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 조각, 회화, 미디어아트계에서 지금 가장 주목받는
4인의 젊은 작가를 만났다. 이미 자신의 세계를 명확하게 구축한
이들은 이제 더 깊고 단단하게 길을 확장하는 중이다.
김을지로 ULJIRO KIM
‘어떤 대상이 3D로 표현하기 적합한가?’라는 질문은 ‘식물’이라는 존재로 이어졌고, 그럼 ‘식물을 어떻게 3D 이미지로 구현할 것인가?’라는 고민은 ‘디지털 환경 안에서 실제로 살아 숨 쉬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기’로 완성되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김을지로의 작업 안에서 식물은 재단되고, 조정되지 않은 채로 생장한다. 인간이 아닌 식물과 곤충의 관점을 상상하며 구축한, 김을지로만의 3D 세계.

사진: 전석현, LED 패널 제작 및 설치: 트리엠


식물과 3D 이미지. 전혀 다른 영역의 두 존재에 유사성이 있음을 어떻게 발견하게 된 건가요? 식물의 생장 방식이 3D 이미지의 알고리즘과 닮았다고 말한 바 있으며, 이 관점을 기반으로 3D 모델링 프로그램이나 3D 애니메이션, 증강현실(AR) 등의 미디어 작업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식물이 먼저였는지, 3D가 먼저였는지 모르겠어요. 굉장히 비슷한 시점부터 두 영역에 대한 관심이 커졌거든요. 본격적으로 식물과 3D의 연결성이 깊어진 건 2023년에 했던 개인전 <옮겨심기 (potting)>부터였어요. 3D로 전시를 기획해보려니 ‘어떤 대상이 3D로 표현하기 적합한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더라고요. 고민의 과정에서 식물이 지극히 자연을 표상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기계처럼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생각에 이르렀고요. 당시 개인전에서 다뤘던 건 실내 식물이었는데, 사람들이 식물을 다룰 때 의도대로 되지 않는 것임에도 자신의 시선에 맞춰서 형태를 조정하려는 모습이 미디어 매체에서 3D를 활용해 이미지를 과하게 아름답거나 매끈하게 만드는 과정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어요.
생물의 생태에 관한 깊은 탐색을 전제로 하는 작업을 선보여온 만큼, 본격적인 창작에 들어가기에 앞서 조사와 탐구의 비중도 클 것 같습니다.
식물의 형태를 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리서치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해요. 한편으론 리서치를 너무 많이 하면 오히려 작업이 어떤 존재의 모사를 위한 부차적인 단계가 될 것 같아 조심하는 부분도 있고요. 그래서 리서치를 할 때 주제가 되는 식물의 생태에 기인한 구조적인 요소에 집중하고, 자연 환경을 고스란히 반영하기보다 저의 주관적인 생각과 감상을 더해 대상의 크기나 패턴, 움직임을 비틀어 표현하는 방식으로 창작을 해나가요. 또 조사한 것을 작업 단계와 연결 지어보기도 해요. 3D 작업 절차가 꽤 복잡한데요. 모델링하고, 애니메이션 넣고, 리깅을 하고, 렌더링하고, 세팅하고, 익스포트 하기 등. 저는 매 단계에서 ‘지금 하는 절차가 식물의 생장 과정 중 어떤 부분과 연결될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예를 들어 서치 단계는 ‘밭 갈기’, 모델링에 반영할 재질(material)을 제작할 때는 ‘교잡하기’로 이어보면서 작업의 개연성을 찾아내는 거죠.
개연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나 관심 있게 지켜본 부분이 있다면?
갈수록 식물과 디지털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강해져요. 3D를 하면서 재미있었던 게 원형이 없다는 거거든요. 제한 없이 다양한 유형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디지털 매체의 특징 중 하나인데요. 살펴보면 식물도 비슷해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하나의 개체인지, 혹은 언제 죽었다 살아났는지, 지난겨울에 살았던 애가 올봄에 핀 애랑 같은 애인지 정확히 알 수 없잖아요. 단일한 객체로 인지되는 인간이나 동물과는 다른 맥락을 지녔다는 점에서 또 닮은 점이 있구나 싶었어요.
3D 그래픽으로 구현한 이미지는 때때로 지나치게 매끈하게 보여지는 데에 반해, 작품 전반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이 주요한 특징입니다. 화면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나요?
