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은 한 사람의 마음속 어둠을, 삶의 그늘을 밝혀주는 힘이 있다.
캔버스에 스며든 광채, 음악의 반짝이는 선율, 영화와 책에 담긴 눈부신 서사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각자의 일상에서 그러모은 빛의 아름다운 면면.
로드 <Virgin>

‘Meet me in the park. Tonight 7 p.m. – x x’ 갑작스러운 예고와 함께 뉴욕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로드(Lorde)가 등장했다. 경찰의 제재로 오후 7시가 아닌, 9시에 시작된 게릴라 공연. 비키니 톱에 흰 셔츠를 걸친 로드는 4년 만에 선보이는 싱글 ‘What Was That’을 틀고 마구잡이로 춤을 췄다. 정말 그랬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아니하고 닥치는 대로 마구 하는 춤 혹은 행위 어쩌면 절규에 가까운 몸짓을 보고 또 봤다. 한없이 자유로워서 빛이 나는 그가, 그의 새 음악이 반가웠다. 그리고 두 달 뒤 ‘What Was That’을 포함해 11곡을 채운 정규 앨범 <Virgin>이 발매되었을 때, 비로소 그날의 퍼포먼스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알게 됐다. 그는 이번 앨범의 메시지를 ‘해방’이라 말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기 자신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 그게 모두에게 중요하다고 믿는다며. 강예솔 피처 수석 에디터
숨비 <To. My Lover>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를 굳게 믿는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사랑에 대한 궁금증을 줄곧 품어왔다. 그러다 숨비의 첫 번째 EP <To. My Lover>를 들었다. 거칠면서도 맑은 톤으로, 무심한 듯 섬세히 불러낸 5곡은 사랑의 다양한 결을 펼쳐내고 있었다. 설렘, 연민, 슬픔, 그리움 등을 말하던 그는 이내 “나는 너의 전체를 다 사랑하는 것 같다”라고 노래했다. 한 사람의 전부를 사랑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하다가 마지막 곡이 흐를 때, 록 스타일의 트랙 위로 들려오는 목소리가 강한 여운을 남겼다. “짧은 인연이 너의 두 눈을 슬프게 만들었지만, 그녀와의 커다란 사랑은 영원할 거야.” 수시로 변하는 감정, 유한한 삶을 초월해 오래도록 빛날 사랑의 힘이 느껴졌다. 더 많이, 기꺼이 사랑하고 싶다는 용기가 솟았다. 이 곡을 선공개하며 숨비가 남긴 말처럼 “모든 종류의 사랑을 응원”하면서 말이다. 김선희 피처 에디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

빛을 음표로 옮겨놓은 음악들이 있다. 그 빛의 음표들은 풍경을 그려낸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c단조, Op.18’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사위는 적막하고 어두운 해변에 서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이 된다. 정적 속에서 번지는 서정적이고 투명한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위에 목관악기와 현악기의 부드러운 선율이 유영하듯 흐르면 이내 새벽 2시, 수면 아래를 천천히 유영하는 별빛을 눈앞에 두게 되는 것이다. 동시에 생각한다. 위대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한 예술가가 이룩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해 생각한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곡을 작곡하며 음악가로서 자신의 고통과 회복의 역사를 담고자 했다. 이 곡은 무너졌던 인간이 음악을 통해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이며 그 여정이 찬란히 눈부시다. 그리고 위대하다. 유선애 피처 디렉터
막스 리히터 ‘On the Nature of Daylight’

사방이 차단된 암실의 문이 열리고, 그 틈새로 한 줄기의 미세한 빛이 아주 서서히 들어오는 순간을 선율로 옮기면 이런 곡이 탄생하지 않을까 싶다. 독일계 영국 작곡가 막스 리히터는 영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2003년 전쟁과 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아 앨범 <The Blue Notebooks>를 완성했다. 어둠과 혼돈으로 뒤덮인 전시 상황에서 리히터가 떠올린 건 한낮의 빛이 품은 부드러운 감촉과 온기였다. 최소한의 음악적 재료만으로 한낮의 빛을 상상하며 만든 것으로 낮게 깔린 첼로 현이 일정한 코드를 반복하며 곡의 기반을 이루고, 그 위에 바이올린 선율이 점진적으로 더해진다. 단순한 음계가 미세하게 반복되고 변주되는 이 곡을 듣다 보면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빛의 일렁임을, 점차 퍼져나가는 빛의 흐름을 눈으로 그려보게 된다. 이 곡이 이토록 오래도록 사랑받은 건 누구나 마음속에 그런 오후의 빛을 하나쯤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안유진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