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사진가 마티아 발사미니(Mattia Balsamini)에게 어둠은 하나의 피난처이자 사유의 공간이다.
‘어둠을 보호하라’는 외침을 담은 프로젝트 <Protege Noctem>은 지구를 뒤덮은 인공조명으로 밤하늘을 잃어가는 시대,
빛의 명징함에 밀려난 어둠의 가능성을 복원하려는 이들의 조용한 연대이자 저항의 기록이다.

이 지역은 국제다크스카이협회가 지정한 밤하늘 보호구역이자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이다.
낮은 인구밀도와 엄격한 조명 규제로 인공조명을 최소화한 채 어둠이 보존되고 있다.
<Protege Noctem>은 빛 공해라는 환경적 화두에서 출발했지만, 매우 서사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전개하는 프로젝트다. 작업을 처음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었나?
이 프로젝트는 빛 공해 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중요한 기조로 다루지만, 그 근간에는 어둠에 대한 오랜 관심이 자리한다. 작업자로서 오랜 시간 ‘반그림자(penumbra)’라는 개념을 탐구해왔다. 천문학적으로는 밝음과 어둠 사이에 생기는 그림자이자 미묘한 경계의 상태를 뜻하는데, 인공조명으로 인해 전 세계 곳곳에서 완전한 어둠이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반그림자처럼 경계 위에 놓인 상태가 우리가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이를 계기로 밤이 소멸할 때 인간이 겪게 될 생태적 위기를 조명하면서도, 어둠이 품은 상징적인 힘을 한 프레임에 담아낼 수 있는 프로젝트를 구상하게 되었다.

한밤중 자동차 브레이크등이 계곡의 바위를 붉게 물들인다.
이곳은 빛 공해가 거의 없는 청정 하늘과 맑은 공기 덕분에 천문 애호가와 사진가들에게 숨겨진 성지로 알려져 있다.
이 프로젝트는 빛 공해가 인류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다. 연구 과정에서 발견한 인공조명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무엇이고, 그 발견이 프로젝트의 방향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연구 과정에서 인공조명으로 인한 피해가 그 규모와 정도 면에서 예상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미 전 세계 인구의 80% 이상이 은하수를 전혀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하늘 아래 살고 있고, 상하이를 비롯한 일부 대도시에서는 95%에 달하는 별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상태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인공조명이 인간과 비인간 생명에 미치는 생리적인 영향이다. 빛 공해는 생체리듬을 교란하고, 각종 암과 우울증, 인지 장애 같은 정신 질환의 발병률을 높이는 요인이 되고 있다. 연구를 거듭하며 작업을 바라보는 내 관점 역시 변화했다. 단순히 미학적 사유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고, 어둠의 서정성을 조명하면서도 빛 공해가 초래하는 환경적 위기를 작업 안에 나란히 녹여내는 방향으로 접근하게 됐다.

환경운동가들은 밤이 되면 상점 조명과 LED 광고판만큼은 불을 끄자고 촉구하지만, 이들의 외침은 아직도 외면받고 있다.
밤의 소멸을 주제로 삼은 만큼, 보이지 않는 대상을 가시화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을 듯하다. 밤과 어둠이라는 무형의 대상을 어떻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나?
빛 공해의 심각성을 직관적으로 전달하거나 선동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떤 미묘한 정동이나 분위기 자체를 시각화하는 데 집중했다. 어둠이 결여된 환경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체감하는 몸의 변화나 심리적 피로감 같은 것들 말이다. 이는 직접적으로 사진에 담기 어렵기에 은유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계곡 너머로 반짝이는 한 줄기의 LED 조명, 어두운 방에서 깜박이는 스크린, 도시의 불빛에 물든 채 희미하게 빛나는 숲. 이런 장면들이 인공적인 빛으로 인해 우리가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은유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어둠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심리적 안정이나 내면의 고요함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불러일으킬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 상황을 포착한 흑백사진, 위성으로 촬영한 이미지와 정물 사진 등 다양한 형식을 넘나들며 작업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으로 어떤 효과를 기대했나?
프로젝트 초기부터 이 주제를 결코 단일한 형식으로 담아낼 수 없으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빛의 소실이라는 주제는 생태적, 기술적, 문화적 차원에서 매우 복합적인 맥락을 담고 있기에 형식 면에서 서로 충돌할지라도 이를 대변해주는 복수의 목소리가 필요할 거라고 봤다. 독일과 영국, 스위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를 오가며 빛 공해로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 주민들의 모습을 기록했고, 여기에 위성으로 촬영한 이미지와 천체 사진가들에게 의뢰해 수집한 이미지를 더했다. 만만찮은 도전이었지만, 각각이 독립적으로 의미를 전하면서도 긴장감 속에서 공존할 때 주제의 복합성을 더욱 섬세하게 드러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서로 다른 형식을 지닌 이미지들을 하나의 작업으로 모으는 기준은 무엇이었나?
이질적인 형식을 하나로 이어준 건 감정의 결이다. 각 이미지가 품은 빛의 질감, 정서적 밀도, 느린 리듬감 같은 요소가 작업 전체에 공통된 정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정조란 보는 이들을 멈춰 서게 만드는, 모호하고도 의미심장한 분위기에 가깝다. 이를 통해 명징한 해답 대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자 했다.