이를 테면 만들어낸 모델링에 움직임을 주려고 할 때 저는 ‘A를 3초 동안 축으로 10만큼 옮긴다’ 이런 식으로 키 프레임을 찍지 않아요. ‘A에게 유연한 속성을 부여하고, 10만큼의 바람을 불게 만든다’라고 요청해요. 표면에 움직임을 주는 게 아니라, 외부 자극을 주는 거죠. 그게 식물을 3D로 표현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방식이고, 그래서 생명력이 감지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한편 실사에 가까운 디테일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이 그저 사실적으로만 읽히지 않도록 이질적인 요소를 섞거나, 구조를 비틀거나, 3D 특유의 픽셀화된 질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작업 방식 또한 인상적입니다.
픽셀화된 이미지가 재미있는 게 되게 모순적이에요. 그러니까 노이즈는 연산의 초과나 오류에서 발생한 부산물인데, 막상 파편화된 노이즈의 작은 점들을 선명히 보기 위해서는 화질이 좋아야 하거든요. 그 지점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리고 ‘노이즈 낀 게 왜 이렇게 좋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은 ‘너무나 치열하게 느껴져서’예요. 무척 작은 것을 현미경으로 최대치로 확대했을 때도, 우주에서 가장먼 곳을 최대로 당겨서 볼 때도 노이즈가 있어요. 그러니까 노이즈가 낀 이미지라는 게 기술에 있어서 미달이 아니라, 최대치를 구현하기 위해 투쟁한 뒤에 남은 결과라 생각해요.

사진: 전석현, LED 패널 제작 및 설치: 트리엠
꾸준히 주목해온 식물과 3D의 접점은 현재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단체전 <젊은 모색 2025: 지금, 여기>에서 선보인 ‘시밀리아 시밀리부스 쿠란투르’를 포함한 3개의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를 구상하던 당시 품고 있던 질문은 무엇이었나요?
개인전에서 본래의 형태와 생장 방식을 벗어나 인간의 관점에서 조정되는 실내 식물을 다뤘다면, 이번에는 ‘난초’를 주제로 작업했어요. 난초의 독특한 생존 방식에 3D 이미지의 존재 양상을 포개어 세 가지 미디어 인스톨레이션으로 선보이는 시도를 한 거죠. 난초는 번식을 위해 수분 매개자인 곤충을 매혹시킬 수 있는 형태로 진화해왔어요. 그런데 난초 시장이 커지면서 인간이 본래의 생장 사이클과는 무관하게 아름다워 보이는 부분만 가져다 유전형질을 변화시켜온 거예요. 그럼 ‘이 과정이 난초에게 비극인가?’라는 질문을 했을 때, 어쩌면 난초가 의도한 일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거예요. 인간의 입장에선 자신이 원하는 난초를 선택하고, 가져와 키우는 거라 생각하겠지만 난초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치 벌과 곤충을 사로잡듯 인간도 매혹시켜서 지금까지 생존해온 게 아닌가 싶은 거죠. 이렇듯 인간 중심이 아닌, 비인간 식물 혹은 곤충의 관점을 3D 프로그램을 매개로 표현해보려고 했어요. 난초의 생물학적 특성을 디지털의 존재 방식에 비유한다든지(‘시밀리아 시밀리부스 쿠란투르’), 시간의 흐름을 길게 늘어뜨려 잔상이 남는 것처럼 표현하는 방식으로 식물의 운동성을 얘기한다거나(‘포복하는 맥박’), 난초에 갇힌 곤충의 시각을 표현하는(‘복안의 정령’) 식으로요.
3D 프로그램으로 비인간 생명체의 감각이나 시선을 구현할 때 중점적으로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근거가 있는 이미지들을 만들고 싶어요. 3D라는 게 이미지의 재료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매체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불필요한 이미지는 넣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대상을 표현함에 있어서 단순히 인간의 눈에 보여지는 색이 아니라 잎이 보송한지 촉촉한지, 투과도가 높은지 등 물질의 속성을 더 고려해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포복하는 맥박’도 새롭게 만들어낸 이미지라 생각하는 관객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생긴 난초가 있어요. ‘벌보필룸(Bulbophyllum)’이라는 종인데, 동그란 뿌리에 이파리가 한두 개씩 콩콩콩 자라요. 그 생장의 모습이 제게는 마치 식물이 움직임의 잔상을 남기며 이동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이를 반영한 거고요. 더불어 벌보필룸의 특성을 통해 인간과 식물의 위치를 전복하려는 의도도 있었어요. 벌보필룸은 수분 매개자가 파리이기 때문에 인간이 선호하지 않는 악취가 나거든요. 그런 특징을 지닌 난초의 이미지를 가져옴으로써 ‘인간을 위해서, 인간의 시선에서’가 아닌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거죠.
