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 조각, 회화, 미디어아트계에서 지금 가장 주목받는
4인의 젊은 작가를 만났다. 이미 자신의 세계를 명확하게 구축한
이들은 이제 더 깊고 단단하게 길을 확장하는 중이다.
이목하 LEE MOKA
화가, 그중에서도 인물의 초상을 그리는 화가. 작가 이목하의 길은 분명하다. 유채를 얇게 여러 번 쌓아 올리는 화풍을 정립한 이후 작가의 시선은 소재로 향했다. 그리고 현시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플랫폼인 인스타그램에서 수집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셀피에 자신의 이해와 해석을 더해 이목하만의 그림을 완성했다. 매체의 다양성이 넓어지는 흐름 속에서도 갈래 없이 굳건히 걸어온 단 하나의 길이자 정체성.


작업실이 무척 넓고 쾌적하네요. 층고도 꽤 높아 보이고요.
이전 작업실들이 굉장히 좁았어요. 3~4평도 있고, 심지어 더 작은 곳도 있었는데 그때 완성한 그림들이 분명 제 눈앞에서는 꽤 컸는데 전시 공간에 놓으니 작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형광등이 제아무리 밝게 느껴져도 생각보다 조도가 높지 않거든요.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흐린 그림들을 많이 그렸더라고요. 작품이 공간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때 작업실이 어항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럼 미리 넓고 높은 곳으로 가면 훨씬 성장 가능성이 있겠다 싶어서 천장이 높은 건물이 있을 법한 동네를 샅샅이 다녀 찾아낸 공간이에요.
공간의 크기만큼 눈에 띄는 게 벽에 규칙적으로 박아둔 못이에요. 이를 이젤 대신 쓰기도 한다고요?
이젤 없이도 자유롭게 큰 캔버스를 쓸 방법을 궁리하다 나온 방법이에요. 저렇게 일정한 간격으로 모눈처럼 해놓으면 어떤 크기의 그림이든 편하게 걸어두고 볼 수 있거든요. 큰 사이즈의 작업을 하려고 마음먹었을 때 해둔 장치예요.
어느 정도까지 큰 작업을 꿈꾸나요?
키우기 시작했을 땐 마냥 커지면 커질수록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키우려고 보니 전혀 다른 세계인 거예요. 캔버스의 형태나 크기가 확 달라지면 기술적으로 전혀 다른 일이 되어버려요. 1인분과 100인분 요리가 전혀 다른 조리법이 되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작게는 10호에서 최대 200호까지 넘나들다, 지 금은 120호 정도가 저한테 가장 적합한 사이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사이즈를 찾는 것도 작가의 방향성을 찾는 일 중 하나겠어요.
맞아요. 자신의 그리기 방식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사이즈가 있더라고요.
작품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물감을 기름에 희석해 얇게 여러 번 쌓아 올리는 기법과 인스타그램에서 수집한 사진을 그림의 소재로 가져오는 방식. 화풍과 소재 중 어떤 쪽이 먼저였나요?
기법을 구축한 게 먼저였어요. 화필이 일정 수준 이상 돼야 얼굴을 그리는 단순한 일이 특별함을 갖게 되더라고요. 회화라는 장르를 택한 이후 현대미술과 전통적인 그리기 본질에 집중된 것 둘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저라는 사람은 전통적인 방식을 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동시에 현대와 전통 어느 사이에 존재하긴 해야 한다, 하고 싶다는 욕망은 있었어요. 그래서 인스타그램이라는 가장 동시대적인 매체에서 그림의 소재를 가져오자 생각했어요.
그럼 먼저 정립된 화풍에 대한 질문부터 할게요. 유채를 굉장히 얇게 쌓아 올린 기법으로 인해 여러 겹의 색이 비쳐 보이는 듯합니다. 이 기법을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회화 작품의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요소 중 하나가 물감이라 생각하는데해요. 그래서 이를 최대한 잘 활용해보자 생각했어요. 물감이 투명하게 희석되어 여러 겹 쌓이면 속이 비쳐 보이면서, 여러 색이 한 번에 보이는 신비한 효과들이 있는데, 이를 제 그림에서도 잘 드러나게 하고 싶었던 거죠.
몇 번쯤 덧칠했을 때 붓을 놓게 되나요?