그중에는 의도에 따라 선택적으로 연출한 이미지도 포함되어 있으며, 당신의 작업은 종종 ‘연출된 다큐멘터리’라는 방식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을 택한 연유가 있나?
연출된 다큐멘터리 방식은 허구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능동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으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시도였다. 수면 실험실에 직접 들어가보거나, 박쥐 구조센터를 찾아가거나, 어둠 속에 충분히 오래 머무르지 않는 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들을 프레임에 담았다. 몇몇 이미지는 분명 의도적으로 구성했지만, 이 프로젝트는 본질적으로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따른다. 이 작업을 통해 내가 바란 건 빛과 과학, 그리고 그것이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연약한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인간과 비인간 생명이 교차하는 지점에 시선을 머무르게 하는 일이었다.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놓치고 있던 진실의 깊이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매일 밤 이 같은 야행성 곤충이 수백만 마리씩 죽어간다.
저널리스트 라파엘레 파니차(Raffaele Panizza)를 비롯해 천문학자와 환경운동가, 지역 주민 등 여러 사람들과 연대해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타자의 시선을 경유하는 작업이 프로젝트에 어떤 확장을 가져다주었나?
이 프로젝트는 라파엘레와 내가 긴밀하게 협업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는 저널리스트다운 통찰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엮어내는 감각을 지녔고, 그 덕분에 천문학자와 생태학자, 과도한 조명 속에서 살아가는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를 하나의 서사로 엮어낼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이 많지만, 어느 날 누군가 밤하늘을 가리켜 ‘죽은 화면(dead screen)’ 같다고 말한 순간이 마음에 강렬하게 박혔다. 한때 별이 쏟아지는 극장 같던 우주가 이제는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 텅 빈 천장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놀라운 비유였다. 작업을 함께 한 사람들의 증언이 프로젝트에 밀도를 더해주었고, 이는 사진을 매개로 세상과 소통하려면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내 믿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어둠을 보호하라’라는 의미를 담은 프로젝트명은 보는 이들에게 즉각적인 행동을 촉구하는 긴급한 구호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다. 이 프로젝트는 조용한 저항의 메시지를 품고 있다. 온 세상이 밝기만 한 것, 눈에 보이는 것, 해독 가능한 것들에 집착할 때, 반대로 감춰진 것과 멈춰 있는 것, 불확실한 대상에 귀를 기울여보자고 이야기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어둠이란 내게 언제나 그런 장소다. 잠재된 무언가가 새로이 움트고, 친밀감이 피어나는 장소. 나이가 들면서 어둠이 내게 정서적 안식처가 되어준다는 것을 더욱 또렷이 깨달았고, 그 공간을 지키기 위해 나만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질 때면 마리는 홀로 집을 나선다.
“이 맑은 하늘은 언제나 내 안에 있어요. 늘 마음속에 떠 있어요.”
작업 전반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빛과 그림자 사이의 경계를 주요한 화두로 삼아온 듯하다. 사진을 통해 경계를 서성이며 당신은 무엇을 발견하나?
내게 빛과 어둠, 자연과 인공,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단순히 이분법적으로 대비를 이루는 구조가 아니라, 작업자로서 새로운 감각과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이때 사진은 그 경계를 그저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동원되는 도구라기보다, 오히려 불확실성 속에 머물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바라보려 하지 않는 태도가 해석과 감정의 여지를 너그러이 확장해준다고 본다. 이 때문에 사진가로서 언제나 명제나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방식에 이끌린다. 사진이 질문을 남길 때, 하나의 이미지가 철학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주 관측은 이제 별과 위성, 우주 폐기물이 뒤엉킨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자, 이와 동시에 하늘 위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시선 속에서 우리는 우주를, 우주는 우리를 응시한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가 당신에게 남긴 질문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떻게 사라져버린 하늘을 애도할 수 있을까? 별을 잊는다는 것은, 한때 시간과 공간과 신화를 구성했던 근원을 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의 기억과 문화 속에서 잊힌 존재를 되살리기 위해 사진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여전히 이 질문들에 대해 뚜렷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럴 필요 또한 없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이 질문들과 오래도록 관계를 맺는 일이자 정해진 답안에 쉽게 안주하지 않는 태도일 것이다. 경계에 머무르고, 불확실성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지속시키는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로부터 새로운 관점이 태어나고, 이해가 고정되지 않은 채 살아 있는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