애정하는 식물을 주제로 다루면서, 그 안에는 기존의 인식을 전복하거나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려는 의도가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 관람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나 관점은 무엇인가요?
갈수록 인간의 위치를 보다 겸손한 곳으로 데려가고 싶은 것 같아요. 예전에 작업의 주제가 되었던 고사리나 아주 오랜 시간 생존해온 식물들에 비하면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종족이잖아요. 그럼에도 마치 주인인 양 자연을 나눠 갖고, 파괴하고, 변화시키고 있잖아요. 그 점을 작업 안에서 인지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요. 또 식물을 탐구의 대상으로 다루는 작가인 동시에 여러 식물들을 가까이서 돌보는 실내 정원사로서, 그들의 생명력과 돌발 행동에 크고 작은 경탄을 했던 경험이 식물과 인간, 그리고 주변 환경과의 관계, 순환과 재생 같은 관심사로 이어진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전하고 싶은 ‘새로운 관점’이라는 건 어쩌면 최신의 새로움이 아닌, 기술과 문명의 빠른 발전 속에서 지금의 인류가 잊어버린 ‘과거의 관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세세히 전하려는 편인가요? 혹은 관람객의 해석에 맡기는 편인가요?
저는 관람객과 어느 정도 거리감과 긴장감이 있는 상태가 흥미롭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아, 예쁘다’ 하고 지나치는 걸음을 붙잡는 것은 저의 오랜 숙제이긴 해요. 동시대에 빠르게 소비되고 변화하는 3D 이미지를 사유의 장까지 가져올 수 있을 만한 어떤 루트가 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관람객들을 이미지의 샛길로 인도할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는 중이에요.

사진: 전석현, LED 패널 제작 및 설치: 트리엠
한 인터뷰에서 “작업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결과값이 나오는 경우에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을 굳게 먹는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특히 3D 작업에서 이와 같은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사실 그 말은 모든 예술에 적용될 수 있는 태도잖아요. 정답과 오답을 나누지 않으려는 것이요. 그럼에도 제가 프리랜서 작업자로서 3D 프로그램을 사용한 관성이 있어서, 혹은 3D라는 기술이 예술의 재료라기보다는 산업 맥락에서 파생된 소프트웨어라서 출신을 신경 쓰느라 기술적인 완성도를 따지게 되는 순간이 있어요. 그 태도를 경계하면서 3D를 처음 접했을 때의 천진난만하고 즐거웠던 감정들을 작업에 더 많이 녹여내고 싶다는 생각에서 한 말이었어요. 3D 작업 자체가 최상의 결과나 끝맺음 없이 계속해서 수정되고 갱신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보니, 특정한 이상향만을 좇거나, 절대적인 완성을 향하려는 마음은 제게 함정처럼 느껴졌거든요.
식물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잡초, 외래종, 광물, 그리고 모든 것을 둘러싼 환경까지 관심의 영역이 확장된 지금, 구상하는 다음의 작업은 어떤 형태인가요?
지금까지는 대상 중심적으로 작업을 해왔어요. 그간 환경에 대한 내용이 반영된 식물을 보여줬는데, 새로운 작업에선 환경이라는 시스템, 현상 자체를 작업에 담아보고 싶기도 해요. 식물의 개체가 아니라 어떤 메커니즘이나 순환 같은 걸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에요. 대상에서 환경으로, 좀 더 뒤로 물러선 느낌이죠.
보다 넓은 세계가 펼쳐지겠네요.
대상과 배경의 구분이 무의미한 넓은 세계를 구축하고, 그것의 일부분을 확대하여 작동하는 모습을 여러 스케일로 보여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3D 인터페이스 안에서는 공간에 제약이 없으니까요.