정해져 있진 않지만, 레이어 5~6개 정도를 쌓게 돼요. 처음에 소묘하듯이 모노톤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한 가지 색을 얇게 덮고, 또 한 번 그리고의 반복이에요. 그중 가장 긴 시간을 들이는 건 처음 모노톤으로 그릴 때고요. 첫 단계에 전체 80%의 시간을 쓰고, 이후 한 겹씩 색을 덧칠할 때마다 가속도가 붙어요. 만약 열흘을 그린다고 치면, 8~9일까지는 완성에서 거리가 멀다가 마지막 하루에 갑자기 완성으로 바뀌는 순간이 오는 거죠. 가속도가 엄청나게 붙었을 때 조만간 끝나겠구나 라는 확신이 들어요.
사이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 작품을 완성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나요?
보통 한 달 정도 걸렸어요. 그런데 긴 시간 동안 붙들고 있다 보니 모든 부분에 집착하게 되어 오히려 너무 손을 많이 대서 재미없고 따분한 그림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요즘은 쫄지 않고 2주 안에 그려보려고 시간을 줄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붓질을 하다 만나는 우연이 그 자체로 아름답게 완성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걸 그대로 남겨두려 하는 거죠.
이제 소재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갈게요.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무수한 이미지 중 유독 또래 여성들의 인물 사진에 사로잡힌 연유는 무엇인가요?
간혹 인스타그램이라는 플랫폼에 큰 의미를 두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에게 인스타그램은 이미지를 수집하는 가장 큰 창구일 뿐이고, 그보다 중요한 건 어떤 인물을 어떤 식으로 포착하느냐인 것 같아요. 또래 여성들을 그리는 건 제가 그 사람들이 올린 셀피에 숨겨져 있는 자기표현의 장치들을 같은 세대로서 해독할 수 있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고요.
그리고 싶은 사진을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 섭외를 진행하나요?
매우 정성스럽게 열심히 구애의 디엠을 보냅니다. 하하. 인스타그램에서 인물 사진 찾아서 허락을 구하는 게 쉽고 간단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제가 생각한 조건에 맞는 사진을 발견하는 게 쉽지는 않거든요. 저의 기법이 잘 드러날 수 있을 만한 빛의 정도, 인물의 얼굴이 얼마나 정확하게 나와 있느냐, 표정이 제가 의도하는 내용에 맞는지, 심지어 입고 있는 옷이나 사물이 방해가 되지 않는지 이런 걸 다 생각하다 보면 1년에 찾은 사진이 20장이 채 안 돼요. 그렇다 보니 허락이 간절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식으로 이미지를 활용하고 싶은지, 당신 얼굴의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를 자세히 적어 보내는 거죠. 작가로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는 거절도 많이 당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성공
률이 높아진 것 같아요.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더 유명해져야겠는데요.(웃음)
맞아요. 제가 유명해져야 하는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바로 그거예요. 거절당하고 싶지 않아서. 하하.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복잡미묘한 감정이 느껴집니다. 미소 짓는 얼굴에서 어쩐지 슬픔이 비춰지기도 하고, 또렷하게 응시하는 눈에서 왠지 불안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식으로요.
제 그림의 목적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데에 있지 않아요. 살면서 겪은 강렬했던 감정을 인스타그램에서 찾은 사진을 통해서 표현하는 게 저의 방식이에요. 그래서 원래 있던 그 사람의 감정을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고, 아니면 전혀 다른 내용을 주입하기도 해요. 해맑게 웃는 눈을 조금 더 촉촉하게 젖어 있는 것처럼 그린다든지, 아니면 조금 힘을 준 것처럼 그려서 경계하는 눈으로 만든다든지. 이런 식으로 저의 해석을 더하는 거죠. 그 덕에 다층적인 감정이 그림 안에서 나타나는 것 같아요.
자화상을 작업한 적도 있나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의 사진 역시 영감을 받는 이미지 중 하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얼굴을 그릴 때는 다양한 감정을 묘사하기가 어렵더라고요. 의도를 가지고 얼굴을 보면 애초에 품고 있던 감정은 휘발되잖아요. 뭔가를 읽을 수가 없는 거죠. 마치 남들은 쉽게 이해해도 내가 나를 알기는 어려운 것처럼요. 오랜 기간 제 얼굴만 바라보고 그리는 것도 좀 괴로워서(웃음) 잘 안 그립니다. 같은 이유로 가까운 사람들도 잘 안 그리는 편이에요. 제가 그의 삶이나 생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미 제 식대로 해석해서 보게 돼요. 얘는 이런 사람인데? 이런 분위기가 아닌데? 이런 잡생각이 들어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눈을 하고 있는 그림이 된 적이 많아서 이제는 잘 안 그려요.
