 마주했다. 수평선 너머 번지는 빛, 안개처럼 퍼지는 색채, 미묘한 명암이 만드는 깊은 침묵과 고요가 가로세로 40cm 안팎의 소형 정사각 캔버스 안에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고도로 정제한 시 같기도, 입 밖으로 소리내지 않는 기도문 같기도 하던 그 풍경 앞에 오래 머물렀다.
물결, 구름, 안개… 나를 둘러싼 세계가 실은 이런 빛과 시간의 아름다운 레이어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산다. 루카스 아루다의 그림으로 새롭게 다시 배운다. 유선애 피처 디렉터

빌헬름 함메르쇠이 VILHELM HAMMERSHØI

빌헬름 함메르쇠이 VILHELM HAMMERSHØI
Vilhelm Hammershøi, ‘Interior with an Easel, Bredgade 25’, Oil on canvas, 78.7×70.5cm, 1912. Courtesy of the Artist

지난 연말 코펜하겐의 한 미술관을 찾아간 날, 내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은 작품이 있었다. 햇빛이 얕게 스며든 회색의 공간, 등을 돌린 채 홀로 앉아 있는 여성을 담아낸 회화. 이를 탄생시킨 미술가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덴마크에서 활동한 빌헬름 함메르쇠이였다. 그는 생전 코펜하겐 스트랑아데(Strangade)에 위치한 집에 거주하며 실내 풍경과 아내의 뒷모습을 주로 표현했다. 차분한 색조, 절제된 묘사로 그려낸 정적인 장면들은 다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온, 고독, 여유로움, 우울. 작은 방의 고요가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을 떠올리다 보니, 외부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목소리에 자연스레 귀 기울이게 되었다. 작품 앞에 한동안 머무르며 내 마음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고요’는 나 자신을 살피는 계기가 되어준다는 것을, 그 경험이 삶을 스스로 빛나게 할 힘을 지녔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김선희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