2023년 아트바젤에서 매년 가장 주목할 만한 신진 작가 25인을 꼽는 ‘디스커버리스’에 선정되었고, 작년 11월에는 필립스 옥션에서 ‘난 나답지 않아’라는 작품이 예상 낙찰가보다 3배가량 높은 금액에 판매되며 화제를 모았어요. 수치적인 성과를 목표로 작업을 한 건 아니겠지만, 이러한 결과들이 작업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었을 것 같아요.
참 여러 생각이 들었죠. 갤러리에 소속되기 전에는 그림 가격에 제가 개입을 헸어요. 그러니까 제가 의도한 대로 책정되는 거죠. 그러다 갤러리 소속 작가가 된 이후 가격은 저와 분리되어 생성이 된다는 걸 알게 됐고, 그 사실이 압박감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어요. 가격이 그림의 성적처럼 느껴지기도 했거든요. 오르면 오를수록 과거에 정말 잘 나왔다 여겼던 나의 그림과 싸워야 하는 순간이 오는 거예요. 매겨진 값어치보다 훨씬 괜찮은 그림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렇게 과거의 그림에 휘둘리는 시간이 분명히 있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을 바꾸게 됐죠. 만드는 사람으로서 제 그림에 대한 가치 설정과 외부에서 설정된 금액을 분리해야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겠다 판단한 거죠. 또 해외 무대로 나가고 싶은 제 입장에서 작가로서 가치 설정을 다시 하게 해준 계기가 빨리 찾아온 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잠시 혼란했던 시간을 지나 지금은 작가로서 어떤 꿈을 꾸는 중인가요? 꿈꾸는 궁극의 전시가 있다면?
걸려 있는 모든 그림이 다 기억에 남는 전시를 치러보고 싶어요. 어떤 전시든 유독 마음에 드는 몇 점만 기억나게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만약 모든 그림이 다 기억난다면, 흐름이 잘 보이는 기획이 있었을 테고 또 그림마다 에너지가 빠지거나 다른 그림에 치이는 게 없었다는 거잖아요. 거기에 더해서 각 그림에 특별히 좋았던 부분이 생각날 정도라면, 그땐 정말 좋은 작가가 되었다고 스스로를 여기게 될 거 같아요. 말하고 보니 진짜 큰 꿈이네요.(웃음)
최근 장르나 매체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들이 많이 등장하는 흐름과는 반대로 회화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 깊었어요. 이 정체성은 계속해 유지해나갈 생각인가요?
간혹 아티스트라는 호칭에는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페인터’라는 정체성에는 분명한 확신이 있어요. 언젠가 미술 쪽에서 일하는 동료가 해준 얘기가 있는데, 페인터는 성적 지향성 같은 거래요. 그렇게 태어나서 다른 길을 갈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제가 가진 사고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모두 페인터를 지향점 삼아 가고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대부분의 미술가가 어릴 땐 다 회화로 시작을 해요. 그러다 설치, 영상, 미디어아트 등으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데 페인터들은 계속 그 자리에서 그림만 그려요. 그게 왤까 싶었는데, 질문이 무색해지는 그저 정체성이었던 거죠. 특히 저는 그중에서도 인물을 그리는 초상화가고요. 인물 외에 다른 작업도 조금씩 해봤는데, 느껴지는 힘이 약하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면서 혼란에 빠지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제게는 초상화가 아닌가 싶어요. 다른 곁가지 없이 한길로만 쭉 가는 거죠. (웃음)
그럼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사진을 소재로 하는 초상 시리즈 역시 지속하게 될까요? 더불어 그리는 인물의 영역이 넓어질 가능성도 있을까요?
나이가 들면 그리는 인물의 범주는 자연스레 넓어질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저랑 비슷한 사람만 보였는데, 가족이 생기고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더 많은 군상이 제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그렇게 인간에 대한 해독의 범위가 차츰 넓어지면 제 그림 속 인물들도 더 다양해질 거라 생각해요. 그림은 곧 저의 이해의 범위이기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